퇴근길, 가족에게 조금 덜 미안해하기로 했다

회사에선 보살, 집에선 폭군이 되는 이유

by 공감수집가

퇴근길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죄책감이 밀려오던 저녁이었다.


'나는 왜 밖에서는 세상 친절하면서, 정작 소중한 가족에게는 이토록 쉽게 짜증을 내는 걸까?'


회사에서의 나는 꽤 '나이스'한 사람이다.

업무가 몰려도 크게 화를 내지 않고, 동료의 주말 골프 이야기나 시시콜콜한 푸념에도

"아, 정말요? 많이 속상하셨겠네요."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친절의 8할은 '가면'이다.

웃고 있지만 내 시간과 에너지를 온전히 할애해 경청하는 일은 드물다.

영혼 없는 리액션 자판기처럼 반응하면서, 속으로는 오늘 쓸 글감을 고민하거나 퇴근 시간을 계산한다. 철저히 사회적 생존을 위해 세팅된, 안전하고 매끄러운 '가면'인 셈이다.


반면, 집 현관문을 여는 순간 그 정교한 가면은 무장 해제된다.

거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뒤집힌 아들의 가방, 아내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화가 훅 올라온다. 밖에서는 보살 소리를 듣는 내가, 집에서는 예민한 폭군이 되어 필터 없는 감정을 쏟아낸다.


그래서 가끔은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밖에서 쓴 에너지를 애먼 집에 와서 화풀이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꼭 미안해할 일만은 아니었다.

내가 화와 짜증을 여과 없이 낸다는 건, 역설적으로 가장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회사에서 동료의 고민에 진심을 다해 마음을 내주지 않는다. 상사의 농담에 배꼽을 잡고 숨 넘어가게 웃지도 않는다.(전년도 평가 점수가 하위권인 이유인가...)

내가 아이처럼 소리 내어 웃고, 처가의 과거 이야기에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닦고, 때론 불같이 화를 내는 곳.

그 모든 민낯의 감정이 허락되는 유일한 무대가 바로 가족 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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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쓰고 상처받지 않을 만큼의 거리만 유지하는 '안전한 친절'과,

서로 생채기를 낼지언정 내 밑바닥 감정까지 쏟아낼 수 있는 '날것의 진심'.


어쩌면 나는 가장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짜증 낼 특권'을 행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 밤엔 가족에게 조금 덜 미안해해도 좋겠다.

나의 이 못난 짜증은, 당신들을 향한 가장 투명한 진심이자 완벽한 무장 해제의 표현이라고 뻔뻔한 변명을 해볼 테니.

그러니 오늘 퇴근길, 현관문 앞에서는 세상 가장 무거운 '친절 가면'을 훌훌 벗어던져야지.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뻔뻔한 민낯으로 외쳐야겠다.


"나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