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크게, 귀를 활짝
특별할 것 없는 토요일 오후, 저와 남편은 나가기 싫다는 아이들을 꼬득여 주변에 새로 오픈한 수제 돈가스집으로 갔습니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지 않았는지 잘 먹질 않았어요. 아이들 몫까지 꾸역꾸역 먹느라 벙벙해진 배를 소화도 시킬겸 아파트 단지 안을 한바퀴만 돌고 들어가기로 했어요. 아이들도 킥보드를 타고 싶은 마음에 이구동성 좋다고 외쳤지요.
살짝 더웠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한, 산책하기 딱 괜찮은 날이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은 그네도 타고 미끄럼틀도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푸릇 푸릇한 나무와 경쾌한 새소리, 꽤 만족스런 시간이었어요.
오늘따라 참새들이 유난히 바쁩니다. 눈 앞을 부산스럽게 날아다니는 아이들이 많아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평소에 생물에 관심이 많은 범이는 놀다말고 참새들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여기에 왜 이렇게 구멍을 파지?"라고 하며 "여기 밑에 뭐가 있나? 내가 더 파볼까?"라고 하더라구요. 가서 보니 거기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흙이 파여진 흔적이 많이 보였습니다.
남편이 갑자기 "어~ 저기에 참새 둥지가 있나보네"라고 합니다. 짹짹소리가 유난히 많이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놀이터 한 켠의 쉼터 역할을 하는 정자 지붕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세히보니 기와가 얹어진 둥근 지붕틈 사이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들이 있었고, 더 깊숙한 곳을 유심히 보니 새끼들도 얼핏 보였습니다.
참새 둥지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니, 참새들이 지붕 속을 드나드는 모습이 너무나도 잘 보이는 것이 아니겠어요. 한두마리가 아니었어요. 소리로 추측컨데 그 속에 수십마리는 있는 듯 했습니다. 저렇게 둥지를 튼지 꽤나 되었을텐데, 그동안 한번도 눈치를 채지 못했었습니다. 그저 정신없이 몰려 날아다니네 하고 말았죠.
어미 참새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놀이터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놀이 기구들은 더이상 눈에 보이지 않았어요. 놀이터 주변은 참새들이 먹이를 구하는 장소이자 집을 짓는 재료를 얻는 곳이었습니다. 정자 지붕 아래는 우리가 보고 느끼지 못하는 생명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이었고, 부지런히 우리와 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참새들의 보금자리였습니다.
날이 더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는 시원한 그늘에 서 있었습니다.
호야가 "어! 공벌레 집이다!" 라고 외칩니다. 우리 발 아래에의 무심코 지나칠 자그마한 구멍 속에 공벌레들이 옹기종기 모여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공벌레들에겐 그곳이 얼마나 아늑한 보금자리일까요?
살짝 고개를 들어보니 얼기설기 연약한 거미줄 사이 정체모를 녀석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습니다. 범이에게 "범아~ 이거 뭐야?"라고 물어보니 "어~ 이거 무당벌레 번데기야!"라고 말해줍니다. 뭐라고? 무당벌레 번데기? 사실 저는 평생 본적이 없는 거에요. 관심이 없어서겠죠. 어쩐지 요새 무당벌레가 좀 많이 보이더라니~ 번데기 과정을 거치는 시기인가봐요.
얼마전 무당벌레 애벌레를 보고는 살짝 충격을 받았드랬죠. 생각보다는 조금 징그러워서요.
대롱대롱 매달린 녀석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무당벌레 모습과 애벌레를 반반 섞은 모양이었습니다.
모습은 썩 호감이 가지 않았지만, 기껏해야 1cm 정도되는 나뭇잎 끝에 홀로 붙어있는 무당벌레 번데기가 조금은 쓸쓸하게 느껴졌어요. '지나가는 아이들이 나뭇가지로 휘~ 한번 건드리기만 해도 죽는거아닐까?' 걱정도 되었고, '내일 비온다는데 어쩌나' 싶기도 했어요. 평소에는 존재조차 몰랐으면서 말이에요. 오지랖인가요? 다행히 눈에 잘 띄지 않는 안쪽의 수풀 속에 있어서 무당벌레가 될 때까지 잘 버틸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예쁜 무당벌레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모습에서 짠한 마음과 동시에 기특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면 조금 이상한가요? 그래도 그 순간 정말 그런 마음이 들었답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범이가 "엄마, 내가 저번에 말한 개미집 보여줄까?" 그러더라구요.
범이가 얼마전 지나가는 말로 개미집을 보았다고 얘기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어~ 그거 여기 근처에 있어? 궁금하다 보여줘." 라고 대답하고는 범이를 따라 나섰어요.
범이가 농구대 옆 화단으로 뛰어갑니다.
"여기서는 절대 가까이 가면 안돼, 알겠지? 개미가 막 다리를 타고 올라온단 말이야." 하고 단단히 주의를 주고는 엉덩이를 뒤로 쭉 뺀 모습으로 "저기야 저기!"라고 손가락을 가리킵니다.
솔직히 아무 기대도 안했는데 "와~ 대박!" 찐 반응이 터져나왔습니다.
기껏해야 개미집이지 싶었는데 저렇게 큰 것이!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로 꽤나 큰 둔덕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 주변을 시커멓고 큰 개미들이 와글와글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와~ 여기가 바로 개미 왕국이구나 싶었어요. 여기 산 속 아니고 숲 속 아니고 아파트 단지 안인데요, 저 부분 만큼은 침범하면 안되는 영역이라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어요.
우리들이 생활하는 공간에 이렇게나 다채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다니. 아파트 단지는 사람이 사는 공간 아니었던가요? 같은 공간안에 이렇게 많은 라이프 스토리가 펼쳐지고 있었다니요?
매일 다니는 길인데도 그동안 왜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까요?
새로운 눈을 통해 본 주변 풍경은 생명력이 흘러 넘치고 무한히 뻗은 우주같은 곳이었습니다.
같은 길을 오가더라도 각자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다르지요.
작은 곤충이 잘 보이는 사람, 땅에 떨어진 쓰레기가 눈에 보이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 얼굴을 잘 보는 사람이 있듯이 우리는 모두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 먼저 보여요. 그리고 그것이 세상이라고 믿고 살아가지요.
집에 들어오며, 가끔은 이렇게 새로운 창으로 주변을 바라보는 것도 의미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없던 새로운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늘 그자리에 있었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요.
매일 다니는 길도 그저 무심히 지나치면 일상의 길에 불과하지만 관심을 기울이면 특별한 의미를 줍니다. 아이로부터 일상을 특별하게 보는 시선을 선물받을 수 있었던 하루였기에 이 하루는 저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았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