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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메르트리 Mar 14. 2024

10. 치즈가루가 사라졌다!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스러움

아이들의 말은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요?

허를 찌르는 말에 깔깔 웃기도 하고 곱씹어 생각해 보면 새로운 통찰을 주어 놀라기도 해요.



아직 때 묻지 않은 생각들 이어서일까요?

그렇다면 우리 어른들의 생각은 때가 묻은 것일까요?



'때'가 무엇이냐 한다면 '사람들의 시선'쯤으로 말해두고 싶네요. 

적어도 아이들보다는 수십 년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스스로를 보호하며 살아온 것 같아요.

나 홀로 야생에 있는 것은 너무 위험하니 보호받을 수 있는 울타리 속에서 지내고 있는 저는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법한 것을 생각해요.



그렇게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시간을 보내다보니 서로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것이 아닐까요?

남들과 다르다면 울타리 밖으로 나가버리게 될 지도 모르니(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무섭기도 하고요.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나도 모르게 의식하게 된 것 같아요. 



울타리 안에서 하는 비슷한 생각, 관례처럼 굳어져버린 그런 생각들.

서로 다르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달라도 아이들과 어른들만큼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아이들의 생각은 아직 야생의 것, 신선한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마치 숲 속에 들어온 듯 신선한 바람을 휘~ 하고 불어주는 듯해요. 

머리가 맑아져요.





범이는 치즈마니아입니다.

치즈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고르곤졸라를 제일 좋아하고요 에멘탈, 고다 모두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이지요.

오랜만에 피자를 주문했어요. 

'딩동~' 반가운 배달 도착 소리와 함께 풍미 가득한 피자 냄새가 솔솔 퍼지니 아이들은 엉덩이가 들썩들썩합니다. 



모락모락 김이나는 따끈따끈한 피자는 언제나 옳아요.

식기 전에 얼른 떠서 아이들 접시에 올려주었어요. 

범이는 모짜렐라 치즈가 가득 펼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즈가 부족해~" 라며 치즈가루를 양껏 뿌렸습니다. 동생 호야는 옆에서 치즈 먹기 싫어서 걷어내려 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그날따라 갓 구워져 나온 피자가 너무나도 맛있는 거예요.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범이가 불현듯 외칩니다.


"어~ 치즈가루가 사라진다!! 엄마 치즈가 숨었어!"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범이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열기가 남아있는 피자 위에 뿌린 치즈 가루가 사르르 녹고 있었어요. 잠시 지나니 원래 있던 치즈와 구분이 안될 정도로 감쪽같이 사라졌지요!


"엄마, 색깔도 완전히 똑같아졌어! 이건 의태야 의태 "

토끼눈을 한 범이가 마치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듯 외쳐요. 


여기서 잠시, 의태란 동물이 몸을 보호하거나 쉽게 사냥하기 위해서 주위의 물체나 다른 동물과 매우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일을 말한다고 합니다.(출처: 네이버백과사전)

쉽게 말해, 주변의 색과 모습과 흡사하게 만들어 눈에 쉽게 띄지 않게 하는 건데요, 분신술이라고 하면 좀 쉬울까요? 


꼭꼭 숨어라~~ 나 찾아봐라 하고 속임수를 쓰는 거지요.


범이는 파마산 치즈가루가 모습을 감춘 것이 난초 꽃과 구분이 가지 않는 난초 메뚜기, 나뭇가지와 흡사한 대벌레쯤이라 생각했나 봅니다.


치즈가루가 녹는 걸 보고 숨었다고 생각한 범이의 아이디어가 엉뚱하면서도 재밌었어요. 

아이들의 생각은 어쩜 이리 말랑할까요?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요?


가만 생각해 보니 아이들은 주변의 사물을 마치 사람처럼 표현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며칠 집을 비우고 여행을 가는 날이면 아이들은 꼭 자신들이 좋아하는 물건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수건이야 잘 있어~"(잘 때 얼굴 부비면서 꼭 붙들고 자는 손수건)

"회색이, 정킷(덮고 자는 이불 ㅎㅎ) 집 잘 지키고 있어야 돼~"

말만 들으면 아직 어린 유아쯤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벌써 어엿한 초등학생이랍니다.

그런데도 이러는 걸 보면 아직 어린이는 어린이인가 보다 싶어요.

 



아이들 말을 떠올리며 주변 사물을 둘러봅니다.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선택받지 못하는 가방, 언제 세상 빛을 볼지 기약 없는 뜯지 않은 택배 상자 속 물건, 매일 쉴 틈 없이 열일하는 세탁기 등. 



살아있다 여기니 괜히 먼지 한 번 털어주게 됩니다. 

생명이 있다 여기니 가지런히 놓아주게 됩니다. 

이성적이던 뇌가 말랑해지며 조금은 감성적이 됩니다.

이런 느낌이 좋네요. 이 순간만큼은 아이가 된 것 같고, 조금은 더 예쁜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것이 소위 말하는 '진짜가 아니'더라도 그런 생각을 한 시간들은 '찐'이니까요.

이것이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문득 해보며 (과학교사지만)조금은 덜 이성적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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