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인생은 뭐 특별할 줄 알았니?

29년간의 착각

by 전구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오후 3시. 오랜만에 엄마와 나란히 앉았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엄마는 드라마를 참 좋아한다.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각종 채널 별로 드라마 시간표를 다 꿰뚫고 있는 것도 모자라

드라마 시작하기 2시간 전부터는 이미 본 드라마 회차를 다시 보기에 바쁘다.


지금이 딱 그 시간이다. 엄마의 드라마 다시 보기 시간.

이 시간 동안은 우리 집의 리모컨의 주인은 엄마다.

사실 이 시간에는 집에 엄마 말고는 사람이 잘 없다.


나는 3년 전 결혼을 해서 출가를 했고, 남동생은 지방에서 근무를,

막내 동생은 이제 중학생이 되어 친구들과 이곳저곳 쏘다니기 바쁜 나이다.

아빠도 바빠서 야근까지 하는 날이면 엄마는 온종일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엄마는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막내를 임신했을 때는 석사 졸업 논문을 준비할 정도로 열심히였다.

하지만 거실 한편에 놓인 피아노는 이따금씩 막둥이가 심심풀이로

한 번씩 치고 지나갈 뿐 영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텔레비전을 넋 놓고 바라보며 리모컨을 만지작 거리는 엄마의 손을 바라보았다.

엄마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분명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남의 기억 같았다. 이상했다.


"엄마, 엄마는 왜 피아노를 치게 됐어?"

나는 엄마의 손에서 애써 시선을 거두며 말을 꺼냈다.


"피아노? 글쎄 교회에서 반주하는 언니가 멋져 보여서 시작한 거 같아."

어떤 대단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에게 엄마의 말투는 간결하고 담백하게 들렸다.


"... 그게 다야? 엄마 대학원까지 갔었잖아? 했던 게 좀 아깝지 않아?"

나는 혹시나 내 질문이 부족했는가 싶어 엄마에게 다시 물었다.


"아까워도 별 수 있니? 너희 키우고 살림하다 보니까 시간이 간 거지."

엄마는 당연할 걸 물어본다는 듯이 귀찮아했다.


"엄마... 나도 그럼 내가 아등바등했던 것들이 엄마 나이가 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야?"

나는 왠지 억울한 마음에 괜히 바지단을 접어 올리며 툴툴거렸다.


"인생이라는 게 뭔가 대단한 게 있어야만 인생이 아니야."

엄마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별일 아니라는 듯한 말투가 왠지 내 마음을 더 건조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

엄마의 말에 어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나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딸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뭔가 이상했는지 드라마에 빠져있던 엄마가 나를 휙 돌아봤다.


"엄마 나는 열심히 산 거 같은데 왜 뭐하나 잘난 게 없지?"

엄마의 무심한 한마디가 기껏 잘 참고 있던 내 눈물을 터뜨려 버렸다.


나는 디자인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입사한 디자인 회사는 야근이 생활이었고, 경쟁은 치열했으며, 내 디자인은 선택되는 날보다 그렇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아등바등 버티면 대단한 디자이너가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자녀계획을 세우면서 알게 된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 나는 좌절하고 있었다.


"네 인생은 뭐 특별할 줄 알았니?"

엄마가 담담하게 내게 말했다.


"....... 뭐라고?"

나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내 귀를 의심했다.


"딸, 때로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 만 해도 너는 네 몫을 다하는 거야 항상 내가 인생에 주인공일 수는 없어. 그러니 너무 속상해할 필요도 없고 너무 스스로를 들들 볶을 필요도 없어."

엄마는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 그렇네 내가 욕심이 많았네."

왠지 차분한 엄마의 말에 나는 울컥했던 마음이 금세 진정되었다.


맞다. 생각해보니 사실 엄마 말이 다 맞다.

늘 내 마음을 힘들게 했던 <밝고 영롱한 무지개 빛> 미래는 어쩌면 막연하게 학습된 <성공한 인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오늘 하루 잘 먹고 잘 웃고 감사할 줄 아는 것만 해도 어려운 일있은데 굳이 그 하루 앞에 <특별한>을 붙이면 섣부르게 욕심을 부리게 되는 것 같다. <특별한>을 내려놓으니 종종걸음 치던 생각이 비로소 멈춘 것 같다.


부왕-

텔레비전 속의 여배우가 시원하게 자동차 액셀을 밟는다. 왠지 내 마음도 펑 뚫려 내려가는 것 같았다. 언제 다시 뚫린 마음이 답답해 질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이 시원함을 그리고 특별한 것보다 더 빛나는 평범함을 잘 기억해 두고 싶다.


29년 만에 내가 짊어지고 있던 <특별함>을 잠시 내려놓은 평범한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