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비전이 왜 거기서 나와?

30년 차 직장선배의 조언

by 전구

흔들리는 차 안.


지-잉-------

조수석에 앉은 나는 창문을 내려본다.

열린 창틈 사이로 부는 바람이 선선하다.

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티 없이 맑아

눈이 시릴 지경이다.


뭔가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벌써 가을이 오고 있었다.


지-잉-------

청량한 가을바람에 왠지 마음만 뒤숭숭해진 채로 내렸던 창문을 올렸다.


음악이나 들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싶어

라디오 주파수 버튼을 만지작거려 본다.


"라디오 틀어도 돼요?"

나는 슬쩍 운전석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 그래라."

자동차가 유턴을 마치자 대답이 돌아왔다.


핸들을 잡은 투박하고 커다란 손은

보기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핸들링으로

도심을 미끄러지듯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치치 치치 칙----치익'

♬'또 하루 --치직-멀어져-간다-'♬

익숙한 멜로디가 잡음을 뚫고 귀에 꽂힌다.


길을 걷다 오백 원짜리 동전을 발견한 아이처럼 나는 눈을 반짝이며 주파수를 정교하게 맞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알았는데-'♬

잘 맞춰진 주파수에 깨끗한

김광석의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우연히 틀은 라디오에서 아는 노래가 나오니

왠지 아는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아버지! '서른 즈음에'예요!"

횡재한 듯한 목소리로 나는 호들갑을 떨었다.


"네가 이 노래를 알아?"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신호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라디오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아버지, 대한민국에 이 명곡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는 노래에 왠지 마음이 들떠버린 나는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건 그렇지 정말 명곡이야."

아버지는 내 호들갑에 피식 웃으며 장단을 맞춰 주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라디오 볼륨을 만지다

문득 내비게이션의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도착지까지 남은 거리는 12km.


점점 줄어드는 숫자에 한껏 부풀었던 마음이

갑자기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 이런 날엔 어디로든 놀러 가는 게 딱인데...

그렇죠 아버지?"

볼륨을 높이려던 손을 거둔 나는

이미 목소리가 축 처진 채로 물었다.


화창한 날씨와 완벽한 음악.

그리고 공기마저 달콤한 완벽한 주말.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나는 회사로 출근을 하는 중이다.


"내 마음만 즐거우면 몸이 어디에 있던

그게 노는 거고 쉬는 거지."

아버지는 백미러를 보며 깊은 산속에서

수련하는 도사처럼 근엄하게 대꾸했다.


"하아아아아아아아- 아-버-지이- 출근하기 싫어요......."

이미 마인드 컨트롤에 실패한 나는

괜히 어리광을 부리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아아아아-그래도 아버지가 이렇게 직장까지 모셔다 드리잖아요."

아버지는 나를 따라 하며 내심 분위기를

살려보려고 노력하시는 듯했다.


내 흉내를 내는 아버지의 말을 끝으로

나는 한참을 멍하니-

앞 차 트렁크로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봤다.


출근한다는 사실만 빼면

정말이지 완벽한 주말이었다.


그러다 문득 어린 시절

주말이면 당연하게 출근을 하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 아버지는 회사를 몇 년 다니셨죠?"

나는 달리는 앞 차의 트렁크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한.. 30년 됐나?"

아버지는 주말이라 면도하지 않은 턱을

손바닥으로 슥슥 문지르며 대답했다.


"와... 30년......."

내 나이와 비슷한 아버지의 연차

내가 감히 상상하지 못할 세월이 느껴다.


도대체 어떤 마음가짐이면 그 긴 시간을

저렇게 단단하고 꾸준하게 유지할 수 있는 걸까?


"... 아버지, 회사 다닐 때 아버지는 어떤 비전을 가지고 다니셨어요?"

나는 맛집 사장님께 레시피를 물어보듯

어떻게 질문을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조심스레 물었다


"비전? 비전이 왜 거기서 나와?"

아버지는 엉뚱한 질문이라는 듯 물었다.


"왜... 그 면접 볼 때도 어떤 비전을 가지고 일할 거냐... 뭐... 그렇게 많이 물어보잖아요?"

나는 내가 단어 선택을 잘못했나 싶어

질문에 예시를 덧 붙이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네 비전을 왜 직장에서 찾아?"

여전히 아버지는 답답하다는 듯 대꾸했다.


"... 그럼 직장은 무슨 마음가짐으로 다녀요?"

나 역시 다른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답답하다는 듯 되물었다.


"무슨 마음가짐씩이나?

직장은 그냥 돈을 벌기 위해 다니는 곳이야."

아버지는 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비전이 뭐냐, 어떤 포부를 가지고 있냐 많이들 물어보는 말이지. 근데 말로 회사가 네 꿈과 미래를 실현시켜주는 곳이라고 생각하니?"

아버지는 빨간 불에 맞춰 차를 멈춰 세우고 나를 바라보았다.


"......."

막연히 오랜 회사생활의 장점을 듣게 될 거라 생각한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의 침묵 속에-

라디오서 흘러나오는 김광석의 목소리만이

아버지와 나 사이의 적막한 공백을 메워 주었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빨간불이 이내 파란불로 바뀌었다.


"생계를 위해 가는 곳에 '비'이나 '미래', '포부'를 붙여 생각하기 시작하면 상처 받는 일이 많아질 거다."

아버지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잔뜩 담긴

거두며 애써 덤덤하게 얘기했다.


"... 그렇지만"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담담한 현실을

직접 귀로 들으니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사기를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학창 시절엔 남들처럼 4년제 대학을 나오고 싶었고,

대학을 졸업할 즈음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출근하는 것이 꿈이었다.


나는 항상 막연한 미래를 꿈꿨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안갯속을 걷고 있었지만

애써 그 막연함은 이 나이엔 당연한 거라 치부다.


열심히, 꾸준히만 하면 나도 언젠가는 당연히

안개 너머 찬란한 무지개 만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사실 스스로의 젊음을

과대평가하며 자위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어느 것 하나도

그냥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없었다.


단순히 야근과 철야, 주말 근무를

착실히 한다고 해서

내가 세워본 적 없는 비전이나 꿈같은 미래는

갑자기 뚝딱 생겨날 리 없는 것이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주말출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다 보니 당연히 괴리감만 들 뿐이었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있구나♬

마지막 소절을 끝으로 라디오에선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본인의 미래와 비전을 이렇게 작은 회사에 맡기기엔 아직 너무 젊지 않나? 신입?"

아버지는 자동차 속력을 줄이며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

나는 왠지 내가 이제까지 내 삶의 방향과 속도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란한 전이 회사에 있을 수도 있지만 회사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한 곳에만 몰두하지 말고 본인을 삶을 넓게 볼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아버지는 후진을 하며 교장선생님처럼 말했다.


"... 아버지! 오늘은 그냥 돈 벌러 왔다고 생각하는 게 맞는 거 같네요. 거참 돈 벌기 좋~은 날씨네!"

나는 안전벨트를 풀며 맞장구쳤다.


아버지와 나를 태운 차가 회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저 생각만 바뀌었을 뿐인데

쾌청한 가을 하늘이 더 이상 억울하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알람을 연신 울려댔다.


아버지의 토닥이는 손길을 뒤로하고

나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멀어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내 어깨에

따뜻한 오후의 햇빛이 쏟아졌다.


묵직하기만 했던 마음 한편에도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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