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렌스버그 부부와 마르셀 뒤샹, <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마르셀 뒤샹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전시장으로 향했다. 이번 전시는 현대 미술의 다방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뒤샹의 전 생애와 작품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대규모 회고전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쉽게 다시 보기 힘들 것 같아서다. 그런데 이번 전시가 대부분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가지고 온 작품들로 구성이 되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어떻게 하나의 미술관에서, 한 작가의 유명하고 주요한 작품들을 이렇게나 많이 소장할 수 있었을까? 전시의 다른 부분보다도 그 점에 궁금증이 생겼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샘>, <큰 유리>, <에탕 도네>와 같은 뒤샹의 주요 작품을 대부분 소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월터와 루이스 아렌스버그 부부(Walter and Louise Arensberg)의 공이 컸다. 이들은 지금까지 소개한 컬렉터 중에 ‘아름다움’ 대신 ‘아이디어’에 투자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특별한 인물들이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샘(Fountain, 1917)>은 누구나 한 번쯤 보고 들었을 만큼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남성용 소변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한 이 이상한 작품이 바로 이전까지의 미술에 대한 관념 자체를 뒤집어 놓은 기념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재현이라는 목적에 충실했던 고전 미술에서 벗어나 ‘현대 미술’이 태동하기 시작할 때, 많은 화가들은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 감각 자체를 충실히 묘사하거나(인상파),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을 색이나 붓터치로 표현하거나(후기 인상파, 야수파 등), 삼차원의 대상을 이차원의 평면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 고심하거나(입체파),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거나(초현실주의), 대상의 빠른 움직임을 그대로 표현하려 시도하는(미래주의) 등 미술사에 있어서 전례 없는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미술의 재료(캔버스, 물감 등)와 작가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기성품을 단지 작가가 미술품으로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이라 주장한 이는 없었다. 그것은 미술 내에서의 개혁을 꾀하는 것이 아닌, 미술이라는 관념 자체에 저항한 것이었다. 그러니 ‘어떤 작품이든 출품하기만 하면 받아준다’고 자신 있게 표방했던 독립미술가협회 측에서조차도 뒤샹의 소변기는 얼마나 당혹스러웠겠는가.
뒤샹은 그 자신이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있었던 독립미술가협회의 1917년 전시에, 가명으로 사인을 한 뒤집힌 소변기를 출품한다. 왜 그랬을까? 그는 당대 아방가르드의 최전선에 있었던 미래주의 화파와 분석적 큐비즘(입체주의)의 영향이 보이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Nude Descending a Staircase NO. 2, 1912)>로 어느 정도 화단의 인정을 받고, <자전거바퀴(Bicycle Wheel, 1913)>와 같은 레디메이드(기성품) 작품을 이미 실험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미 전위적 예술가로서 입지가 있었던 그는, 어쩌면 자신의 입지나 명성과는 별개로 미술계와 대중이 아방가르드 예술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시험해보려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샘>은 엄청난 논란을 일으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독립미술가협회는 출품만 하면 전시해주겠다던 애초의 조항을 어기고, <샘>이 ‘예술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시를 거부한다. 뒤샹은 (역시 익명으로) <샘>이 왜 예술 작품일 수 있는지에 대해 항변하는 글을 썼지만 결국 거절당했고, 뒤샹은 독립미술가협회에서 사임했다.
뒤샹이 이 일로 인해 상심하고 예술 활동을 접거나 이전처럼 다시 회화 작품으로 회귀하였을 인물은 절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그가 평생에 걸쳐 꾸준히 그의 소신에 따라 반예술적인(anti-Art)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뜻에 공감하고 힘을 실어주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에 아렌스버그 부부가 있었다.
역시 독립미술가협회 위원이었던 아렌스버그 부부는 <샘>의 출품 여부에 관한 찬반 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졌고, 급기야 그것을 사들이기까지 했다. 우스운 것은 부부가 구입한 <샘>을 잃어버리자 뒤샹은 또 다른 변기를 구해 거기에 사인을 한 뒤 다시 부부에게 주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 작품 자체가 원본, 원조를 바탕으로 한 예술의 권위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반예술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Louise Arensberg, Walter Arensberg, Marcel Duchamp, 1936 photo by Beatrice Wood, Beatrice Wood papers, Smithsonian Institution
아렌스버그 부부는 1915년부터 1921년까지 뉴욕의 한 아파트를 렌트하여 살았는데, 그 시기에 마르셀 뒤샹과 같은 프랑스와 미국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친분을 맺으면서 이 아파트는 밤마다 당대 예술인과 문학가, 지식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변모하게 된다. 이 아파트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타임머신이 있다면 꼭 엿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다만 아렌스버그 부부가 <샘>을 구입하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뒤샹의 ‘인생 후원자’가 되었던 데에는 이때 오고갔던 아방가르드 예술에 대한 진지한 대화가 일조했으리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뒤샹을 후원하고 그의 많은 작품을 구입하였다는 것은 1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신념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껏 소개한 많은 모던아트 컬렉터들 또한 당대 미술계의 눈에는 충격적이었던 작품을 소신껏 구입한 이들이지만, 뒤샹의 <샘>은 그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사인 외에는 작가의 흔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흔하디흔한 (심지어 용변을 보는 용도의) 기성품이었으며, 오직 작가의 사인, 그리고 그것이 미술관 안에 있다는 맥락만으로도 미술품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작품이었다.
예술의 범주 내에서 시각적인 ‘순수성’을 찾고 이를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모더니즘의 흐름에서 벗어나, 뒤샹의 작업은 그 범주 자체를 뒤집고 ‘반예술의 미학’이라는 새로운 갈래를 만들어내었다. 20세기는 바로 이 두 갈래가 공존하며 현대 미술의 흐름을 이끌어가던 시기다. 아렌스버그 부부는 당대의 컬렉터들에게 모더니즘 작품보다도 훨씬 부담스러웠을 뒤샹의 반예술 작업을 후원함으로써 미술의 중요한 한 갈래의 시작에 기여했다. 실제로 뒤샹은 <샘>의 급진성이 무색해질 만큼 다양한 예술 실험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이후 팝아트, 개념미술 등 현대 예술가들에게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
1950년대에 아렌스버그 부부는 200여 점의 뒤샹 컬렉션을 기증할 미술관을 뒤샹과 함께 고심하여 필라델피아 미술관으로 선정하였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그리스 신전과 같은 전경을 가지고 있어 작품을 영구히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다. 그리스 신전과 아방가르드 예술이라니, 조금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아무튼 이 컬렉션으로 인해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뒤샹 미술관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 부부의 컬렉션이 미술관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는 사실은 미술에 있어 컬렉터의 힘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아렌스버그 부부는 더러운 변기 하나, 그것도 원본이 아닌 복제품을 소장하였지만 그들이 보여준 것은 그들의 선구적인 통찰력과 신념, 그리고 이를 위한 과감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뉴시스 - [박현주 아트클럽] ‘소변기’ 뒤샹전 서울 오게 한 ‘기증의 힘’
Philadelphia Museum of Art – Arensberg Archives: Historical N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