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영 Choi Myoung Young
‘평면적’이라는 표현은 층위의 가능성, 변화 혹은 새로운 해석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로 주로 쓰인다. ‘평면의 깊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단조로이 반복되는 벽지의 패턴에 하릴없이 시선을 빼앗겨본 경험이 있다면, 우리는 평면에도 공간과 깊이가 있으며 무한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회화의 현실
최명영은 평면의 문제에 50여 년간 매달려왔다. 한 가지 문제에 평생을 천착하는 일은 어떤 것일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그가 살아낸 지난 수십 년의 한국은 전례없이 많은 변화가 집약적으로 일어난 시기였다. 그 시간 속에서 무언가를 꿋꿋이 지속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욱 치열한 일이었을 것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최명영은 한국전쟁 때 월남한 유년기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4∙19 학생 의거를 맞이한 청년기를 보내며, “무언가 확실한 것을 찾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마음이 그를 지금까지 이끌었을까?
눈 앞의 캔버스와 손가락 끝에 만져지는 물감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것이 ‘물성’이다. 대상을 화면에 그대로 옮기는 것은 환영을 만드는 것일 뿐이다. 학생 시절의 어느 날 최명영은 우연히 카임 수틴(Chaïm Soutine, 1893-1943)의 화집에서 인물의 손이 두터운 물감으로 툭 뭉개져 있는 표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회화에서의 ‘리얼리티’를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회화, 페인팅에 있어서 ‘현실’이란 그것이 평면 위에 칠한 물감이라는 사실이다. 최명영은 회화를 회화로 만드는 평면 조건에 대한 개념적 탐구를 직접적인 ‘물성’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다. 그것은 결국 예술이라는 정신적 활동의 실제적 체현이었다.
살아있는 정신
한국의 단색화를 서양의 모노크롬 회화와 구분지으려 할 때 가장 중요한 지점은 바로 완성된 화면 너머 은연 중에 드러나는 노동의 흔적, 그것이 연상시키는 수행의 정신이다. 물감을 표면에 문지르고, 롤러나 붓을 들어 팔을 상하좌우로 휘두르는 것은 노동이며,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이 세계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다.
동년배 청년 작가들과 ‘오리진’을 결성하고,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의 창립 멤버이자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며 당시 한국 미술의 최전선에 있었던 최명영에게도 반복과 신체적 노동은 주요한 키워드였다. 손가락으로 물감을 일정하게 문지르고, 사포로 세심하게 갈아낸 1970년대의 초기 작업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평면과 물성에 대한 반복적 실험은 그에게 회화적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시도였을 뿐 아니라, 그림과 화가의 고유한 실존을 증명하려는 행위이기도 했다.
"평면조건"
그가 작업에 ‘평면조건(Conditional Planes)’이라는 제목을 붙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이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나의 작업명제 하에서 형태나 방식에 여러 실험을 거듭해왔는데 그 첫번째는 롤러를 이용한 작업이다. 물감을 평면 위에 도포하고 롤러로 밀어내면 캔버스 위에 납작하게 밀착되고 남은 물감이 캔버스 끄트머리로 밀려나 화면 바깥의 공간까지 회화의 존재를 확장시킨다.
한편 한지에 먹을 칠하고 먹이 배어나온 종이의 뒷면에서 송곳을 찔러 화면에 수많은 오돌토돌한 숨구멍을 틔워낸 작업도 있다. 화면의 앞과 뒤, 뚫어낸 빈 공간까지 회화의 영역은 무한히 확장되다가도 또 일정한 크기와 비율로 분할되어 질서 안에 자리잡는다.
1990-2000년대에 최명영은 다시 화면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하는데 붓으로 수직과 수평의 선을 반복해서 긋는 작업이다. 작가의 반복적인 노동에 따른 붓질은 존재하나 화면에는 대상도, 중심도 없는 무한한 선들의 교차만이 있을 뿐이다. 수직, 수평의 선들은 서로 묻고 묻히며 표면에 드러났다가 다시 아래로 잠겼다를 반복한다. 어느 선이 아래에 있고 위에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화면은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엮여 있다.
호흡하는 평면
최근의 작업에서 그는 물감으로 캔버스를 다 덮지 않고 의도적으로 노출하는데, 즉 소지(素地)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그의 작업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다.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아무런 바탕칠이 되지 않은 화면 위에 균질하게 발라낸다. 따라서 화면에는 물감이 미처 묻지 않은 부분의 캔버스가 날것의 색과 질감을 그대로 드러낸다. 비어 있는 공간에도 나름의 목소리를 부여한 것이다. 이처럼 ‘여백’을 회화의 주요하고 적극적인 구성원으로 대하는 태도는 동양 미학의 명맥에서 이어지나, 그 의미는 현대 사회의 관점에서도 유효하다.
우리는 삶에 무언가를 채워 넣기 위해 소비를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비워내기 위해서도 돈을 지불한다. 이미지, 상품, 영양소, 관계 모든 면에서 우리의 삶은 이미 과잉되어 있기 때문에 빈 공간에서야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것이다. 호흡 – 호흡이란 들이쉬는 것뿐만 아니라 내쉬는 것도 포함하는 것이다. 비워내야 다시 채울 수 있다. 따라서 채움과 비움이 반복되며 화면에서 동등한 수준의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최명영의 평면은 호흡 그 자체다. 손가락과 물감과 캔버스가 상호 교류하고 협업하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화면 앞에서 우리는 리드미컬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고요하고 치열하게
‘반복’은 같은 일을 되풀이함을 뜻한다. 그러나 되풀이하다 보면 절대 같아질 수가 없음을 최명영의 작업에서 확인하게 된다. 같은 동작의 반복 속에서도 감정과 컨디션, 상념에 따라 획은 미세한 변주를 보이고 그 일련의 과정 끝에 완성된 평면은 그 이전의 것과 분명히 다른 평면이다. 따라서 최명영의 평면은 표면적으로는 고요해보이나 치열한 움직임과 호흡, 변화의 에너지를 머금고 있다. 그리고 도약이 일어나는 건, 수많은 ‘엇비슷’한 반복의 한복판에서다.
최명영은 홍익대 재학 시절 자신의 작업을 보고 당시 교수였던 김환기 선생이 무심히 던지고 간 말을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
“최 군, 일 년 대패질한 목수와 십 년 대패질한 목수가 같은 줄 아나?”
무수한 반복이 쌓여 묵직한 변화를 일구어낸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회화로 실천해오고 있는 셈이다.
이미지 및 영상 출처: 더페이지갤러리(The Pag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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