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 후회할 결심에 출사표를 내다.

다만 구구절절을 곁들인... .

by 에밀리뉴

'어쩌다 여기까지 와버렸을까.' 라는 문장에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질까, 아니면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궁금해하라는 뻔한 상술적인 문장으로 느낄까. 나는 흔한 문장을 쓰는것이 부끄럽고 그런식으로 내 글에 주목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은 정말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서는 안 될 상황들이 존재한다고도 생각한다.


이 글은 정확히 알아보지 않고 냅다 지원한 회사에 덜컥 붙어버린 내가 그 회사를 운명으로 받아들여야할지 혹은 합격이라는 달콤한 보상에 홀려 현재를 부정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할지에 대해 고민한 타임라인인이다. 그리고 남 탓을 하지 않고, 오롯이 내가 선택해서 나 스스로 책임을 지기 위함이기도 하다.다만 나는 늘 인생을 그리 계획적으로 노력하며 살지는 않았다. 모든것은 생각해보면 우연히 왔고, 그 우연이 꽤 괜찮았다. 다만 이제 그 '운빨'이 다 한 것은 아닐까가 가장 걱정인 것이다.


나는 이미 이직할 마음을 굳히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사실은 원래는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다. 이직을 해야하는이유, 지금회사가 좋은이유, 이직 후의 리스크, 이직 후의 기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조언들. 이것들을 모두 정리해가며 글을 쓰며 결론에 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출근길에 A4용지를 챙겨나서거나 노트북을 챙겨 나와 퇴근 후 조용하거나 영감이 들 법한 카페를 찾아다녔다.


세 곳의 카페에 나는 고민들을 타임캡슐처럼 묻어놓았다. 다만 내가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가 도달했을때, '오늘은 꼭 고민해서 답을 내야지'라고 마음을 먹고 자리에 앉으면 하루종일 그렇게 잘 나던 생각들이 갑자기 얄밉게도 싹 사라졌다. 맘먹고 '생각하러 가야지'라고 길을 나서면 카페들은 꽉 차있거나 문을 닫았고, 어느날은 왠지 배가 더부룩해서 그저 눕고만 싶었다. 뭐든 마음을 먹으면 잘 안되고, '어쩌다 우연히 어떻게' 되는 나의 삶을 축약해놓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어쩌다 우연히 어떻게' 되기 위해서 쌓아야만 하는 시간들이 나는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고민들을 하는데 세 카페에게 빚을 졌다.


서로 다른 유형의 마음의 빚을 진 카페들은 총 세 군데다.

첫번째는 이 고민의 시작점이 된, 모든것이 시작된 카페. 블랙울프라는 이름의 이 카페는 동네에서 인기가 아주 많은 사랑방이다. 동네에선 보기 드문 크고 넓은 공간에, 커피와 맥주와 무려 빙수를 판다. 가족단위로도 많이오고, 친구들끼리도 많이오고, 동네 사람들끼리 친해져 무리를 이룬 듯이 보이는 조합들이 많다. 그래서 넓고,시끄럽고,쾌적한데, 자주 높은 확률로 자리가 없다. 타이밍을 잘 맞춰 가야 하는 곳인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 포트폴리오를 한 귀퉁이에서 무려 일곱시간동안 꼼짝없이 앉아서 커피 두잔과 빵과 카모마일 그리고 에일맥주를 시켜먹으며 완성했다. 왜 그날따라 사람이 없었을까. 왜 포트폴리오를 완성해버린 것일까.

두번째는 면접을 준비하던 곳. 진저커피바라는 곳인데, 원래 있던 카페를 인수받아 새롭게 꾸며진 곳이다. 다른 업종이 들어가기에는 애매하게 세로로 여섯자리 정도 남짓 들어가는 작은 공간에 통유리를 열어놓는 곳이다. 나보다 필시 네살 이상은 어려보이는 힙한 여자사장님이 늘 상주해있다. 가끔 '아테나'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태나'라는 이름을 가진 귀여운 딸도 머문다. 나는 이곳에서 내 과제에 대한 에상질문을 뽑고, 예상질문에 대한 답번을 준비했다. 아주 루즈하게. 이곳은 늘 가고싶은데, 막상 가자고 마음먹으면 좀 수줍어진다. 사장님과 안면을 텄고, 내가 그 사장님에게 호기심이 있기 때문에 거길 가려면 괜히 들어갈때 어떤인사를 해야할지, 어떤 스몰톡을 해야할지, 거기서 어떻게 있어야 할지 쓸데없는 고민이 든다.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운 나에게는 에너지를 좀 써야 하는 곳이다.

세번째는 연봉협상 메일을 쓸 때 처음 가고, 최종적으로 어제 마음을 결정할때 한번 더 간 노벰버라운지라는 곳이다. 이곳은 집에서 차로 5분정도 가야하는 조금 떨어진 곳인데, 중소기업들이 몰려있는 지식산업센터가 있는 곳 가운데에 혼자 1층짜리 나지막한 건물로 자리잡은 곳이다. 이곳의 큰 장점은 두가지다. 첫번째는 새벽3시까지 한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아예 몰입할 수 있도록 큰 탁자에 전기코드를 심어놓았다는 것이다. 좀 다닥다닥하게 의자가 붙어있는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저녁 8시부터 9시반까지 딴짓하며 한참을 밍기적대다가 이제 좀 몰입할 무렵 마감시간이 되어버리는 동네 카페들과는 달리 새벽세시까지라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곳이다.




오늘은 어느정도 결론을 내린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모든것이 시작된 첫 카페인 블랙울프에 자리를 잡았다. 점심시간 이후부터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는 이 카페는, 아침 5시 반이면 정신이 맑아져버리는 나같은 사람이 아침에 머물기에 좋다. 아무도 눈에 닿지 않는 창가에 딱 붙은 자리에 앉아, 지난 3월 말부터의 내 인생의 아젠다들을 떠올려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남겨놓으려는 이유는 아주 명확한데, 어제 아침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갔던 월문온천의 43도의 탕에 몸을 담그며 나름 납득할 만하게 정리한 '이직 결정의 이유' 때문이다.


첫째, 나는 이제 지금의 과정을 겪어왔으므로 절대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남아있으면 평생 '그때 가지 않았던 그 기회'에 대해 평생 되뇌이며,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 길'을 놓친에 대해 후회를 하거나 마치 나의 가능성에 대한 가상의 트로피처럼 생각할 것이다. 후회는 해 보고 하는것이 해보지 않고 하는 것보다 덜 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이야, 이런데도 갈 수 있었는데 안간 사람이야~!'보다는, '그때 그게 좋은 줄 모르고 박차고 나오다니 나 바보같네'라는것이 덜 비겁해보인다. 지금 회사에 계속 머무른다면 나는 아예 처음부터 지원서조차 쓰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때 어떤 마음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는지에 대해, 그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둘째로, 왜 이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그때의 그 '마음'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봤다. 사수 없이 끌어온 4년의 시간 동안 방구석 여포처럼 스스로 옳다고 믿고 일한 것에 대해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참 많이 했다. 디지털 마케터가 가져야 할 크리에이티브와 퍼포먼스에 대한 분석력이 나에게는 있는가? 밑바닥부터 배우는 과정을 건너뛰고 오로지 추진력으로만 이끌어온 것들이 때론 좋은 성과로 보여지기도 했고 나를 현재의 회사에서 그 일을 하는 담당자로 인지되도록 만들었지만, 순간 덜컥 겁이 난 것은 '어느회사에 가서도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혹은 '프리랜서로 내가 이 일을 하며 먹고살 수 있나?'라는 질문. 회사에서 살아남기에는 지난 4년이 유효했지만, 업계에서 살아남기엔 지난 4년은 연극같았다. 디지털 마케터라는 이름값 대비 나는 그 업계에 녹아들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추진력과 임기응변이 쌓여가는 것이 두려웠다. 유능해지는것이 두려웠다. 문제에 대한 해결을 쉽게 하는것에, 큰 고민을 하지 않게 되는것이 걱정됐다. 껍데기로만 남는 것이 가끔 잠 못들게 했고, 이미 껍데기가 꽤 단단해지고 있다는 것도 느껴졌다. 누에고치는 딱딱한 껍질의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되지만, 나는 딱딱한 껍질 안에 갇히는 암모나이트 화석이 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나는 앞으로 무엇이 될 지 고민이 되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대기업 과장에서, 어찌어찌 운이 좋으면 대기업 부장이 될 것이다. 사실 대기업의 일원이라는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한 성취를 이룬것인데 뭘 더 NEXT를 고민하는지 스스로도 배가 부르다못해 터지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같이 간판에 목숨거는 세속적인 사람도 이렇게 다 놓고 고민을 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88년생, 서른여덟의 딩크는 가정을 이루었다는 안정감과 딩크라는 약간의 자유, 그리고 이제 정말 먼 미래가 아닌 4-50대의 삶이 현실로 와닿는 시기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직장은 꽤 멋지다. 경쟁자 없는 탑티어의 공간을 운영하는 회사에서, 쇼핑친화적인 복지와 듣도보도못한 워라벨을 누린다. 그것만으로 뭘 더 바라야 하는가. 이런 직장을 다니면서 퇴근 이후의 즐거움을 고민할 것이지 왜 출근과 퇴근 사이의 시간을 고민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이 바보같은 결단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후회할 것을 전제로 결심을 했다. 후회할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고, 후회할 나를 생각하니 지금이라도 고민을 멈추고 현재에 다시 감사함을 느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다만 '나는 99% 후회할 것이다'라고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을 정하기 편해졌다. 그리고 나는 이 고민의 흔적들을 아주 디테일하게 기록해놓기로 했다. 그래야 99% 닥칠 후회의 순간들에게 '그래도 나는 다 알고 시작했어'라고 당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은 그래서 아래와 같은 순서로 씌여질 것 같다.

1. 왜 나는 이 회사의 채용공고를 보고, 그렇게 미루어놓았던 포트폴리오를 하루만에 완성했나.

2. 나는 무슨 마음으로 과제를 완성하고, 제출했나.

3. 스페인과 프랑스를 여행하며 나는 어떤 마음이었나.

4. 비가 춥게 많이 내리던 날, 한시간은 어땠나.

5. 2주간 나는 후회하지 않기 위한 준비와, 너무 몰입하지 않기 위한 준비를 어떻게 했나.

6. 꿈에서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른 화요일, 오전의 10분과 오후의 4시간은 왜 동시에 찾아왔는가.

7. 갈 것인가, 말 것인가의 고민을 연봉협상 이후로, 오퍼레터가 온 이후로, 그리고 주말 이후로 미루다.

8.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사람들에게 고민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 말들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9. 그래서 내가 납득할 논리의 문장이 완성됐다.

10. 이제 어떻게 떠나고, 어떻게 다시 시작할 것인가.


이 열가지를 도출하기 위해 글 앞머리에 쓸데없이 카페 세 군데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놨다.하지만 글은 보고서가 아니어서, 좀 딴 얘기도 하다가 마지막에 하고싶은 얘기를 할 수도 있는 것이고 하고싶던 말이 무엇인지 모르다가 글을 쓰면서 알게되기도 하는 것이다. 원래는 1에서 10까지 다 담긴 글을 쓰고자, 두시간짜리 플리를 켰다. 그러나 어느새 플리는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오늘은 1에서 10까지 정리하는 것 만으로도 좋은 시간을 보냈다. 이 이야기는 최대한 자세하게, 매일매일 기록해서 2주 안에 끝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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