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엘 카다레, 『꿈의 궁전』(1981)
낭만적 제목에 이끌려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오판이다. 카다레가 1981년 발표한 『꿈의 궁전』에는 꿈에서나 나올법한 멋진 궁전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문자 그대로 ‘꿈’을 수집, 분류, 해석하는 정보기관이 등장한다. 그곳의 이름은 ‘타비르 사라일’, ‘꿈의 궁전’이다. 누구의 꿈을 분석하는 것일까.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세르비아계가 권력을 잡은 거대 오스만 제국. 민족도 종교도 서로 다른 사십여 개의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섞여 있는 나라다. 주인공은 알바니아계 셀럽 가문인 ‘쿠프릴리’가의 청년 마르크 알렘으로 모두가 선망하는 직장, ‘꿈의 궁전’에 들어간다. 의미 있는 꿈을 가려내는 ‘선별부’로 발령받았다가 고속 승진해서 ‘해석부’로 자리를 옮긴 알렘은, ‘궁전’ 밖의 사람들에게는 베일에 싸여 있던 ‘타비르 사라일’이 어떤 곳인지 점차 알게 된다.
한 마디로 ‘꿈의 궁전’은 반란을 꿈꾸는 자들, 제국의 안정을 해치는 자들에 대해 알라신이 예지몽을 통해 미리 알려준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고급 정보기관이다. 전국에서 수집된 제국민들의 꿈은 이곳으로 배달되고, 선별과 해석의 과정을 거쳐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꿈, ‘핵심몽’은 최고 권력자 술탄에게 보고된다. 과해석과 오해석, 권력층의 대립과 이해득실에 따라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유를 불문하고 핵심몽과 관련된 인물들은 바로 숙청된다. 거대 제국이 쿠데타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비결이 바로 이 기관의 성공적 운영 덕분이다.
『1984』의 감시와 통제를 넘어 사적 영역인 꿈까지 감시, 감독할 수 있는 전체주의 국가. 언젠가 올 수도 있을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작가의 다음 말 때문이다. “풍자(allegory)는 저뿐 아니라 알바니아 동료 작가들, 공산주의 독재 정권 아래에 있던 모든 작가가 권력에 의한 억압에 대항해서 표현하고 묘사할 방법을 찾아내다가 도달한 방법입니다.” (2019 박경리 문학상 수상 직후 기자회견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카다레의 조국 알바니아에서는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래 집권한 독재자 엔베르 호자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극단적인 쇄국 정책, 개인 우상화 작업, 고문과 숙청이라는 호자의 북한식 철권통치 46년간 처형된 사람들은 알려진 수치로만 6천 명을 넘어섰고, 투옥, 강제 이주와 노동형 등으로 전체 알바니아인의 33%가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레닌 옹호문 쓰기를 거절하고, 체제 비판 소설들을 연이어 발표한 작가 카다레의 안전이 보장되었을 리는 없다. 결국 그는 1990년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나중에 알바니아로 돌아가게 된다.
출간되자마자 판매금지를 당한 『꿈의 궁전』은 대표적인 호자 정부 비판 알레고리 소설이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깊은 대목은 어떤 사람이 꾼 지옥 꿈 묘사인데 특이한 점이 있다. 이 지옥에는 죽은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 공화국, 입헌군주국, 연방 제국 등 사멸한 국가들도 있으며, 그들 모두 언제고 다시 이승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티무르가 통치했던 국가를 보았다. 사람들이 그 위를 피로 칠하고 있었다. 다시 지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였다. 저편으로 헤로데가 통치했던 국가도 보였다. 같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헤로데의 왕국은 세 번째로 다시 지상에 올라가는 것이라고 했다. 완전히 멸망할 줄 알았던 그 왕국이 앞으로 몇 번을 그렇게 다시 부활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145~146)
티무르.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초에 걸쳐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정복자로서 절대적인 권력과 폭력으로 유지되는 억압적인 통치 체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헤로데는 누구인가? 기원전 1세기 말부터 기원후 1세기 초까지 유대 지역을 통치한 로마의 속주 왕이었던 그는 예수 탄생 시 신생아들을 학살한 폭군으로 알려져 있다. 헤로데의 왕국은 무자비한 권력과 감시의 상징이다.
인류 역사에서 ‘티무르 제국’과 ‘헤로데 왕국’은 몇 번, 어디로 부활했을까. 히틀러의 나치 국가일까.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일까.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국가일까. 아니면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일까. 이들 사멸한 정권들이 지옥에서 새 단장을 마치고 재탄생할 곳들은 또 어디일까.
카다레는 상징과 은유의 알레고리 소설을 통해 불행히도 조국 알바니아에서 부활한 ‘티무르와 헤로데,’ 즉 엔베르 호자의 공포 정치를 비판한다. KGB와 비슷한 수법으로 국민을 감시하고 내부 정치국원까지 처형했던 시구리미(Sigurimi, 알바니아의 국가보안국)가 바로 이 소설 속 ‘꿈의 궁전’이다. “독재자는 작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그 작가가 유명할수록 더 안 좋아하죠”라고 카다레는 말했다. 기원전 세상에서부터 존재해 왔던 독재국가들의 귀환을 막는 것은 어쩌면 칼보다 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말이다.
이 소설에서 마르크 알렘의 변화가 의미심장하다. 청과물 파는 상인이 꾸었다는 ‘다리’와 ‘악기’가 등장하는 예지몽 때문에 그의 명문 외가 ‘쿠프릴리’는 참화를 당한다. 연회에 알바니아인 음유시인을 고용하고 알바니아 악기인 라후타를 연주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알렘의 막내 외삼촌은 재판 다음 날 바로 처형되지만, 술탄에게 대적하는 권력가인 큰 외삼촌 와지리의 빠른 대응으로 다행히 가문은 더 이상 화를 입지 않게 된다.
알렘은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승진을 거듭하여 28세 젊은 나이에 ‘꿈의 궁전’ 수장 자리까지 오른다. 이 기관에 막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꼈던 그가 ‘수많은 사람들의 지난 밤이 자신의 두 손안에 들어와 있다는’(286) 무소불위의 권력에 익숙해지면서 점점 무뚝뚝한 사람이 되어간다. 제국의 통일성을 저해하는 요소는 무조건 제거해야 하는 ‘꿈의 궁전’ 수장으로서, 정체성의 근간인 알바니아를 그리워하면서도 부정한다. 이제는 알렘이 꿈의 궁전이고, 꿈의 궁전이 곧 알렘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알렘은 ‘꿈의 궁전’이 갖고 있지 않은 것, 그가 잊고 살았던 것을, 창을 통해 보게 된다. 그것은 생명을 끌어당기는 봄날의 약동하는 따스함이었다. 긴 겨울을 이기고 피어나서, 억압에 대한 저항과 희망을 상징하는 편도나무 꽃. 그 꽃을 만나기 위해 궁전 밖으로 한 발 내디딜 용기를 과연 알렘은 갖고 있을까.
그는 알고 있었다. 두 걸음만 디디면 저 밖에 새로운 생명들이 살아 움직이고, 포근한 구름이 피어오르고, 황새가 날고, 사랑이 넘쳐 흐른다는 것을. 그 모든 것은 그가 꿈의 궁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가 두려워 애써 외면하는 것들이었다. (294~295)
결국 알렘은 꿈의 궁전을 나가지 않고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며 생각한다. ‘나는 내 무덤을 장식할 조각가에게 꽃이 활짝 핀 편도나무 가지를 새겨달라고 주문하리라’. 권력과 명예의 상징인 ‘꿈의 궁전’은 죽을 때까지 끝내 포기하지 못하겠지만, 그런데도 편도나무 꽃을 조금이라도 더 잘 보기 위해 뿌예진 창을 닦는 알렘. 그의 눈에 고이는 눈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는 어쩌면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알렘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에. 불순하지만 불순함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마음에는 언젠가 돌아가야 할 봄날의 편도나무 꽃을 품은 우리.
이스마엘 카다레, 『꿈의 궁전』(1981)
(장석훈 옮김, 문학동네, 2016(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