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중요한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1)

by 에밀리

1985년 아일랜드의 한 마을에 빌 펄롱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살고 있다. ‘빈 주먹으로 태어났다’라고 소설이 말하는 것처럼,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16세 미혼모가 낳은 아이였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몰랐고, 한 번쯤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열두 살 무렵 엄마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엄마가 가사 도우미로 일하던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펄롱의 더부살이는 고아가 된 후에도 집주인인 미시즈 윌슨의 배려로 계속 이어졌다. 그는 그 집에서 먹고 자고 학교에 다녔다. 미혼모의 자식이라 학교에서는 비웃음과 조롱을 당했고 한 두 해 정도 기술학교를 더 다니다가 석탄 야적장에서 일했다.

이제 서른아홉이 된 펄롱은 아내 아일린과의 사이에 딸 다섯을 둔 어엿한 가장이다. 석탄과 장작 배달 일을 하며 넉넉하진 않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그에게는 한 가지 꿈이 있다. 딸 다섯을 잘 교육하는 일이다.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24)


눈발 흩날리는 겨울이 되자 펄롱의 석탄 배달 일감은 늘어났다. 저녁 늦게까지 마을 곳곳에 배달하러 다녔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어느 날 수녀원으로 배달을 나갔던 그는 우연히 경당 청소를 하는 여자아이들을 보게 된다. 무릎으로 기면서 광택제로 바닥을 문지르던 아이들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누군가 마음대로 가위질을 한 것처럼 삐죽삐죽 깎여 있다. 한 아이가 펄롱에게 다가와 건넨 말도 예사롭지 않다. “강까지만 데려가 주세요”, “아니면 대문 밖으로만이라도 나가게 해주세요”, “아저씨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냥 물에 빠져 죽고 싶어요”.


마침, 수녀가 들어 오자 아이들은 놀란 듯 다시 바닥 걸레질을 시작했고, 밖으로 나온 펄롱에게 석탄값을 주려고 따라 나온 수녀는 그 짧은 순간에도 현관문을 자물쇠로 잠근다.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깨진 유리가 빼곡하게 박혀 있는 것도 펄롱의 눈에 들어온다. 수녀와 아이들은 무슨 관계이며, 펄롱이 아이들을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수녀는 왜 당황한 기색이었을까.

막달레나 세탁소


클레어 키건은 ‘아일랜드의 모자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소설을 바칩니다’라고 헌정사를 붙였다. 주인공 펄롱이 우연히 목격한 아이들이 바로 그 ‘막달레나 세탁소’의 여자아이들이다. 1824년 아일랜드의 성막달레나 여성협회가 설립하고 1845년부터는 수녀회가 아일랜드 곳곳에서 운영해 왔다. 매춘 여성이나 미혼모 등 성 윤리에 어긋나는 짓을 저지른 여성들을 교화할 목적으로 지어졌고, 병원, 성직자, 심지어 가족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은 이곳에서 문자 그대로 세탁 노동을 통해 육신의 죄를 ‘세탁’해야 했다. 강제 구금된 여성들을 통제하는 방식이 폭력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죽는다 해도 암매장을 해 버려 세상에 알려질 일도 없었다.

수녀원의 비상식적인 폭력은 200년이나 지속되었다. ‘몸을 버린 여자들’을 교화하고 ‘세탁’하겠다는 초창기 목적은 변질되었다. 피터 뮬란 감독의 2004년 작 <막달레나 시스터즈>가 보여 주듯이 사회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반항하는 여성, 똑똑한 여성, 심지어 성폭력 피해 여성까지 세탁소에 강제 구금되었다.

그러다가 1947년 퍼트리샤 버크 브로건(Patricia Burke Brogan, 1932~2022)이라는 수녀가 골웨이 포스터 거리의 막달레나 세탁소로 부임해 온다. 그녀가 바로 이곳의 실상을 세상에 알린 사람이다. 훗날 희곡 작가가 된 그녀는 그곳에서 경험하고 본 것을 ‘단테의 지옥’이라고 회상하면서 ‘퇴색되다(Eclipsed)’라는 제목으로 희곡을 썼다.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이고 종교 권력이 정부 권력만큼 막강한 아일랜드에서, 브로건의 희곡은 극단들에 의해 번번이 거절당하다가 1992년 마침내 무대에 오르게 된다. 종교계를 향한 항의와 욕설을 담은 편지가 쇄도했고, 무려 3만 명의 피해자들에게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됐던 참혹한 인권 유린은 1996년에 드디어 끝이 난다. 결국 세탁소는 폐쇄되었지만 책임과 배상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생존자들은 아직도 막달레나 세탁소의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다.


키건의 시선


브로건의 희곡과 피터 뮬란 감독의 영화는 둘 다 막달레나 세탁소의 내부를 비추고 그 안의 억압과 폭력을 드러낸다. 반면에 클레어 키건의 소설과 이 소설을 영화화한 팀 밀란츠 감독의 시선은 세탁소 외부를 향하고 있다. ‘그래, 안에서는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어. 그런데 밖의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 알고도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라고 우리에게 묻고 있다.


‘알고도 모른 척하기’. 내 일이 아니니 상관없다는 무관심의 표현이기도 하면서, 쓸데없이 나서다가 피해를 볼 수 있으니 안 됐지만 일단은 외면하겠다는 이기적 자기 보호의 태도이기도 하다. 유리 조각이 박혀 있는 담장 안의 진실을 엿 본 이 소설의 주인공 빌롱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태도를 보일까.

사유하는 자


소설은 일찌감치 빌롱이 어떤 인물인가를 보여 준다. 빌롱을 비롯한 노동자들이 허기를 달래러 자주 가는 식당 주인은 소설 초반부에서 이렇게 말한다. “속이 빈 자루는 제대로 설 수가 없는 법이지”.


빌롱은 속이 꽉 찬 자루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불쌍한 고아를 외면하지 않고 돌봐준 미시즈 윌슨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을 그대로 배웠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실직한 믹시노트네 아이에게 동전 몇 푼이라도 쥐여준다. 믹시노트씨는 ‘스스로 제 무덤 판 사람’일 뿐이라는 아내의 타박에도 ‘어디든 운 나쁜 사람은 있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펄롱이 외면하지 못하는 이유는 약자에 대한 연민뿐만 아니라 그가 예민하게 ‘사유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펄롱은 언제나 쉼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29)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을 어떻게든 갖는 이들이다. 수녀원을 뒤로하고 집으로 오는 펄롱의 모습을 보자.


펄롱은 트럭에 올라타자마자 문을 닫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가, 길을 잘못 들었으며 최고 속도로 엉뚱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가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바닥에서 기어다니며 걸레질을 해서 마루에 윤을 내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모습이 계속 생각났다. 또 수녀를 따라 경당에서 나올 때 과수원에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문이 안쪽에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는 사실, 수녀원과 그 옆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 있는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유리 조각이 죽 박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53)


펄롱의 예민함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그저 지나칠 수 있는 장면에서도 이상함을 감지한다. 마음속 걸림돌로 저장해두고 그가 곱씹게 한다. 그래서 펄롱은 늘 다니던 길을 놓치고 만다. 그의 머릿속이 구조를 요청하던 아이들 생각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온 펄롱은 아내에게 자신이 본 불쌍한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본다. 아내는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라면서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 딸들은 건강하게 잘 크고 있잖아...우리한테 무슨 책임이 있어?”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아내가 내뱉은 다음 말이 소설에서 볼드체로 강조된 부분이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원문에는 ‘Tis not one of ours.’라고 흘림체로 되어 있다.)

우리 애들이 아니니 상관없다는 말은 ‘알고도 모른 척하기’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이고, 그들이 물심양면 의지하는 수녀원이라는 거대 집단. 그 안에서 설령 정의롭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나와 우리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면 굳이 끼어들어서 속 시끄러울 필요가 없다라는 태도다. 펄롱의 아내 아일린은 가족 이기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펄롱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이다. ‘삶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그럴만하면서도 동시에 심히 부당하게 느껴졌다’(64)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아버지 모르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그의 선택이 아니고 불운이었던 것처럼, 지금 수녀원에 있는 아이들도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던 일들로 인해 고통받고 있음을.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대량 주문이 들어 온 수녀원을 다시 방문하는 펄롱이 자신이 살아갈 길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문장이 있다.

차가 수녀원에 가까워지면서 창문으로 비치는 트럭 헤드라이트 불빛 때문에 펄롱은 마치 자기 자신을 만나러 가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66)


펄롱은 이번에는 수녀원 석탄광에 숨어 있는 미혼모 여자애를 발견하지만, 그 애는 곧 그들을 발견한 수녀원장에게 넘겨진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원장과 여자애의 관계. 펄롱은 그가 빨리 가주기를 바라는 수녀들 사이에서 ‘버티고 싶은 마음’(79) 이 들고 ‘새로 생긴 기묘한 힘’(80)에 용기를 얻는다. 하지만 결국 수녀원장이 내민 크리스마스 돈봉투-아마도 입막음용인-를 받아 들고 집으로 향하게 된다. 돈봉투를 좋아하는 아일린을 보면서 봉투를 구겨 석탄 통에 던져 넣어버린 펄롱의 모습에서 ‘척지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가며 딸들 교육에 전념하겠다는 그의 마음에 균열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척지더라도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옳지 않은 일에 분노하고, ‘사소하지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에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다. (99)


행동하는 자유


한나 아렌트는 『난간 없이 사유하기』에서 ‘사유를 멈추는 곳에서 폭력은 아무 반성 없이 반복된다’라고 말했다. 올바른 사유는 사유에서 끝나지 않고, 가야 하는 길을 갈 수 있는 용기를 주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 반경을 넓혀 준다. 아렌트가 말하는 ‘자유’란 개인이 개인의 범위에서 마음껏 누리는 고립된 자유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공존하며 정치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상태’다. 펄롱의 사유가 자기 인식과 반성에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결말 부분은, 펄롱이라는 한 개인이 내딛는 자유의 큰 한 걸음이다.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룰 기독교인이라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 속에 새롭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119~120)


맨발인 미혼모 아이를 구출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펄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없는 살림에 그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를 하나 더 보탠다는 아내의 한탄과 짜증일까. 몸을 버린 여자아이를 거둔다는 이웃의 따가운 시선일까. 아니면 석탄 거래와 크리스마스 돈봉투를 끊어버리고 어쩌면 교구에서 영원히 내칠 수도 있을 성당과 수녀원일까. 소설은 끝내 말해주지 않은 채,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아내에게 줄 선물인 구두를 안고 걸어가는 펄롱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펄롱이 수녀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길을 잃고 헤맬 때 우연히 만난 노인은 이런 말을 했었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대로 갈 수 있다네”(54). 비록 ‘두려움이 모든 감정을 압도’(121)하고 다가올 후폭풍이 걱정되겠지만,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그 길을 가려 하는 펄롱. 그는 ‘난간 없이 사유하는’ 자로서 그의 사유와 양심이 이끄는 대로 가는 자유인이다.

“사유는 난간 없는 계단을 오른 것과 같다. 위험하지만 그것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 에세이집 『난간 없이 사유하기』 중에서)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1)

(홍한별 옮김, 다산북스, 2024(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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