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무기여 잘 있어라』(1929)
<줄거리>
1차 대전 중 주인공 프레데릭 헨리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구급차 부대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간호사 캐서린 바클리를 만나고, 일회성 에피소드 같던 그들의 만남은 헨리가 부상하고 밀라노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부터 진지해진다. 임신한 캐서린을 두고 다시 전쟁터로 나간 프레더릭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캐서린과 재회한다. 둘은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중립국 스위스로 피신하고, 아기가 태어나기까지 전원생활의 평화로움을 누린다. 그러나 분만 중이던 캐서린은 결국 수술대 위에서 죽고, 프레더릭은 이국땅에 홀로 남겨진다.
이십 대에 처음 읽고 다시 읽는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어라』. 번역본 제목부터 달라졌다. ‘A Farewell to Arms’는 그동안 ‘무기여 잘 있거라’로 번역됐다. 그런데,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현행 맞춤법상 ‘-거라’라는 어미가 ‘가다’나 ‘가다’로 끝나는 동사 어간에만 붙기 때문에 ‘있거라’는 잘못된 표현이란다. 한 글자 달라졌지만 오래 각인된 제목에 익숙해서 그런지 좀 낯설다.
달라진 건 제목만이 아니다. 내 느낌, 눈에 들어오는 문장도 달라졌다. 이 소설을 나는 왜 전장에서 피어난 사랑 이야기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을까. 사랑 이야기에 민감했던 나이에 읽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랑을 유희 정도로 생각하던 남자가, 전쟁터에서 한 여자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알아가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 영화 때문이었을까. 하긴 누군가 이 소설을 읽어 보았냐고 묻는다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건 소설이 아니라 영화 속 장면들일 것이다. 록 허드슨과 제니퍼 존스가 연기하는 두 연인의 애틋한 사랑이 생각날 것이고, 아내와 아이를 잃은 남자가 이국땅 보도 위를 홀로 외롭게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다시 읽어 보니, 내가 나이 든 만큼 소설도 더 풍부하고 두꺼운 텍스트로 함께 나이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고, 놓쳤던 문장들이 그때 왜 미처 보지 못 했냐고 시위라도 하듯 벌떡 일어나 있었다. 그렇다. 이 소설은 그냥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무기여 잘 있어라』는 전쟁 소설이며 전쟁에 관한 진짜 이야기를 쓰고 있다. 헤밍웨이는 “작가에게 있어 전쟁 체험은 필수다”라고 했고, 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캔자스시에서 수습기자로 일하던 헤밍웨이는, 1917년 4월에 독일이 선전포고를 하자 유럽으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자유를 수호하는 ‘위대한 전쟁 (the Great War)’에 참전한다고 들떠 있었지만, 이탈리아 전선에서 죽음의 위기를 넘기는 심각한 상처를 입으면서 헤밍웨이의 생각은 달라졌다. 1차 세계대전은 과거의 총칼 전쟁들과는 양상이 달랐다. 기관총, 대포, 폭격기가 등장했으며 그의 하체에 박힌 박격포 파편 이백여 개는 이탈리아 정부가 수여한 무공훈장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을 정도로 평생 지속되는 후유증을 남겼다.
명분도 뚜렷하지 않고, 종교도 도움이 안 되고, 이해하기 힘든 아이러니가 뒤섞인 혼돈의 공간, 그곳이 바로 전쟁터였다. 무훈 시 ‘롤랑의 노래’에 등장할 법한 위대한 영웅도 없었고, 포탄에 맞아 죽어가는 군인들은 그저 ‘죽었다’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 박격포는 그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가공할 만한 무기였다. 헤밍웨이가 1932년 발표한 논픽션 『오후의 죽음』에는 이런 묘사가 등장한다. “사람들의 몸이 폭격으로 산산조각이 날 때에는 해부학적 경계를 따르지 않고….”
‘해부학적 경계’를 따르지 않는다니. 곱씹어볼수록 끔찍하다. 부상한 군인이라면 흔히 우리는 머리에 붕대를 감거나, 팔이나 다리에 부목을 댄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까. 소설 속 캐서린도 그러했다. 그녀에겐 전쟁터에 나간 약혼자가 있었고, 간호사인 그녀는 그녀가 일하는 병원으로 다친 그가 후송되어 오는 상상을 하곤 했다.
군도에 찔려 머리에 붕대를 친친 두른 채로, 혹은 어깨에 관통상을 입거나 한 채로 말이에요. 하여간 그림처럼 아름다운 환상을 품고 있었어요. (37)
하지만 약혼자는 군도에 찔려 붕대를 감지도, 어깨에 관통상을 입지도 않았다. 캐서린의 상상은 그야말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환상’에 불과했다. 그녀의 약혼자는 문자 그대로 ‘산산이 부서져 날아가’ 버렸다. 해부학적 경계를 잃은 채, 형체도 없이.
헤밍웨이는 그가 경험하고 본 것을 그대로 쓰며 우리로 하여금 낭만적 전쟁관을 폐기하게 한다. 전쟁은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이 ‘진격!’을 힘차게 외치고, 나라를 혹은 자유를 위해 군인들이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구국의 시공간이 아니다. 프레더릭처럼 명분도 소속감도 애국심도 없이 참전한 군인들이, 존재를 순식간에 먼지로 만들어 버리는 끔찍한 그곳에 자신이 왜 와있는지도 모르고 죽어가야 하는 참혹한 아이러니의 공간이다.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기는 건 아닙니다”라고 했던 프레더릭의 부하 파시니의 죽음을 보자.
그의 두 다리가 내 쪽으로 뻗어 있었는데, 명멸하는 포화 사이로 두 다리가 모두 무릎 위까지 박살 난 것이 보였다. 한 쪽 다리는 사라졌고 다른 쪽 다리는 힘줄과 바짓가랑이 일부에 간신히 붙어 있었다. 잘리고 난 나머지 부분이 마치 끊어진 듯 꿈틀거렸다. 그는 자기 팔을 물어뜯으며 신음했다. “아, 어머니! 아, 어머니! 살려 주세요. 성모 마리아님, 살려 주세요. 성모 마리아님, 제발 살려 주세요. 아 예수님, 절 쏴 죽여주세요. 어머니, 어머니, 아, 순결하고 아름다운 성모님, 제발 절 쏴 죽여 주세요. 멈춰 줘요, 멈춰 줘요. 제발 멈춰 달라고요.” 그러고 나서 숨이 막히는지 “어머니, 어머니.”하고 흐느꼈다. 그러더니 곧 조용해졌다. (93~4)
이처럼 『무기여 잘 있어라』는 전쟁을 낭만과 추상의 영역에서 끌어 내리고 영웅과 신화의 탈을 벗긴다. 헤밍웨이가 경험한 전쟁터에 그런 것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파시니의 죽음에서 보듯이 그가 겪는 극한의 고통은 전쟁 승리와는 상관이 없다. 이탈리아군이 이겼다고 그의 고통이 덜어지지도, 영혼이 평화로워지지도 않고, 패했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다. 한 개인의 고통과 패배는 오로지 혼자서 감내해야 하는 지극히 외롭고 개인적인 것이다.
더 슬픈 것은 대부분 타인의 무관심 속에 한 개인의 고통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피터 브뤼겔(Pieter Brueghel)의 그림,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Landscape with the Fall of Icarus)’에는 태양신 아폴론에게 다가가다가 밀랍으로 만든 날개가 녹아 바다로 추락하는 이카루스의 모습이 들어 있다. 정말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일 정도로 버둥거리는 이카루스의 하얀 다리가 오른쪽 아래 끝에 그려져 있다. 그 바로 앞에 낚시하는 사람이 있고 쟁기질하는 사람도 있다. 지나가는 돛단배도 있다. 그러나 아무도 이카루스의 비극에 관심이 없다. 돛단배는 유유히 갈 길을 가고 낚시도 쟁기질도 계속된다. 평화로운 바닷가 풍경 속에서 이카루스의 개인적 비극은 철저히 혼자만의 것이다.
『무기여 잘 있어라』에서도 이카루스의 외로운 추락은 곳곳에서 일어난다. 당장 첫 페이지에서 헤밍웨이는 ‘들판은 곡식으로 풍성했다. 과수원이 많았지만 들판 너머 산들은 갈색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라고 쓰고 있다. 폭격으로 인해 갈색 맨살을 드러낸 저쪽 산이 있는가 하면 이쪽 들판은 익어가는 곡식으로 풍성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진행 중이지만, 전쟁의 고통은 그들 당사자의 것이고 다른 한 편에서는 일상의 평화로움이 지속된다.
비극 구분선은 선명하게 그어진다. 파시니처럼 운이 나쁘면 그 구분선 안에 들게 되고, 운이 좋으면 바깥에 있게 될 뿐. 그리고 이때 바깥의 사람들, 심지어 성모 마리아나 하나님조차 조용하고 무관심하다. 전쟁에 대한 혐오가 짙어가는 프레더릭은 ‘신성이니 영광이니 희생이니 하는 공허한 표현을 들으면 언제나 당혹스러웠다’(290) 라고 쓰고 있다. “어쨌든 신부님이 이 전쟁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29)라고 대놓고 신부에게 말하는 한 군인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소설 끝부분에 등장하는 개미 이야기는 바로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과 그 덫에 이유도 모른 채 걸려드는 인간에 대한 은유다.
언젠가 캠프를 할 때 나는 모닥불 위에 통나무 하나를 얹어 놓은 적이 있다. 통나무에는 개미가 잔뜩 붙어 있었다. 통나무에 불이 붙기 시작하자 개미들은 우글우글 기어 나와 처음에는 불이 있는 한가운데로 기어갔다. 그러다가 나무 끄트머리 쪽으로 돌아갔다. 개미 떼는 끄트머리 쪽에 잔뜩 모여 있다가 불 속으로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때 바로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종말이라고 생각했다. 구세주가 되어 통나무를 불 속에서 끄집어내 개미들이 땅바닥으로 달아날 수 있는 곳으로 던져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함석 컵의 물을 통나무에 끼얹었을 뿐이다. 그것도 컵을 비워 거기에 위스키를 따르고 물을 타기 위해서였다. 활활 불타고 있는 통나무에 물 한 컵을 끼얹은 것은 개미를 삶아 죽이는 일에 불과했다. (496~7)
불타고 있는 통나무는 당장 몇 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는 전쟁터, 곧 우리의 삶이며, 통나무 위의 개미는 바로 우리 인간으로 치환된다. 그래서 『무기여 잘 있어라』는 전쟁 소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의 무작위 게임에 불운하게 걸려들고 마침내 무관심 속에 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성실한 삶의 자세와는 무관하게 갑자기 들이닥치는 비극의 우연성, 그리고 한 개인의 비극에 대한 타인의 무관심은 소설 속 군인들의 죽음, 그리고 적군이 아닌 아군에게 총살당할 뻔한 프레더릭의 모습을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캐서린이 죽어가는 장면이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캐서린은 긴 분만 진통 끝에 결국 제왕절개 수술을 받으러 수술대 위에 눕는다. 그곳은 마치 ‘원형 극장’(490) 같았고, 수술 견학을 하게 된 간호사 한 명은 “마침 때를 잘 맞춰 왔네. 운이 좋지 않아?”(491) 라고 웃으며 말한다. 고통이 극에 달해 “완전히 부서져 버렸어요”라고 말하며 죽어가는 캐서린은 그저 원형 극장 속 비련의 여주인공일 뿐이다. 그 비극을 운 좋게 관람하게 된 무심한 타인들에게는, 캐서린과 그녀의 사산된 아기, 그리고 홀로 남겨진 프레더릭의 이야기가, ‘다행히’ 그 자신들이 포함되지 않은 무대 위 소소한 사건이며 매일 읽는 신문 속 나쁜 뉴스일 뿐이다.
전쟁도, 삶도 이렇게 인과성 없는 비극과 아이러니, 그것에 대해 무심한 신과 타인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데,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외로운 우리를 위로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헤밍웨이의 단편 「깨끗하고 밝은 곳」에는 밤이 깊도록 카페를 떠나지 않는 한 노인과 그를 지켜보는 두 명의 웨이터가 등장한다. 젊은 웨이터는 노인 때문에 문을 일찍 닫지 못해 짜증이 나고 초조하지만, 나이 든 웨이터는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다는 노인이 그나마 ‘깨끗하고 밝은’ 카페에서라도 편안함을 느끼고 오래 머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카페가 문을 닫자, 노인은 떠나고, 젊은 웨이터도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나이 든 웨이터는 좀 더 머물며, 어두운 세상 속에서 깨끗하고 밝은 곳이 필요한 이유를 곱씹고 생각해 본다.
‘깨끗하고 밝은 곳’.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어두운 나를 밝혀 주고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깨끗하고 밝은 곳 하나만 있으면 그나마 삶의 무게가 덜하지 않을까. 좀 더 밝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혹여 그 안에서 잃어버린 신앙 한 조각이라고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어라』에서 사랑이 바로 그 ‘깨끗하고 밝은 곳’이라고 말한다. 프레더릭은 밤이 무서운 사람이다. 공포감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캐서린을 사랑하면서 더 이상 밤이 무섭지 않게 되었다. ‘사랑’이 바로 어둠을 몰아내는 ‘깨끗하고 밝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다시 혼자가 되어 빗속을 걸어가지만,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밤이면 당신을 찾아와 같이 지낼 거예요’라고 말했던 캐서린에 대한 기억이, 그리고 사랑을 믿지 않던 그에게 사랑을 알게 한 캐서린과의 추억이 어쩌면 그의 밤을 조금이라도 덜 어둡게 할지도 모르겠다.
전쟁터의 군인들처럼, 겨우 알게 된 사랑을 빼앗긴 프레더릭처럼, 우리는 종종 삶이 쳐놓은 덫에 걸리고 아이러니에 당하고 패배자가 된다. 그리고 수술대 위의 캐서린처럼 무관심과 냉담 속에 버려지기도 한다. 그래도, 그렇다 할지라도, 삶의 비극을 견디게 하는 힘은 사랑이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무쇠 같은 관식의 사랑이, 평생 고단한 인생을 사는 애순이에게 ‘깨끗하고 밝은 곳’이 되어 주듯이. 그가 먼저 가도 함께 한 시간이 그녀의 마음에 그대로 남아서 그녀의 ‘깨끗하고 밝은 곳’을 요새처럼 지켜 주듯이 그렇게 말이다.
『무기여 잘 있어라』는 젊은 연인의 사랑 이야기이면서, 전쟁 무기에게 안녕을 고하는 반전 소설이다. 그리고 점점 밤과 죽음이 무서워지는 나이에 이른 나에게는, 삶의 아이러니에 대해 말해주면서 그 아이러니에 대한 배신감을 극복하지는 못하지만 덜어낼 수는 있다고 말해준다. ‘깨끗하고 밝은 곳’이 되어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함으로써. 나도 그들을 아주 많이 사랑하면서 그들의 ‘깨끗하고 밝은 곳’이 되어 줌으로써.
바닷속으로 떨어지는 이카루스에게 단 하나의 안타까움과 연민의 시선만 있더라도 그 추락이 덜 외롭지 않겠는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무기여 잘 있어라』(1929)
(김욱동 옮김, 민음사, 2024(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