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도르 마라이, 『열정』(1942)
무려 사십 일 년을 두 가지 질문에 붙들려 산 칠십오 세의 노인, 헨릭이 있다. 답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콘라드가 드디어 그의 눈앞에 나타나고 소설은 시작된다.
헨릭과 콘라드, 이 둘은 십 대에서 삼십 대 중반까지 이십 이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였다. ‘자궁 안 쌍둥이’ 같았다는 헨릭의 회상처럼 단 하루도 떨어져 지낸 일이 없던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콘라드의 ‘잠적’으로 무려 사십 일 년 동안 서로를 보지 않고 살아왔다. 헨릭이 ‘도주’라고 표현하는 콘라드의 ‘잠적’. 그 일은 1899년 7월 2일 둘이 함께 새벽 사냥하러 갔을 때 일어났다.
발생할 때 인과 관계가 분명히 드러나는 사건도 있지만, 잉여물이 빠져나가며 서서히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도 있다. 그날의 사건이 그랬다. 사슴을 겨누어야 할 콘라드의 총구가 살짝 비켜서 자신을 조준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헨릭은 큰 충격과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결국 콘라드는 쏘지 않고 잠적해 버렸고, 친구가 자신을 왜 죽이려 했는지 그 이유조차 가늠이 안 된 채 헨릭은 홀로 남겨졌다.
잠적의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한 번도 자신을 초대하지 않은 친구의 집을 찾아간 헨릭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자기 아내 크리스티나의 취향에 맞춰 꾸며진 집. 그리고 마침, 그 집에 나타난 크리스티나. 콘라드가 이미 사라졌음을 알고 내뱉은 ‘겁쟁이’라는 그녀의 한마디. 모든 정황 증거는 헨릭의 아내 크리스티나가 콘라드의 잠적과 관련이 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헨릭의 머릿속에 아내의 독서 장면이 떠올랐다. 아내는 평소에 관심이 없던 열대 지방-아마도 그들의 사랑의 도피처가 될 곳-에 관한 책들을 그즈음 열심히 읽고 있었다.
믿었던 친구와 아내에게 한꺼번에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한 헨릭은 이후 8년을 사냥 별장에서 지낸다. 크리스티나가 있는 자신의 저택에는 단 한 번도 가지 않는다. 다시 그 집에서 살게 된 것은 크리스티나가 병들어 서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나서다. 헨릭은 벽에 걸려 있던 그녀의 초상화를 내려버리고, 이후 삼십여 년을 외롭게 늙어간다. 언젠가 콘라드에게 물어 볼 두 가지 질문을 마음에 깊이 품고서.
그런데 드디어 콘라드가 그를 만나러 온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헨릭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하인에게 식사 준비도 시키고 자신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다. 사십 일 년 만에 헨릭앞에 모습을 드러낸 옛 친구는 과연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자크 라캉의 ‘욕망 이론’이 떠 올랐다. 라캉이 제시한 인간 욕망의 속성과 본질을 이렇게 잘 드러내는 텍스트가 또 있을까.
라캉은 인간이 욕망하는 존재로서 욕망이 주체의 행동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때의 욕망은 자신의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다. 즉, 나라는 존재가 얻기를 원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갖기를 원하는 것, 사회가 부추기는 욕망이며 타자에 의해 주입된 욕망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결정하고 지배하는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욕망으로 조종되고 지배당하는 수동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은 욕망이 단순히 만족을 향한 충동이 아니라 ‘결핍’에서 비롯되는 지속적인 구조라고 보았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항상 ‘다른 것’을 향하며, 절대 충족되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야말로 인간을 살게 하는 에너지원이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이 투사된 욕망을 품고 살아가고,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욕망하는 상태는 영원히 충족되지 않아야 한다. 이 상태는 오아시스라는 신기루를 마음에 품고 죽음의 사막을 건너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오아시스가 나타난다는 희망이 없으면 그는 계속 걸어갈 의지를 상실한다. 오아시스도 곧 나타나고, 저 멀리 무지개도 곧 잡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어야 인간은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잡힐 것 같지만 잡히지 않는 욕망의 대상, 그것을 라캉은 ‘결코 완전히 소유될 수 없는 대상’, 즉 ‘오브제 프티 아’(Objet Petit a)라고 이름 붙였다. ‘오브제 프티 아’는 결핍에서 발생하며, 욕망을 생성하지만 절대 충족되지는 않는다. 욕망은 대상을 향하지만, 이것은 기호나 이미지, 즉 기표로만 존재할 뿐, 그것의 실체에 우리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가 바로 개츠비의 ‘오브제 프티 아’라고 할 수 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하며 그녀를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지만, 개츠비가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은 데이지가 아니라 순수했던 과거, 이상적인 사랑, 사회적 성공 등 데이지가 상징하는 것들이다. 데이지와의 만남은 실망스럽고 개츠비의 욕망을 결코 충족시켜 주지 않지만, 그녀를 바라보고 쫓는 일을 개츠비는 멈출 수 없다. 데이지는 개츠비를 살아가게 하는 ‘오브제 프티 아’이기 때문이다.
개츠비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인 헨릭도 긴 세월을 ‘오브제 프티 아’에 사로잡혀 지배당한 인물이다. 그의 ‘오브제 프티 아’는 무엇일까. 그의 욕망은 무엇을, 누구를 향해 있을까.
한때 부와 명예, 아름다운 아내까지 가졌지만, 지금은 노쇠한 주인공 헨릭. 그는 가장 친한 친구와 아내에게 배신을 당했고, 잠적한 친구가 마침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 오래 간직해 온 질문에 답하는 순간을 지난 사십 일 년간 그려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콘라드가 눈앞에 있는데도 헨릭은 그토록 묻고 싶었던 질문을 바로 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그들의 첫 만남부터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결코 질문으로 수렴되지 않고 장황하게 유영한다. 애초에 콘라드와 대화하거나 물어 볼 생각조차 없는 듯하다. 끊임없이 인간의 본성, 우정, 사랑, 삶, 열정에 대해 자문자답을 해가며 혼자 이야기를 이어간다. ‘체계적이고 일목요연하게 잘 요약하여 강연을 무사히 끝낸 노인의 만족을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다’(197) 라는 표현처럼, 그리고 다음 내용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의 이야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차라리 강연에 가깝다.
한 인간 안에 짐승, 살인자, 사제 마법사 그리고 광신자가 다 들어 있는 것 같아. (125)
곧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열렬한 신뢰를 바친 다음, 상대방이 신의 없고 비열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들고 일어나 복수를 꾀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들고 일어나 복수를 기도하는 경우, 기만당하고 버림받은 그는 과연 진실한 친구였을까? 이보게, 나는 혼자 남아 이런 문제들에 이론적으로 파고들었네. (143)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그동안에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원칙이나 말을 내세워 변명하고, 이런 것들이 과연 중요할까? 결국 모든 것의 끝에 가면, 세상이 끈질기게 던지는 질문에 전 생애로 대답하는 법이네. (155)
자네 영혼의 밑바탕에는 갈등, 자네가 다른 사람이고 싶은 동경이 숨어 있었어. 인간에게 그것보다 더한 시련은 없네. 현재의 자기와는 달라지고 싶은 동경.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인간의 심장을 불태우는 동경은 없지. (172)
강연에 가까운 헨릭의 긴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래서 그의 두 가지 질문이 뭐지? 그 질문은 도대체 언제 하게 되는 걸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물어야 할 말은 있지만 묻는 것은 계속 지연되는 이상한 상황이다. 결국 소설 마지막쯤에 가서야 그가 묻고 싶었던 말이 등장한다.
“자네가 그날 아침에 숲에서 나를 죽이려 한 것을 크리스티나가 알고 있었나?”(265)
헨릭이 궁금했던 것은 콘라드가 아니라 아내인 크리스티나의 마음이었다. 정부가 남편을 죽이는 데 그녀가 정말 동조를 한 공범이었는가가 평생 궁금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질문은 달아나 버린 친구가 아니라 눈앞에 있는 아내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헨릭은 아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직접 묻지 않는다. 사냥터 사건 이후 헨릭은 크리스티나와 함께 살던 저택을 나와 무려 8년을 사냥용 별장에 머문다. 그가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은 크리스티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뒤였다. 다시 돌아간 집에서 그는 아내가 죽음의 문턱에서 콘라드가 아닌 자신을 찾았다는 말을 유모로부터 전해 듣고 그제서야 흡족한 마음’이 든다. 왜 그는 궁금한 것을 크리스티나에게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을까? 그녀가 세상을 뜨고 누구도 더 이상 정확한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되었을 때야 집으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콘라드가 이 질문에 대한 답하려고 입을 열 때 말을 가로막아버리는 헨릭의 태도다. 그는 “미안하네”, 라고 말하며,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지만, 말하고 나니 잘못 물어서 친구를 곤란하게 했다는 느낌이 든다며 사과의 말을 건넨다. 그러고는 다시 자신이 하고 싶은 장황한 이야기로 넘어가 버린다. 답을 기다리던 독자들도 답답해지는 순간이다. 헨릭은 정말 그 긴 세월 동안 크리스티나의 마음이 궁금하기나 했던 걸까.
헨릭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크리스티나의 일지에 관한 부분에서 정점에 달한다. 크리스티나는 신혼 때부터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기록한 ‘정직의 책’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죽음 이후 그 일지는 헨릭의 손에 있었지만, 그는 그 일지를 열어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크리스티나가 그걸 허락하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면서. 그런데 갑자기 “우리 크리스티나의 전언을 같이 읽지 않으려나?”라고 콘라드에게 말하고는 일지를 난로에 던져버린다. 활활 타버린 일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크리스티나만큼의 ‘부재성’을 획득한다. 부재가 답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부재성이 갖는 힘이다. 존재하지 않는 대상은 불확실성과 모호함이라는 권위를 갖는다. 헨릭은 크리스티나를 8년간 찾지 않음으로써, 그녀가 남긴 일지를 불태워버림으로써, 그리고 콘라드의 대답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킴으로써 욕망의 충족을 지속적으로 방해한다. 알고자 하는 욕망은 결핍과 부재로 인한 모호성을 통해 증폭된다.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욕망. 이것이야말로 헨릭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다음 문장이 이를 말해준다.
자네와 나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비밀에는 특별한 힘이 있기 때문이지. 그것은 파괴적인 광선처럼 삶의 조직을 불태우지만, 동시에 삶에 활력과 정열을 주지. 그것은 목숨을 부지하도록 강요하네…. 지상에서 할 일이 남아 있는 한 살아가게 마련일세. 자네가 열대와 바깥세상에 있는 동안. 나 혼자 여기 숲에서 사십일 년 동안 체험한 것을 자네에게 들려줄 생각이네. 고독이라는 것도 참 묘하네. 그것도 정글처럼 이따금 위험과 놀람에 가득 차 있어. 나는 온갖 고독을 알고 있네. (133)
이 기다림이 목숨을 부지시켜 주지. (135)
크리스티나는 헨릭의 ‘오브제 프티 아’다. 그녀는 헨릭과 콘라드 사이에서 욕망을 매개하는 기표로 작동한다. 라캉에 따르면 기표는 떠돌고 고정된 기의에 정착하지 않는다. 크리스티나라는 기표는 사랑스러운 아내, 부정한 여자, 살인 공모범, 혹은 남편에게 버림받고 결국 죽은 여자라는 기의들 사이에서 떠돌고, 그녀가 남긴 일지도 마찬가지다.
그녀와 그녀의 일지는 그 부재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자들에게 의미를 생성하고,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지속적으로 의미가 변한다. 그녀와 그녀의 일지는 마치 라캉의 『도둑맞은 편지』의 ‘편지’처럼 소설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기표지만, 실체적으로는 ‘결핍’으로 남는다. 이 ‘결핍’의 상태가 욕망의 지속에 필수적인 요소다.
욕망이 항상 ‘결여된 어떤 것’을 추구한다고 라캉이 말했듯이, 크리스티나의 마음이 완전히 드러나면, 그리고 일지의 내용이 완전히 공개되면, 배신을 확인하고 싶은 헨릭의 욕망은 충족되지만,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 그는 크리스티나라는 기표의 의미를 숨김으로써 삶에 대한 그의 열정을 지속시키고 있다. 소설 마지막 장은 헨릭이 유모에게 크리스티나의 초상화를 다시 걸게 하면서 끝난다. “그림을 다시 걸 수 있네.”(276)
다시 걸린 크리스티나의 초상은 헨릭이 죽을 때까지 그에게 쉼 없는 욕망을 줄 것이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결핍으로 그의 욕망 나무를 자라게 할 것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물음에 대한 어설프고 다정한 대답’을 하며 기꺼이 헨릭의 영원한 ‘오브제 프티 아’로 남으리라. 신기루임을 알아버리지 않게 잡힐 듯 말 듯한 욕망의 차액과 결핍을 제공하면서.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 이 순간 나를 움직이는 나의 ‘오브제 프티 아’는 무엇일까.
산도르 마라이, 『열정』(1942)
(김인순 옮김, 솔, 2021(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