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던 유예의 방

김금희 『대온실 수리 보고서』(2024)

by 에밀리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기억은 시간과 공간의 합작 서사다. 지나간 시간대 하나를 떠올리면 그 시간을 품었던 공간이 떠오르고, 머물렀던 공간을 떠올리면 그 공간을 소유했던 시간도 함께 떠오른다. 시간(크로노스)과 장소(토포스)가 함께 빚어내는 기억. 미하일 바흐친의 ‘크로노토프(chronotope)’ 적 경험이다.

공간이 열쇠가 되어 빗장 걸려 있던 시간을 풀어낸 경험을 누구나 한번은 갖고 있지 않을까. 이 소설의 주인공 영두처럼 말이다. 창경궁 대온실 수리 공사를 진행하게 될 건축사사무소에 임시 취업한 그녀는 수리 보고서 작성 일을 맡았다. 수리 과정을 취합만 하면 되는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실측과 현황 조사에도 참여하고 무엇보다 역사적 고증을 통해 ‘썰’을 풀어야 하는 복잡한 일이었다.


그런 영두를 따라가다 보면 그녀에게 두 가지 시간이 동시에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 크로노스는 질서에 부합하는 시간, 즉 연대기적 시간이며, 카이로스는 선형적 흐름의 크로노스를 뚫고 들어오는 감각적 회상의 순간, 즉 내면의 시간이다. 소설은 마치 DNA 구조처럼 이 두 개의 시간을 ‘창경궁과 낙원 하숙’이라는 사다리 공간으로 이으면서 나선형으로 꼬아 나간다.


설계팀과 함께 움직이며 대온실 수리 과정인 크로노스의 시간을 기록해 나가던 영두. 그녀의 내면은 창경궁이라는 장소가 불러일으키는 또 하나의 시간으로 복잡해진다. 과거를 회상하며 경험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식민지 시절의 잔재로 기억되는 역사적 공간 창경궁 대온실이, 영두에게는 잠겨 있던 기억의 방으로 인도하는 개인적 공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잠겨 있는 기억의 방. 기억은 하지만 굳이 애써 떠올리고 싶지 않은, 밀쳐두고 싶은 기억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 있는 방. 창경궁 옆 창덕궁을 따라 형성된 동네인 원서동에서 보낸 시간이 영두에게 바로 이런 트라우마의 공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트라우마를 떠올리는 영두의 개인적 카이로스를 따라가다 보면, 비극적 역사 속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잠겨 있는 무명의, 수많은 트라우마와 우리가 결국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유예 상태의 기억

대온실 수리를 맡은 건축사사무소 백 실장은 말한다. “과거를 끄집어낸다는 거 되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거든요.” 외면하고 싶은 과거가 있다면 의식이 자주 닿지 않는 어딘가에 그냥 묻어 두고 마치 일어나지 않은 일인 양 여기며 살면 좋을까, 아니면 용기를 내서 끄집어내고 화해할 부분은 화해하고 쓰다듬을 부분은 쓰다듬으면서 정리를 해 나가는 편이 나을까.


영두의 과거 경험들은 유예 상태로 묻혀 있다. 해결도 완결도 되지 않았다. 사고로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는 배를 타지 않았던 아빠 때문에 무척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강화 석모도에서의 어린 시절. 할머니와의 가는 인연 줄로 자신을 받아 준 안문자 할머니 덕에 시작하게 된 서울 ‘낙원 하숙’에서의 중학교 생활. 그리고 학교 문제지 유출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자퇴해서 다시 강화로 가면서 사람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쓰라린 기억까지, ‘억울하다’라는 한 마디로는 결코 정리될 수는 없는 상처가 그녀의 기억 저변에 그대로 남았다. 방어기제의 작동이라는 심리상담사의 해석처럼, ‘어떤 것은 섬세하고 어떤 것은 듬성듬성 잘려 있는’(201) 기억들 때문에 궁궐 옆 낙원 하숙이 있던 곳을 찾아가는 영두의 마음은 착잡하다.


낙원 하숙이 있던 골목으로 다가갈수록 나는 그 집이 아직 남아 있을지 사라졌을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있다면 누가 살고 있을지. 사라졌다면 내 모든 기억은 조용히 잠겨 있으면 되는 건지. 침잠된 기억을 이따금 일렁이며 살면 되는지. 지금껏 그랬듯이. (145)


창경궁으로의 회귀는 영두 개인에게는 과거 원서동에서 살았던 자신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동시에 그녀가 보고서 작성을 위해 모으는 고증 자료는 우리가 모른 체했던 역사의 미시적 기록들, 전쟁이라는 비극의 시공간을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끔찍한 죽임을 당했던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로 우리를 데려간다.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고 존재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비극적 죽임을 당한 그것이 사람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창경궁은 아픈 역사를 가진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궁궐의 격을 낮추기 위해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고 창경원이라 이름 붙였다, 태평양 전쟁의 패전이 예상되던 어느 날 창경원을 관리하던 직원들에게 은밀한 지령이 떨어졌다. 동물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폭탄이 투하되어 혹시라도 우리 안의 동물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면 사람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하룻밤 사이에 호랑이 표범 코끼리 등 150마리의 동물들이 독약을 탄 사료를 먹고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어 나갔다. 바로 죽지 않는 동물들은 직원들이 직접 해결했다.


소설의 5장, ‘당신은 배고픈 쿠마 센세이’는 소설 속 소설로서 이 끔찍했던 현장을 우화로 표현한다. 화자는 마리코라는 원숭이다. 그녀가 스승처럼 따랐던 쿠마 센세이(우리말로 옮기면 ‘곰 선생님’ 정도가 되겠다)를 약이 모자랐는지 안 죽는다며 직원이 직접 창을 찔러서 죽였을 때, 마리코는 안된다고 소리를 질러 대다가 누군가에게 맞아 기절해 버린다.

이 우화는 조선에 살던 내지인 초등학생이 쓴 글을 영두가 입수해서 소개하는 형식으로 소설에 들어가 있다. 비록 갇혀서 생활은 했지만, 분명히 살아 있었는데, 영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끔찍하게 죽임을 당한 곰과 원숭이의 억울함을 우리가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또 이런 억울함은 어떠한가. 한국 전쟁 중 피난을 가야 했던 아버지가 따라가지 않겠다는 어린 남매를 창경궁 지하에 숨겨 두고 곧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겼었는데, 다시 돌아온 날 남매를 만나기 직전에 총에 맞아 죽어버린다면. 탕 탕 소리와 함께 몸이 튀어 오르며 죽어가던 아버지를 눈물을 흘리며 숨어 지켜봐야 했던 이가 그의 딸이었다면. 또 그녀가 지하에 함께 숨어 있던 아픈 동생을 살리지 못하고 아버지를 죽인 남자에 의해 몹쓸 짓까지 당헸다면. 무엇보다 그 몹쓸 짓을 한 남자의 눈을 독극물 주사기로 찔러 버린 바람에 범죄자가 되어 그녀가 다시는 고향 일본 땅을 밟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 어린 여자애는 아픈 동생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속에 외롭고 힘들게 성장했다. 재산을 일구어 하숙을 운영하였고, 할머니가 되고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그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억울한 일이 있다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이 살아 있었음을 모른 채 세상을 뜬 게 아니었을까. 그보다 더 억울한 일은 아버지를 죽이고 누이에게 끔찍한 짓을 한 남자를 죽어가던 자신을 구해 준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며 동생이 살아왔다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이 모든 이야기는 낙원 하숙에 영두를 거두었던 안문자 할머니의 이야기다. 일본인이면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비극적 이야기를 가슴에 묻어 둔 채 평생 타지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 해결도 완결도 되지 않은 채 유예 상태로 끝나버린 그녀의 억울함은 누가 기억하고 보듬어 줄 것인가.


서류가 말해주지 않는 억울함을 기억하는 일


전쟁은 비극의 크로노토프다. 마리코와 쿠마, 그리고 안문자 할머니처럼, 그 시공간에 우연히 머무르게 된 존재들은 비극을 보고 겪으며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전쟁의 승패와는 상관이 없다. 전쟁은 권력 위계에서 높이 올라가 있는 자들의 정치 놀이이고, 정작 실존의 위협을 경험하는 자들은 저 아래 놓인 자들이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사실은 그들의 억울함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적 비극의 철저한 고립성이다.


보수 공사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대온실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지하 공간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공연히 귀찮은 일이라도 발생할까 주저하는 사람들을 설득해 가며 영두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새롭게 발견한 공간을 파 내려간다. 그곳에서 발견된 의문의 뼈들. 마치 추리물처럼 뼈의 주인을 수소문해 가지만 누구의 것인지 끝내 밝혀내지 못한다.

밝히지 못하는 이유는 그 뼈들이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가슴 아픈 시대를 살아내며 모진 일, 끔찍한 일을 겪어야 했던 모든 사람, 모든 동물의 뼈라고 할 수 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그 누구도 기억하지도, 위령하지도 않는, 그저 미상으로, 미완으로 남아 있는 억울한 죽음들. 그들을 상징하는 그것이 지하실 밑에 침잠해 있던 ‘뼈’다.


수리도 끝나고 보고서도 마무리되면서 다시 찾은 창경궁 대온실. 영두와 일행은 그 앞에 조성된 국화꽃밭을 본다.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기 위한 상징적 애도의 꽃, 국화들을 보며 영두의 마음은 좀 회복되었을까. 인간에 대한 그녀의 신뢰도 회복이 되었을까. 서류로만 존재하는 역사가 외면해 오던 지하실의 억울한 뼈들은 끝없이 계속되던 ‘공동과 침하’(210)의 방에서 조금이라도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영두의 억울함을 짐작하고 항의하기 위해 학교를 방문했던 안문자 할머니는 ‘다 해결되었다’라며 영두 한 명을 희생하는 것으로 사건을 대충 마무리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해결은 억울한 애가 없어야 해결이지요. (233)


우리는 역사의 비극을 너무 쉽게 잊는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비극과 함께하는 개인의 비극도 마찬가지다. 이름 없는, 그래서 서류가 기억하지 않는 죽음들은 외롭게 혼자 유예의 방에 머물러 있다. 누군가 그들을 기억하고 파헤쳐주고 애도해 주길 바라면서.

안문자 할머니의 말처럼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그것이 진정한 ‘해결’이라면, 아직 진정한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주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도 유예 딱지가 붙은 기억의 방을 두드린 영두처럼, 공권력의 반대에도 대온실 지하실을 탐색해 나간 소설 속 인물들처럼, 불행했던 과거를 끄집어낼 용기가 먼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위로할 것을 위로하고 애도할 것을 애도해야 한다. 그것이 유예를 완결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대온실 수리가 지하실의 뼈들을 위로하며 완결로 가는 것처럼.

파편화되어 지층 속에 묻혀 있는 죽은 존재들을 어떻게 완결된 죽음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까. (289)

김금희 『대온실 수리 보고서』(2024)

(창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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