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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y Sep 11. 2018

미국 고생 자랑기

애 둘의 워킹 디자이너 맘, 미국 5년 차를 뒤돌아보며


언젠가 드라마를 보다가 이런 대사가 나왔다. 

소개팅 주선자가 소개팅녀에게 '이 남자, 미국에서 얼마 전에 MBA 따고 미국 finance 관련 일을 한데. 어렵게 마련한 자리니까 잘해봐!' 잠시 후 멋진 외제차를 끌고 수트를 빼입고서 등장한 소개팅남.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를 보다가 박장대소(현웃)를 해버렸다. 바로 내 옆에서 소파에 앉아 입 벌리고 다리 벌리고 자고 있는 남자의 정확한 백그라운드 아닌가. 그러고 보면 얼핏 그럴싸한 수식어로 멋져 보이기는 하겠다, 우리. 은행에서 일하는 남자와 디자이너 아내의 미국 생활. 더 시간이 지나 까먹기 전에 쉽지 않았던 우리의 고생 자랑을 해볼까 한다. 이방인 꼰대들의 라떼 이야기, 예비군들이 얼마나 지지리도 독한 선임 밑에 있었는지 등을 흥분하며 얘기하는 것 같은 그런 고생 자랑이다. 


어느새 미국 온 지 어언 5년,

아메리칸 에어 편도를 끊어 이민가방 하나씩, 여권에 학생비자 하나씩 찍어 신랑과 미국 땅을 밟은 후부터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MFA 신랑은 MBA를 하나씩 따고 신랑은 미국 은행에서 나는 대학교의 홍보실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중. 그 사이 사이좋게 아들, 딸 하나씩. 



찌질이들의 만남

어쩌면 잘나지 않은 집안에서 유학을 꿈꾸던 것부터가 쉽지 않았던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겠다고 한 것도. 초라하진 않았지만 예물, 폐백 같은 형식을 다 생략하고 크게 특별할 것 없는 결혼식을 치렀다.


결혼 전 나를 만나기 전 신랑은 부산 지방대 출신. 서울에서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MBA 유학을 가겠다고 아는 분 집에서 신세 지내며 강남 해커스에 수업을 듣기 위해 줄 서 있는 많고 많은 아저씨 학생 중 하나였다. 토플에, GMAT에 탈모가 생길 때까지 공부를 했단다. 너무 꿈이 컸던 탓일까... 꽤 유명한 학교 웨이팅까지 같지만 결국 탈락. 덕분에 신랑은 30대 중반 돈 없는 백수에 탈모를 얻은 아저씨였고 더 이상 서울에서 버틸 수 없어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때 나는 인서울 디자인과를 졸업하고 고향 부산에서 아버지 사업에 디자인일을 도와드리면서 유학을 만만히 보다 지원한 학교들에서 주르륵 떨어져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던 때였다. 그렇게 두 찌질이가 만났다. 


찌질이들의 묘한 동질감 때문이었나 보다. 타이틀만 봤을 때는 절대 만나선 안될 남자인데 그때 당시 씐 콩깍지 덕분에 없는 형편에도 과감히 도전하는 정신이 멋져 보였고 그렇게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우여곡절 끝에 미국 석사과정에 각각 합격서를 받았고 신랑은 80% 장학금까지 받았다. (이게 웬 떡!) 마침 결혼 전 취직한 회사에서 과장으로 승진까지. 신랑은 어렵게 다시 취직한 꽤 괜찮은 대기업에서 과장 자리를 버리고 미국행을 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다. 합격서를 들고 아침에는 '나 사표 내고 올게.' 하고선 퇴근하고서는 '우리 다시 생각해보자'를 열두 번도 반복했다. 나는 신랑에게 '굶어 죽기나 하겠나? 굶어 죽을 거 같으면 그때 돌아와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니가!'라고 부추겼고 결국 사표를 내고 미국행 비행기표를 끊게 되었다. 


찌질했던 미국 생활 시작

그렇게 온 미국이었다. 나와 신랑의 학교가 차로 2시간 거리에 있었는데 서울에서도 한 시간씩 통학하니 어떻게든 되겠다는 생각으로 왔지만 막상 도착하니 도저히 계산이 안 나왔다. 그나마 생활비, 집세, 세금이 싼 내 학교 근처에 거처를 마련하고, 신랑은 우여곡절 끝에 주중에 몸 뉘어 잘 수 있을 정도의 거처를 찾았다. 미국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대도시가 아닌 이상 땅이 너무 넓고 대중교통이 없어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퀴만 겨울 굴러가는 거라도) 차가 있어야 하지만 우리는 이 마저도 없이 살아보기로 했다. 


차가 없으니 신랑은 매 주말마다 가장 싼 차이나타운 버스를 타고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혹시라도 차가 막혀 늦게 도착해 집으로 오는 시내버스가 끊기면 언제 총기사고가 날 줄 모르는 어둡고 무서운 길을 혼자 캐리어를 끌고 한 시간 가량을 걸어오기도 했다. 그동안 나는 장을 보고 신랑이 주중 점심시간에 먹을 수 있는 볶음밥, 저녁에 데워먹을 수 있는 밥, 국, 반찬 등을 소분해 나누어 얼려두고 일요일 오후가 되면 캐리어 하나에 바나나 하나까지 싸주었다. 식당을 가면 햄버거를 칼로 반으로 갈라 나눠먹으며, 혹시라도 누군가 집에 가서 Potluck을 하게 되면 남은 음식 염치없이 다 싸와서 주중에 아껴먹으면서 그렇게 2년을 보냈다. 

그나마 신랑이 장학금도 받았고 나는 TA도 해서 학교에서 학비가 면제되었고 월세가 900불이었는데 매달 나오는 1,000불로 집세를 냈으니 다행이었다. 

 한 주의 시작 전 신랑의 일주일분 일용할 양식 (음식들 움직이지 말라고 안쓰는 박스에 음식을 가득 넣어줌)


두둥, 찌질이들의 2세

그러다 내 대학원 2년째가 되던 해에 임신임을 알게 되었다. 결혼한 지 3년째 되던 해였으니 아이를 가지는 건 당연하고 축복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그때 주로 실크 프린팅으로 작업을 많이 했는데 불뚝 나온 배 뒤에 맥북을 넣은 배낭을 메고 학교에 가서 작업을 위해 새벽 2시까지 내 몸뚱이 만한 스크린에 잉크를 밀어내며 마지막 학기 작업을 마쳤다. 학위를 마무리하는 전시기간이 예정일이었고 예정일보다 딱 일주일이 지나 23시간 진통 (무통주사도 없이...) 후 출산을 했다. 3일 정도 있는 입원기간 동안 졸업에 필요한 마무리 document를 작성하고 다행히 교수님들이 날짜를 연장해주어 몸이 조금 회복된 후에 부은 몸을 이끌고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을 마무리했다. 남들은 산후조리원에서 산후 요가를 하는 동안 나는 아기띠 매고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우리는 그저 핏덩이 아기가 있는 고학력 백수 외국인들에 불과했다. 신랑은 박사를 하겠다고 틈틈이 공부해 스물 곳 가까이 지원했지만 우수수 탈락 소식만 들릴 뿐이었다. 이제 어디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OPT 기간인 1년 동안 취직을 못하면 비자는 만료되고 미국을 떠나야 했다. 살고 있던 아파트 계약 만료 날짜도 다되어갔고 돈은 떨어져 갔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는 부지런히 젖을 빨며 커가고 있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신랑은 미국 어디든 원서를 넣었다. 그나마 미국에서 태어난 아기 덕분에 미국에서 저임금 가정에게 내주는 보조로 마트 가서 조금의 우유와 시리얼 과일 등을 사 먹을 수 있었다. 


핏덩이를 데리고 일자리가 많은 뉴욕으로 무작정 떠날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어디로 갈지라도 정해보자라는 마음으로 2달도 계약이 가능한 아파트를 찾아 트럭 하나를 빌려 이사를 했다. 한 여름에 아기띠를 매고 이삿짐을 옮기는데 아기도 피곤했는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언제 어디로 갈지도 모르니 이삿짐을 다 풀지도 못하고 필요한 짐만 풀었다. 방 하나짜리 아파트에서 신랑과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원서를 쓰고 나는 포트폴리오 정리했다. 그나마 희망의 끈처럼 이곳저곳에서 답장이 왔지만 비자를 지원해주는 곳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원서를 보고 관심 있다 연락이 오더라도 비자를 지원받아야 하는 외국인이라고 하면 미안하다는 말이 되풀이되었다.  


신생아 데리고 이사하기. (생존력이 +3 상승하였습니다.)


기적 같은 타이밍

5월에 졸업하고 9월이 다되어갔다. 다음 달 월세가 없었다. 그때 마침 대학원 전시에 전시한 내 작품을 사겠다고 갤러리에서 연락이 왔고 5점이 팔렸다. 딱 월세를 내고 생활비를 낼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그러다 기적처럼 신랑은 LA에 있는 한국계열 회사와 우리가 있는 도시에 부본사가 있는 은행에서 동시에 인터뷰가 잘 진행되어갔다. 그 전에도 꽤나 규모 있는 엔지니어링 회사들에서 인터뷰 보러 오라고 비행기 티켓도 내어주어 여기저기 다녀왔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 힘들어하던 참이었다. 나도 마침 졸업한 학교에서 디자이너 자리가 오픈되어 지원했는데 폰 인터뷰도 넘기고 인터뷰를 보러 오란다. 아기띠를 매고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합격 전화가 왔다. 신랑도 캘리포니아에서도 리치몬드에 있는 은행에서도 합격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당장 출근하겠다고 말하고 10월이 되었다. 


어리둥절 출근

그렇게 첫 출근을 했다. 아침이면 졸업 전 싸게 구매한 차 한 대로 5개월이 된 아기는 겨우 찾은 Daycare에 맡기고 신랑은 나를 내려다 주고 신랑이 출근했다. 신랑은 10년 넘게 한국에서 제조업 회사에서 해외영업 일을 했는데 MBA덕분에 finance로 방향이 바뀌었다. 쉽게 말해 그동안 해왔던 것을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거였다. 노력형 아침 인간형인 신랑은 새벽에 일어나 모르는 것들을 공부하고 출근했다. 쉽지 않았지만 신랑도 나도 잘 적응해나갔고 아기는 무럭무럭 커갔다. 


아침에 일어나 도시락 두 개를 챙겨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해서 아기를 찾아 돌아오면 저녁해 먹고 아기 씻기고 조금의 휴식 후 자고 그렇게 바쁘고도 감사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어디로 갈지 몰라 2개월 버텨보자 하는 마음으로 이사 간 곳에서 2년을 보냈다. 방 하나짜리에 햇빛도 잘 들어오진 않았지만 일자리가 생겼다고 갑자기 무턱대고 소비를 늘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40프로 정도가 세금으로 나가고 각종 보험에 연금에 집세보다 더 비싼 Daycare값에 매달 1,000불 가까이 되는 월세를 내면 아끼는 게 맞는 듯했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OPT기간이 끝나고 H1B (취업비자)를 받아야 했다. 우리 둘 다 회사에서 지원해줬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뉴욕이나 LA 같은 대도시에서는 이런 비자 지원을 받아야 하는 외국인들을 이용해 먹는 회사들이 많다던데 우리는 HR에서 '당연히 해줘야지!'' 하며 잘 진행해줬다. H1B는 회사에서 지원해줘도 워낙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아 서류가 리뷰될 수 있는 사람이 뺑뺑이로 뽑히는데 대학교에서 일하는 지원자는 무조건 받을 수 있단다. 그러니까 나는 큰 문제만 없으면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거고 신랑만 잘되면 크게 걱정 없이 계속 일할 수 있는 거였다. 



비자의 서러움 

하지만 왜 슬픈 예감은 안 틀리는지. 회사 HR에서 그것도 프리미엄으로 지원해준 H1B가 뽑히지 않았다는 소식이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대학원 졸업하고 어렵게 취직하고 열심히 일하던 곳에서 단순히 뺑뺑이에 안 걸렸다는 이유로 일을 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이 되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신랑이 일한 지 3년이 다되어가는데 3년 동안 한 번도 뽑히지 못했다. 비자가 없으면 일을 할 수 없고 3년 동안 일을 한다는 것 조차가 불가능하다. 불굴의 사나이, 신랑은 한 중국인 친구에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얘기 들었다. 주말에 수업을 듣고 주중에는 온라인으로 숙제를 하면서 다닐 수 있는 대학원이 있는데 거기서는 학생비자 신분을 유지하며 주중에 일 할 수 있는 CPT를 지원해준다는 소식. 다행히 그 학교가 멀지 않은 곳에 있고 무작정 비자를 지원해주려고 마구잡이로 학생을 받는 어학원 같은 곳이 아니라 꽤 신뢰도가 있고 engineering 관련 학위에 관련된 직종에 있는 사람들만 지원이 가능한 곳 이었으니 신랑이 다니기에 딱인 학교다. 그 말은 주중에는 풀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공부하고 주말에는 학교를 가고 학비도 따로 내야 하니 마냥 쉽지만은 않았지만 우리에겐 옵션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지원한다고 합격이 되는 학교도 아닌 곳이었다. 


그렇게 알게 된 학교에 3년째 다니고 있다. 신랑 같은 상황의 사람들이 꽤 많은 듯 그곳에는 시카고에서, 플로리다에서 매주 비행기를 타고 오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주중에는 퇴근 후 학교 숙제를 해가며 그렇게 신분을 유지해가며 일을 하고 육아를 하고 살림을 하고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 벌써 3년이 다되어간다. 


공휴일 오후 우리집 풍경. 공부하는 아빠의 무릎에서 잠든 둘째, 그 옆에서 노는 아들을 보며 저녁을 만드는 나


감사함

불과 6년 전 두 찌질이들이 만나 이런저런 고생 마음고생도 해가며 이방인의 삶을 택했다. 미국이 절대 유토피아도, 정답도 아니지만 막연했던 미래의 모습을 조금씩 실현해갈 수 있게 도와줬다. 그동안 발전해서 방 두 개짜리 월세에 차 한 대를 몰며 출퇴근하고 매달 용돈 80불 아껴가며 커피 사 먹고 부모님 찬스 없이 아이 둘 키워가고 있다. 그래도 이제는 famer's market 가서 유기농 계란도 사고, 먹고 싶으면 걱정 없이 레스토랑에 들어가 메뉴도 여유 있게 시켜보고, 둘째 출산 때 산후조리 도와달라고 친정엄마 비행기 티켓도 사드릴 정도로 여유가 있어졌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가끔 회사에서 보내주는 콘퍼런스 핑계 삼아 여행도 다녀오고 열심히 일하면서 실력도 인정받아 가끔 보너스도 받고 신랑 회사에서 보내주는 마이애미 여행도 다녀왔다. 


비록 드라마에서 나오는 MBA 출신에 미국에서 일하는 잘 나가는 소개팅남의 모습이, 멋진 카리스마 부려가며 날카로운 아이라인의 화장을 하고 멋있는 디자이너가 아닐지라도 우리가 선택한 길을 통해 경험한 고생 덕분에 지금은 감사할 일로 가득한 소소한 일상을 사는 평범한 워킹 부부가 되었다. 


막상 진짜 고생한 분들에 비하면 우리가 한 고생은 축에도 못 끼지 싶다. 이방인의 삶이 장밋빛 미래를 약속해주지 않고 모두가 고생을 보답받는 낙을 얻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더욱더 풍부히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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