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8일. 나의 아저씨
다시 4월 16일이 왔고. 달라졌다면 달라졌지만. 여전히 아직도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전에 적었었다. 강풀의 무빙은 우리 시대 가장 슬픈 판타지를 담고 있다고.
아이들을 지키는 어른들이 있는 세상.
그 다시 온 16일을 여전히 무기력하게 보내면서 <나의 아저씨>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그 어둡고 슬프고 빨리 자란 아이가 그제서야 소리 내어 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 무기력한 아저씨가. 그 무기력한 어른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날의 이 드라마가 마치 추운 날 지붕 없는 곳에서 마시는 소주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는 어른. 우리 시대의 꼰대. 아저씨가 거기에 있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는 아직도. 앞으로도.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