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세기말 친구들 모여라!
2000년대 초반 초, 중학교 생활을 한 여학생들이라면 한 번이라도 들어봤을 그 이름.
‘아론 카터’
대다수 어린 여학생들이 이 꽃미남으로 인해 팝송과 외국 문화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것이다.
나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당시 그저 외국인이라고 하면, 얼굴에서 코만 보이고 키가 크고 금발이나 갈색의 머리를 휘날리며 프리한 스타일(양말에 샌들을 신는다던지)로 다니던 별생각 없던 외국 사람 정도였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통해 아론 카터를 처음 본 순간, 뇌 회로가 일시 정지하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 정말 잘생겼다... “라는 말만 연발하였다.
금발의 앞머리며, 푸른 바다 같은 눈빛과 전 세계 여학생들의 심장을 움켜쥐는 살인적인 미소로 뮤직비디오에서 노래를 하는 그를 보며, 그 날 이후 내 진로는 단박에 정해져 버렸다.
“ 나 외국 갈래! “
이런 나를 보며 엄마는 콧방귀를 뀌시곤 외국이고 나발이고 공부나 하라고 타박을 하셨지만 말이다.
그 이전엔 아직 어리기도 했거니와 외국어나 외국 문화에 대해 그 어떠한 접점도 없었고 접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중학교를 들어가며 격동의 2000년대를 직격으로 맞은 우리 여중생들은 물 밀 듯 들어오는 일본 문화와 미국 문화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에는 한국 대중문화 또한 황금기였기에 주옥같은 명곡들과 가수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고 팬덤을 이루며 서로 너네 가수, 내 가수 하며 싸우기 바빴다.
나는 그 당시 모든 아이돌들을 다 좋아하는 철새 팬이었지만 그래도 주류는 외국 아이돌이었고 일본 드라마를 즐겨 보았으며 잘생긴 한국 아이돌 1-2팀 정도 좋아하는 수준이었다.
중학교를 올라가며 부모님이 처음 사주신 신문물 컴퓨터를 방 안에 들여놓았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각종 연예인들의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아론 카터를 시작으로 한 검색은 그 당시 엄청난 인기를 몰고 다녔던 백스트리트 보이즈,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엔싱크 등등 여러 가수들의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좋든 싫든 항상 영어를 생활 속에서 접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쳤던 영어 시험만은 항상 성적이 좋았는데 의도치 않게 맨날 듣고 가사를 외우던 팝송 덕분이었다.
그런 이후엔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영어 회화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반 편성이었다.
원어민 선생님 수업 한 반에 레벨 2 정도부터 레벨 6까지 다양한 학생들이 있었는데 회화반 이라기보단 거의 친목반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영어가 제대로 되었겠는가? 당시 원어민 선생님이 이 오합지졸 반을 데리고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다.
이렇게 중학교 때부터 이어온 영어를 어쩌다 보니 20살이 될 때까지 꾸준히 접해오게 되었다.
단연코 제대로 공부를 하지는 않았기에 회화나 문법 실력은 당연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리 외국에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외국으로 나가야겠다.’
이 목표 하나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당시로는 꽤 괜찮은 월급을 받으며 저축을 했다.
'해외에 가려면 영어를 완벽하게 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있었다.
제대로 배우고 나가야 외국 가서 잘 말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당시 유명했던 스파르타 영어 학원을 등록하여 3개월 정도 독하게 공부했다.
다행히 그 방법이 나에게 잘 맞았는지 3개월 후 내 영어 실력은 일취월장하다 못해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
‘ 이제 됐다. 가자! 근데... 어느 나라를 가야 하지? ‘
21살이었던 당시 이미 주변의 많은 언니, 오빠, 선배들이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기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는데 비자 신청만 하면 다 갈 수 있고, 거기서 일하면 주급으로 돈을 주며 시급도 세고 여행까지 한다더라. 누구는 모은 돈으로 한국 와서 차 사고 가방 샀대!(...)
어린 나이에 철없던 나에겐 꿀같이 달콤한 말들이었다.
20대 초반에겐 매혹될 수밖에 없는 말들이지 않은가?
결국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부모님께 말했을 때 생각보다 담담히 받아들이셨다.
21살의 딸내미가 그것도 외동인 내가 혼자 외국에 나간다는데 이렇게 쉽게 허락하신다고?
그러나 엄마의 생각은 달랐다.
집안의 가장이었던 엄마는 어릴 때부터 혼자 시골에서 대도시로 상경했는데, 그 힘든 공장 일을 해가며 벌었던 돈을 집으로 보냈다. 하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도 할머니의 성화 때문에 마음껏 해보지도 못한 게 한이 된다며 자식인 나 만큼은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할 수 있는 선에서 시켜 주리라, 다짐했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저리고 고마운 마음뿐이지만, 그 당시 어린 나이였던 내가 뭘 알았겠는가.
허락해준다니 아싸! 하며 사방팔방 염소처럼 뛰어다니면서 워킹 홀리데이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게 나의 호주 워킹 홀리데이와 유학, 눈물 콧물 다 짠 5년 타향살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