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국제커플이 사랑하는 방법
내가 대만을 떠나는 마지막 날 풍경은 이랬다. 내 짐은 참 단출했다. 캐리어 두 개에 배낭 하나. 1년 반을 살았던 집을 떠나야 했다. 창이 큰 베란다도 있고, 거실도 넓은 집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강변이 바로 5분 거리에 있었다. 외로울 때나, 주말에 충전이 필요할 때 항상 그곳에 가서 강물을 바라보거나, 자전거를 탔다.
텅 빈 집에 인사를 하고, 꽉 찬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 없는 4층 집을 끙끙대며 내려왔다. 남자 친구 헨리는 타오위안 공항까지 운전하여 나를 데려다주었다. 철없는 나는 공항 가는 길에서까지 남자 친구에게 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흥분하며 이야기했다. ‘한국에서는 마케팅 콘퍼런스나 스터디도 대만보다 쉽게 할 수 있을 거야’, ‘인적 네트워크도 쌓을 수 있을 거야’. 남자 친구는 담담하게 내 말을 들어주며 운전했다. 그러다 조용히, 오랫동안 캐나다에서 살다가 대만으로 돌아온 헨리답게 ‘이해할 수 있어, 외국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라고 조용히 말한다. 나는 그 말에 위로를 받는다.
대만에 온 지 3년이 되자, 나는 외지에서의 삶에 질린 상태가 되었다. 점점 발전하는 한국을 두고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자책도 들었다. 가족도 보고 싶고, 한국에 가면 큰 가능성이 나를 기다리는 듯했다.
가을에 한국에 출장을 갔다 온 후, 남자 친구에게 내년 봄이 되면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날 우리는 다안 공원에서 피크닉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무심코 ‘한국에 가야겠어’라고 내뱉고 말았다. 그날 둘 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남자 친구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귀국을 말릴 수 없다고, 자신에겐 그런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 나라를 떠나겠다고 무책임하게 선언했으면서, 헤어지기는 싫다고 이기적으로 말했다.
봄이 되고 팬데믹으로 인해 좋은 인재들이 OTA였던 우리 회사를 떠났고,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해 나도 퇴직을 하고 귀국을 준비했다. 그러나 팬데믹의 가장 나쁜 영향은 우리가 두 나라를 자유롭게 입국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대만을 갈 수 없고, 남자 친구가 한국을 올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귀국을 앞두고 있었고 헨리는 나에게 비행기표를 잠시 미루라고 조언했다. 우리의 마지막 모먼트를 위하여 남자 친구는 과감히 모든 일을 일주일 동안 멈추고, 나와 로드트립을 떠나 준 것이다. 어쩌면 다시 함께 여행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불안함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지금 생각해보면 서로를 위한 마지막의 멋진 투자였다.
우리는 그렇게 ‘굿바이 타이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타이베이 - 타이중 - 허환산 - 타이난 - 아리산 - 신주 이렇게 7일을 여행했다. 이전에는 주말에만 같이 있다가, 처음으로 24시간 7일을 내내 함께 있게 된 것이다. 여행 시작 전, 순진하게도 우리는 금방 서로에게 질릴까 봐 진심으로 두려워했다. 그런데 헨리와 계속 같이 있는데도 매일매일 짜릿하고 즐거우며 행복했다. 이때의 시도가 서로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그렇게 우아하면서 멋있게 헨리는 나를 보내줬고, 서로에 대한 마음은 아주 커진 상태에서 장거리 국제커플이 되었다. 한국에 돌아가서는 영상통화를 붙잡고 살았다. 매일 연락하지만 마음은 굉장히 헛헛했다. 영상통화를 하면서 같이 운동을 해보기도 했다. 넷플릭스 영화를 ‘하나 둘 셋’ 하고 동시에 켜서 보기도 했다. 운동이나 엔터테인먼트를 같이 즐겨도 아무 말 없이 안아주는 것만 못했다. 못 만난 지 6개월이 가까워지자 우리는 거의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힘든 날을 보냈다. 우선 만날 수 없음에 슬프고, 두 번 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6개월을 넘어서자 결국 참지 못한 우리는 방법을 강구하다가, 남자 친구가 학생 비자를 신청하게 되었다. 그런데 곧 언어 학당이 시작되는 때라서 모든 어학당의 접수가 끝난 상황이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이화여대 어학당 접수를 부리나케 하고 학생 비자를 신청했고 한국에 오기 위해 신체검사까지 받아야 했다.
텅텅 빈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한 남자 친구는 낯선 한국에서 코를 찌르는 PCR 검사를 받고 홀로 정부에서 준비한 봉고차를 타고, 격리할 우리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가 느꼈을 불편함과 불안함에 대해서 내가 충분히 알아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
모든 것이 어쩌면 충동적이었고 그가 나에게 왔다. 옆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웃으며 함께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나를 찾으러 온 헨리에게 지금도 너무나 고맙다. 헨리는 4개월 동안 오전에는 온라인으로 이화여대 어학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급하게 대만의 동료들과 재택근무를 해나갔다. 저녁에는 어학당 숙제에 시험 준비까지 해야 했다. 마치 챗바퀴를 도는 다람쥐처럼 내 애인은 나를 위해 힘든 일상을 감수했다. 최근에 재택근무를 시작한 나는 이제야 알았다. 핸리가 공부하고 일했던 낮은 탁상 앞에 앉아있으면, 무릎이 아프다는 것을.
바보 같이 허상 같은 희망을 찾아 한국으로 도망쳐온 나였다. 그걸 알면서도 헨리는 나를 놓아주었다. 내가 다시 행복을 좇아 그를 필요로 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장 힘들 때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찾아준 남자 친구의 용기 덕분에, 그리고 지독하게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아직 함께 하고 있다.
이 글은 고맙고 사랑하는 애인, 헨리를 위해 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