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되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 (1)

나를 증명하기 위한 육아, 그 고단함.

by 또치맘

갓 태어난 내 딸 또치와 함께 집에 온 후 2주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좀처럼 잠을 자지 못했다. 원래 신생아 부모에게 잠은 언제나 ‘그리운 당신’이겠지만 나는 좀 경우가 달랐다. 잠을 잘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많았음에도 전혀 잠에 들지 못했다. 아이는 3시간 남짓의 텀으로 잘 먹고 눕히면 바로 다시 잠드는, 새벽 한정 순한 맛 베이비였는데 정작 엄마인 나 혼자 마라맛 육아를 하고 있었다. 누워있어도 정신은 말똥말똥, 아이의 작은 뒤척임에도 벌떡 일어나고, 배고프다고 입을 벌려 도리도리 하는 그 작은 쩝쩝거림에도 설게 든 잠이 깼다.


새벽에 못 자니 낮에라도 자면 좋으련만, 나는 산후관리사님과 남편이 제발 방에 들어가 자라고 날 떠밀어도 좀체 그렇게 하는 일이 없었다. 억지로 떠밀려 침대에 누워도 바깥에 아이가 애엥 소리만 내면 벌떡 일어나 다시 거실로 나오길 일쑤였다. 오죽하면 관리사님이 내가 젊은 산모라 이렇게 잠이 없는 건지 신기해하셨을 정도.


나는 내 몸 상태를 안다. 이건 잠이 없는 게 아니라 몸과 정신이 과하게 각성해서 잠을 못 잔 것이었다. 피곤은 한데 잠은 안 오고, 몸은 들뜨고 긴장해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상태였다. 에너지를 한계없이 쏟아부으면서도 힘들다는 자각이 없었다. 이게 영 낯선 느낌은 아니라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딱 시험 기간에 잔뜩 각성해 커피를 쏟아부어 피곤한데 피곤한 줄 모르고 지낸 그 느낌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긴장이 풀리면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워 몇 시간이고 쥐 죽은 듯 잘, 바로 그 느낌.


학생 때야 방학이라도 있지, 아기와 함께 집에 온 순간부터 이제 ‘잠시 멈춤’이라곤 있을 수 없는 긴 여정이 시작된 것인데 언제까지고 이렇게 한계 없이 온 체력과 정신력을 쏟아부으면서 지낼 수는 없었다. 내 상태가 시험기간 같다는 생각이 들자 생각이 많아졌다. 또치와 함께 하는 것은 이제 매일의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왜 짧게 치고 빠지는 시험기간처럼 이렇게 과도하게 애를 쓸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결국 아이의 존재를 마치 거대한 시험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이를 존재의 근간을 시험하는 거대한 퀘스트, 시험처럼 받아들이고 있으니 또치가 작게 칭얼거리기만 해도 그게 나를 검증하는 테스트인 것처럼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또치가 그치지 않고 울 때마다 나도 함께 무너진 이유는, 물론 아이에게 무언가를 마음껏 해주지 못하는 몸상태에 대한 자책도 있지만, 그 울음이 내 존재가 또치 자신에게는 부족하다는 메시지로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나쁜 엄마라는 내 존재에 대한 비하가 기본적으로 깔려있기에 나는 우는 게 할 일인 아기가 당연하게 우는 울음에도 과한 해석을 해가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완벽하고자 하는 욕심인가, 아니면 무언가가 불안한가. 내 주변 그 누구도 나를 판단하거나 비판하거나 책망하지 않는데 나는 왜 스스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가.


시험이라는 것의 본질은 평가일진대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쓰는가. 누구에게 어떤 평가를 원하는가.



가장 지독한 시험관을 안다. 바로 나 자신이다. 나는 나를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이만하면 됐다,라는 인식이 없다. 충분한 존재라는 자기 인식이 없고,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없다. 굳건하고 든든한 긍정적인 자아상이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몇 년 전과 비교해 보면 사이가 많이 좋아지고 자연스러워지긴 했지만 아직 나와 나는 아무런 흉금 없이 잘 지내지는 못한다. 마음 깊은 곳에는 난 언제나 부족한 사람이라는, 깊고 고집스러운 이상한 확신이 있다.



그런 와중에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내 삶에 이제 둘째는 없다. 자녀를 양육할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다. 아이를 낳으면서 산후출혈을 겪고 응급 자궁 적출 수술을 받았다. 없어진 장기 자체가 아쉽다기보다는 다신 생명을 품고 내보낼 기회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컸다. 그러니 또치는 내게 만회할 수 없는, 단 한 번뿐인 기회였다. 이렇게 과도한 부담과 해석이 아이의 존재를 덮어버렸다. 또치는 그냥 아기 또치로 존재할 뿐인데 내가 또치를 받아들인 방식은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단이었다. 누구에게? 나 자신에게.


난 내 존재에 대한 확신을 또치를 통해 얻고자 했다. 아이에게 잘해주면 난 좋은 사람이고, 아이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나쁜 사람이었다. 단순하고 비논리적이지만 강력한 도식이 머릿속을 알게 모르게 지배하고 있었으니 나는 또치를 통해 나 자신에게 날 증명하겠다며 아이와 함께하는 내내 시험기간 대학생처럼 살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