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는 연습의 시작
스스로의 시험관이 되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채점하며 비난하던 나날을 보내던 중, 채점의 기준에 의문이 생겼다. 이미 결과를 정해놓고 하는 관찰은 객관적일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난 나를 충분하지 못한 존재라고 단정 지어버려서 내가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무수한 증거들은 모두 그냥 지나치거나 무게를 싣지 못했다. 반면 내 생각에 조금이라도 부합하는 것 같은 상황들은 맥락을 무시하면서까지 나에 대한 적절한 평가, 즉 비난과 비하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아이를 낳고 산후출혈과 자궁적출수술을 겪고 살아남아 딸 옆에 남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엄마라고 많은 이들이 말해주었지만, 그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내가 당장 해줄 수 없는 것들에 집착해 나를 비난하고 비하하기 바빴다. 그런 삶은 피곤하다.
무엇을 해도 만족할 줄 모르는 깐깐한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할 짓이 못된다. 그런데 그게 나 자신이라면?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는 건 고역이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 같다. 있는 그대로를 그냥 긍정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그것이 평생을 걸친 여정이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실 나는 증명해야 할 존재가 아니다. 만약 존재를 증명한다 치더라도 그 일은 내 몫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 딸 또치는 나를 증명할 수단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기독교인인 나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 존재의 증명은 이미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끝났다고. 내 몫은 그냥 그걸 받아들이는 것뿐.
명확하지도 않은 머릿속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과도하게 날 채찍질해서는 안 되었다. 스스로도 목적지를 모르겠으면서 나에게 무작정 열심히만 달리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가혹한 일이니. 그리고 이건 또치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또치가 완벽하고자 하는 엄마의 노력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도 완벽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은연중 지닌다면? 혹은 (필연적인 결과지만) 결국 완벽하지 못한 엄마가 된 나의 자책 속에 아이가 갇혀 산다면? 안 될 일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생각해 보건대 나를 긍정하고 돕고 사랑하는 모습, 그리고 그 기술은 평생에 걸쳐 삶으로 습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한 가장 가깝고 좋은 모델은 부모일테다. 나는 또치가 나와 남편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아이로 크길 원한다.
다행히 남편은 나와 다르다. 자신이 괜찮아야 남도 도울 수 있다는 걸 알고 자신을 돌보는 것을 미루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 모습에 상당히 열이 뻗쳤지만 이제는 남편에게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쉴 수 있냐고. 나는 쉬고 싶어도 쉼이 없다고.
남편은 말한다. 남을 도우려면 내가 괜찮아야 한다고. 그래서 여러 통로를 만들었다고. 그런 그를 보면서 나도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나에게 쉼을 주고 나를 돕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며 오히려 그렇게 해야만 내 안의 깐깐한 동거인을 달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삶의 면면을 왜곡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평생의 숙제였지만, 또치의 탄생으로 인해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남편과 아이가 가정 안에서 행복하려면 내가 행복해야 하고, 그러려면 나를 돌봐야 했다. 나의 예민함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는 건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 다시 내게 말해주어야지. 내 존재는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그 증명은 이미 끝났다는 걸. 이상한 부담감에 눌려 아이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그저 주신 생명의 면면을 기뻐하고 경축하며 사랑하면 된다. 나는 충분하다. 충분히 좋은 엄마이고 이만하면 괜찮은 사람이다.
또치가 또치로 존재하며 혼날까 두려워하지 않고 목청껏 우는 것처럼, 나도 나로 살며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껏 나와 남을 사랑하고 싶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 온전한 사랑 안에 거하며 나도 그렇게 나를 사랑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