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모드 해제는 이제 없는 건가요?

억울함의 본질은 억울할 필요가 없다는 것

by 또치맘

아이를 낳은 후 나는 자동적으로 ‘엄마모드’로만 살기 시작했다. 아이의 울음에는 즉각 반응하며 흐트러진 집안은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상상 속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어서. 발동된 그 모드는 아침, 점심, 저녁을 지나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고 다시 아침이 되어 반복되었다. 그 하루하루가 쌓여 지금까지 엄마모드는 꺼진 적이 없다. 엄마모드인 나에게는 집안 모든 것들이 ‘투두리스트’로 보였고 자연스럽게 남편에게도 그 리스트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오빠, 이따 젖병 설거지 좀 해주고 건조기에 빨래도 꺼내줘. 그저께 빨래했는데 아직도 건조기 안에 있네. 그거 하고 시간 되면 작은 방 좀 같이 치우자.”


하루종일 오매불망 기다리던 남편이 집에 돌아왔기에 마음 속으로 벼르고 별렀던 집안일 리스트를 줄줄이 읊었던 어느 날, 이제 막 들어와 강아지와 인사하던 남편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자기야, 나 이제 들어왔어. 숨 쉴 틈 좀 주면 안 돼?”


살짝 짜증이 섞인 것 같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억울함이 치밀었다. 숨 쉴 틈? 아니 무슨 신생아 아빠가 숨 쉴 틈을 찾아? 나는 뭐 쉴 틈이 있어보이냐?


그날 남편이 표현한 숨 쉴 틈이라는 그 단어가 왜 그리 화가 났는지, 그 말을 물고 늘어졌다가 서로 감정이 상해 잠들기 전까지 집안 분위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남편은 종종 내게 그런 하소연을 했다. 너랑 나는 타이밍이 왜 이렇게 안 맞냐고. 무언가에 꽂히면 바로 실행을 해야하는 나는 머릿속에 무언가 할 일이 떠오르면 그때그때 남편에게 입력하기 바빴다. 이것도, 저것도, 요것도, 그것도 모조리 몽땅 네가 해야할 일이니, 시간이 나면 (말인즉슨 네가 휴대폰을 보고있는 지금!) 해주면 좋겠다고. 나머지 블라블라는 내가 하겠다고.


나는 이렇게 ‘부탁조’로 집안일을 같이 하자고 말하는 것도 남편을 상당히 배려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너도 사는 집이잖아!) 남편은 다르게 느꼈다. 할 일을 읊는 내게 남편은 부담과 압박을 느낀다며, 그런 말은 자기가 여유있을 때 해달라고 부탁했다. 변명을 하자면, 이런 말을 할 때 내 눈에 비친 남편은 진짜 할 일이 없어보였다. 할 일이 없으니까 릴스도 보고 쇼츠도 보고 TV도 보고 핸드폰 게임도 하는 거 아니겠어? 이렇게, 소파에 반쯤 누워 휴대폰을 보던 그에게 이때다 싶어 집안일 리스트를 읊을 때마다 매번 비슷한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땐 몰랐다. 남편이 어깨에 지고있었을 무게감을.


내 눈에는 베짱이마냥 한없이 여유있어보이던 남편이었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이제는 그에게 그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걸 이해한다. 내가 엄마라는 역할을 무겁게 받아들인만큼 남편도 아빠로서,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그만큼 가정에 쏟는 시간과 에너지가 더 많아졌다. 다만 나는 아이를 낳고 집에만 있으면서 집안과 아이에게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지만 남편은 일터에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집중해야 한

것이 차이점이랄까. 성실한 사람인지라, 아이가 태어나면서 많은 배려를 받은 만큼 자신도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압박감도 있었겠지. 남편은 멀티태스킹이 영 안 되는 사람이어서 각 장소마다 맞는 모드의 전환이 필요했다.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내게 단 30분이라도 숨쉴 틈을 요청했던 건 그런 배경에서다. 일꾼모드에서 아빠와 남편으로 모드를 바꿀 시간을 호소했던 것이다.


근데 그게 참 억울했다.

그에게 전환할 모드가 있다는 게 참 부러웠다.


출근이란 걸 아는데도 나는 남편의 바깥출입이 부러웠고, 일의 일부라는 걸 아는데도 그가 사람들과 함께 카페에 가는 게 부러웠다. 나는 아이를 낳은 후 이전의 모든 모드를 삭제하고 내면에 단 한 가지 모드만 세팅했다. 집에서 엄마로 사는 것. 그러나 남편은 달랐다. 그에게는 아빠 모드가 추가된 것이지 이전의 모드가 삭제된 건 아니었다. 사실 삭제할 수도 없었다. 집안 재정의 모든 책임이 그의 어깨 위에 있었다. 추가된 아빠라는 정체성,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무거울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나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과 다를 바 없는 모드로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남편이 미치게 부러웠고 또 바뀐 내 삶이 억울했다. 이 감정이 지속되어 나중에는 전환 시간을 요청하는 그에게 분노했다. 그 요청 자체가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했다.


무거운 용량으로 겨우 돌아가는 남편에게 재부팅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모드 전환이라는 비유를 떠올린 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남편의 쉼을 판단하지 않게 되었지만 내 안의 억울함은 그대로였다. 그래, 당신 고생하고 있어. 근데 나는? 나는 뭔데! 나는 이제 전환할 모드가 없어. 나도 엄마모드를 가끔은 끄고 싶다고!




여기서 반전은 이것이다. 아무도 내게 엄마로만 살라고 하지 않았다. 모드를 바꾸지 않는 건 내 선택이었다. 억울해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나도 마음만 먹으면 다른 모드를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그래서 전환할 모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직장을 퇴사할 때 그곳에선 내게 재취업 가능성을 암시했지만, 복귀한다 하더라도 그건 내년 일이었다. 그러니 직장인 모드는 일단 패스. 하나 하나 생각하던 중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탐했던 내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 글쓰는 모드라면 내 에너지를 쏟으며 일상을 환기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침 아기 또치와 함께 감정의 극한을 경험하고 있는 요즘이라 쓸 말은 무궁무진했다. 그래서 눈독들이던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다. 운이 좋게도 이곳에서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었다. 그래서용기내어 이 시리즈를 시작했다. 내 삶을 억울해하지 않기 위해, 선택할 자유와 책임이 있는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




집 근처 카페에 앉아 작가모드를 켜고 글을 쓰는 지금, 아빠 모드로 아이와 함께 충실히 집에 있어주는 남편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방금 남편에게 새분유가 어디있는지 묻는 전화가 왔다. 그의 목소리 너머로 빽빽 우는 또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마음이 쓰여 집에 돌아갈까 묻는 나에게 그는 더 있다 오라며, 혼자서도 괜찮다고 전화를 끊었다. 남편이 나의 모든 모드를 존중하고 응원해주어 참 감사하고 다행이다. 배려받은만큼 나도 남편의 전환시간을 존중해줘야지. 그렇다고 남편이 내가 힘들어하는 게 보이는데도 자신의 쉼만을 꼬박꼬박 챙기는 사람은 아니니 말이다.




돌아보면 난 참 많은 걸 억울해하며 살았다. 부끄러운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 삶의 모양은 내 선택이라는 걸 깨닫고 나니 억울함도 없다.

선택할 자유가 있음에도 갇힌 것처럼 살아가는 엄마를 풀어주었으니 또치가 요물이다. 인생 전반에 걸친 내 태도를 또치를 통해 점검할 수 있었다. 아이로 인해 발이 묶였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또치와 남편이 내 발에 묶인 줄을 끊어준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엄마로, 작가로, 직장인으로, 또 다른 모습들로 살 것이다. 선택의 자유를 만끽하며, 억울함 없이 모든 삶의 모양에 책임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