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다. 제목이 다 말해주는 드라마다. 넷플릭스에서 볼만한 시리즈를 찾다가 이 현실적인 제목을 보는 순간 클릭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면을 꽉 채운 굵고 노란 폰트마저 드라마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자가 있고 대기업에서 부장까지 했으면 남들이 보기에 잘 나간다고 여겨지는 위치다. 그런데 김부장의 이야기는 마냥 장밋빛이 아니다. 오히려 흙빛이다. 남들과 비교하고 염탐하고 허세 부리며 어떻게든 그 자리에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김부장이다. 때로는 치졸해지고 때로는 찌질해진다.
25년간 한 회사에서 참 열심히도 살았다. 나이가 들어 경쟁력이 없어지고 밀려났다고 해서 지난 시간들의 노력과 영광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최선을 다했고 치열했다. 다만, 세상이 그것만으로는 안된다고 냉혹하게 김부장을 내칠 뿐이다.
남편은 이 드라마를 보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남편은 경기도에 자가 있는 중소기업 다니는 차장이다. 지금 회사에서 15년 가까이 일하고 있다. 오랜 시간 한 회사를 다니며 인정받았던 일, 억울했던 일, 승부수를 던졌던 일을 모두 옆에서 지켜봐왔다. 직장인의 고단함이 그대로 녹아있는 장면들에 남편은 공감을 넘어 힘들어했다. 현실에서 외면하고픈 부분까지 모두 다 끄집어내어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다. 힘들다고 하면서도 보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게 나도 마음이 아프다. 경제적으로 어떤 위치이건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건 다 비슷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좋아하면서도 힘들어하는 게 아닐까.
김부장은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리숙하다. 때로는 너무 안일하고 때로는 너무 정직하다. 눈치를 살피며 염탐하는 게 일상이지만 안타깝게도 민첩하게 꾀를 내지는 못하는 타입이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져 꼰대가 되었다. 남들 다 재테크에 비싼 강남 아파트에 투자하는 사이 우직하게 일만 하다 내쳐졌다.
후반부로 갈수록 김부장의 사정은 더 딱하게 흘러간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지방 공장에 발령을 받게 되고 거기서도 사고를 쳐서 쫓겨나게 된다. 사기를 당해 퇴직금을 날리고 공황장애까지 와서 어려움을 겪는다. 25년간 대기업에 다니며 일만 하느라 키워내지 못한 인생의 감각들을 뒤늦게 큰돈을 주고 배우는 셈이다.
그제야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차남으로서 부모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과 인정의 욕구를 떠올려본다. 엄마는 형과 자신에게 바나나를 똑같이 나누어 주지 않았다. 형에게 하나를 더 주었고 형은 자신이 하나를 더 가졌음에도 동생의 바나나를 몰래 뺏어 먹었다. 그에겐 그게 결핍이었고 동시에 원동력이었다. 모든 일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모두 담고 있다. 결국 형보다 좋은 대학, 좋은 회사에 들어가 사회적으로 더 우위의 삶을 살게 된다. 과도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고 그게 곧 가정을 지키는 책임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치열함 때문에 가족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했고 자신조차 되돌아보지 못했다.
김부장은 자신이 받지 못했던 바나나를 하나뿐인 아들에게는 마음껏 사주었다. 그 바나나는 자신이 받지 못했던 전폭적인 지원과 인정이었다. 다만, 바나나의 값어치는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시간이 흘렀고 바나나는 흔해졌다. 아들에게 부족했던 건 바나나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가장 부족했던 바나나를 아들에게 주었다.
힘들 정도로 현실적인 이 드라마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현대인의 삶은 팍팍하다. 쫓기면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게 만든다. 돈을 좇다가 나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냉혹한 세상에 흔들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키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버티고 나아간다. 그게 살아남는 거라고 세상은 가르친다.
김부장의 찌질함, 어리숙함, 치졸함이 나라고 없을까.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감내하며 지난 13년간 패션 업계에서 일해왔다. 정말 비효율적이라 여기면서도 살인적인 스케줄을 모두 해냈다. 브랜드 컨설팅을 위해 중국 출장에서 하루에 비행기를 세 번 탔던 그날의 나는 그저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돈이 많아져서 직업을 바꾼 게 아니다. 어떻게든 가치 있는 일로 돈을 벌기 위해 나 역시 발버둥 치며 지난 시간들의 터널을 지나왔다.
회사에서 잠깐 시간 여유가 생겨 내 책을 읽었다는 남편은 김부장을 보며 느꼈던 감정을 내 글에서도 느꼈다고 한다. 사람이 왜 이렇게 치열하냐는 말을 다른 지인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그때 글에서 그 치열함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나는 늘 치열했고 내 주변 역시 늘 그랬기에 그게 특별히 더 치열한 것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남편이 힘들어하는 이유도 자신이 너무 치열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 앞으로의 삶, 지금의 상황들, 고민들이 늘 대화의 주제다. 집안에 어떤 걱정거리가 생겼을 때도 우리의 결론은 항상 같다. 우리가 더 열심히 살자고 다짐한다. 불안을 이겨내는 방법은 오직 인생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꼼수를 부릴 줄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정면돌파다. 가끔은 이런 열심과 다짐들이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 때도 있지만 동시에 원동력이 된다. 김부장처럼.
인생은 이기고 지고의 게임이 아닌데 세상은 자꾸 비교와 경쟁을 통해 등수를 매긴다. 그 등수에 집착해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들면서 행복을 앗아간다. 나는 이제 그런 등수 게임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열심히 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어쩌면 과거보다 더 치열해졌다. 진짜 내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는 더 강해졌다. 다만 그것이 누군가가 가본 길이 아니라 막막하고 누구나가 다 우러러보는 잘나가는 길이 아닐 뿐이다. 그럼 뭐 어떤가. 누군가에게 포장해서 보여주려고 사는 삶이 아닌데. 나를 지켜보는 사람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내가 내 삶을 지켜보고 있다. 내가 가장 의식하고 신경 써야 할 사람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고점을 찍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며 나라는 사람의 밀도를 높이는 일. 그걸 하기에도 삶은 너무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