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음 한켠에 넣어둔 감정

힘들 때 숨을 고를 수 있도록, 다정함을 예비해두는 일에 대하여

by 주한하루

어린 시절 그림 일기를 발견한 날,

나는 몰랐던 나와 마주했다.


‘내가 이렇게 밝은 애였나?’


그때의 나는

강아지처럼 해맑고,

작은 일에도 신기해하며

하루를 가득 채우던 아이였다.


색연필로 칠한 나비, 뭉툭한 글씨,

그리고 종이 끝에 삐뚤게 붙여놓은 스티커들.

그림 일기 속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훨씬 더 생생했다.


선생님한테 칭찬받아서 자랑하고,

나비를 만져보며 징그러웠다고 썼다가도

멀리서 보니 예뻤다고 고쳐 적던 아이.


엄마가 동생에게 아이스크림을 양보한 걸

“착하다”고 칭찬해줘서

하루 종일 기뻐했던 나.


그 시절의 나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온종일 들떠 있었고,

좋아하는 걸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가슴이 뛰던 아이였다.


그림 한 장, 글 한 줄 사이에

그때의 내가 발랄하게 살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밝고 반짝이던 감정들이

처음 만난 타인처럼 낯설었다.


왜일까.

그 감정들이

사라진 건 아니었을 텐데.


왜 난 그런 날들을 잊었을까?

억울했던 순간은 잘 기억나면서,

그토록 따뜻했던 감정들은

기억의 바깥에서 흐릿하게만 일렁인다.


행복하고 좋은 순간은

기분 좋게 잊혀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슬프고 아픈 기억은

흉터처럼 남는다.


그래서 나는

내 감정을

직접 보관하기로 했다.


조용하고 다정하게,

나중의 내가 꺼내 쓸 수 있도록.


친절한 인사에

따뜻한 음료를 건네받았던 날.


친구와 호빵을 나눠 먹으며

서늘한 바람 속을 걷던 겨울밤.


시험 중 코피가 났지만

끝까지 문제를 풀고

백점을 받았던 순간의 도파민.


벅차게 하루를 살아낸 밤,

기진맥진 누워

“그래도 1인분은 했다.”

조용히 내뱉은 안도의 한숨.


작고 소소했지만,

그 감정들은

내 일상을 살아 있게 만든 순간들이었다.

힘들고 우울할 때,


나는 내가 그런 일상을

누구보다 자주 누려온 사람이란 걸

쉽게 잊는다.


그래서 나는

하루의 끝에

마음에 남은 장면들을 세 장면쯤,

작게 마음속에 접어두었다.


말없이 건넨 눈빛,

누군가의 웃음,

창가에 오래 머물던 햇살 같은 것들.


그 감정들을

내가 잊지 않도록.

그리고 나중에

다시 꺼내 쓸 수 있도록.


그렇게 다정한 기억을 모아두면,

애틋함과 추억이

내 우울을 잠시 감싸준다.


자칫 불안이

미래를 막막하게 할 때도

그 순간의 내가 있었음을 기억하면

조금은 덜 외롭고,

조금은 더 용감해진다.


그렇게

나는 다시 내 하루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감정들은

기록이 아니라,

예비된 다정함이었다.


언젠가

너무 지쳐 감정을 꺼낼 여유조차 없는 날이 오면,

그때의 내가

조용히 숨 고를 수 있도록.


우울에 쉼표를 붙이는 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는,

감정을 미뤄두기보다는

결국 다정하게 보관해둔 채

마주해야 샘솟는다.


그래서 이건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전에 내가 설계해둔 다정함이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그 서랍을 조용히 연다.


그 안에는

내가 차곡차곡 접어둔 감정들이

잠자듯 고요히 머물고 있다.


그 감정들은

아직 쓰이지 않았지만,


나는 안다.


어떤 감정은,

그때는 몰랐지만

나를 살게 했다는 걸

한참 지나서야 깨닫게 된다.

언젠가 다시 꺼내졌을 때,

그 감정은

그때의 나처럼

지금의 나를 다정하게 안아줄 것이다.


내가 설계해 기억한 감정들은,

결국

내가 무너지지 않게 만든 마음이었다.


그리고 혹시 당신도

잊기엔 아까운 감정이 있다면,

지금 잠깐

마음 한켠에 접어두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오늘 느낀 따뜻함이

언젠가의 당신을 구할지도 모르니까요.




8화 명화.jpg 다 써버렸다고 생각한 감정도, 미래의 나를 위한 다정함이 될 수 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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