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하지 않지만 쏟아지던 눈물
"시원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쁘지 않았어요"
메모장에 적어두었던 이 문구는 영화 속 장면이자, 영화를 보고 난 후 나의 감상평 한 줄이었다. 누가 보면 눈에 있는 눈물을 모두 뺀 줄 알았으리라. 하지만 시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통 때문에 다 마신 콜라 컵 속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물기를 빨아들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목이 말랐다. 하도 눈물을 쏟아서.
누군가에게는 별스러울 이야기고 누군가에게는 평범해서 문제라고 인식도 못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이야기고 누군가에게는 평범해서 문제라는 인식도 못하다가 갑자기 박힌 몸 안에 박힌 총알을 발견한 것처럼 쓰리고 아픈 이야기다. 다양한 견해가 나올 수 있는 게 영화의 맛이라고 하지만, 사실 82년생 김지영은 외면하고 있었던 평범한 일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분명 고쳐져야 할 인식이 명확하게 짚어져 있기에 다양한 견해가 나오는 것도 좋지만 인식의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이 생긴 영화다.
최근 동생의 집에 놀러 갔다. 동생은 딸이 너무 예쁘고 귀엽다며 불쑥불쑥 아가를 안고 뽀뽀를 해댄다. 하지만 문득문득 찾아오는 육아의 자괴는 어쩔 수 없다. (물론 우리 제부는 영화 속 공유처럼 아내를 이해하려 하고 같이 육아하려 한다는 점 미리 알려드립니다 솔직히 부럽고요) 왜인지 모를 외로움, 자괴감, 고뇌는 자식 사랑의 부재가 아니다. 사랑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아가로 인해 변화된 삶에 '나 자신'이 없어진다는 걸 발견하는 것이다. 동생은 잠깐 수영을 배웠을 때 시간을 자신을 위해 쓴다는 게 기뻤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수영을 그만두고 동생이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건 '돈을 벌어 가족의 행복을 더 크게 이뤄나가자'라는 측면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나'를 찾아가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일상은 지겨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건 일상의 기준이 '나'로 돌아가고 돈을 벌어 나에게 쓰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쓰기 때문이다. 일상의 주체가 '나'인 것이다. 하지만 일을 포기하고 육아에 전념하는 누군가는 일상의 주체가 누구인지 헷갈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회는 육아에 대해서만은 그 주체가 가족 혹은 자식이어야 한다고, 모성애는 당연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당연함'이 없다는 걸 알아야 개인의 삶은 존중받고, 존중받는 삶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튼튼해진다. 그러니까 최소한 카페에 유모차 끌고 온 엄마들한테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편하게 산다"라는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는 하지 말자. 진짜 뜨거운 커피로 맞을 수가 있고, 뜨거운 커피에 데었다면 왜 데었는지 생각해 볼 것.
가족을 위해 모두가 희생한다. 그 희생은 사랑이라는 힘으로 결속력을 갖고 어떠한 흔들림도 이겨낼 수 있게 해 준다. 이 고통이 누군가에게 몰아치는 건 불공평한 일이다. 사랑도 불균형적으로 느껴지면 결국 깨진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도 그리고 부모와 자식의 사랑도 모두 그렇다. 힘없는 작은 아가를 사랑의 힘으로 키워내는 데 어찌 한 사람만의 힘이 다 감당할 수 있는가? 이 당연한 물음에서 영화는 시작되고 또 끝이 난다.
또한 영화의 초점은 단순히 육아를 전담하는 차원에서만 맞춰져 있진 않다. 다양한 포인트에서 갑자기 불쑥 울컥하고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는데, 그 포인트들은 모두 내가 직접 겪은 에피소드와 닮아있었다. (사실 닮았다고 하기에도 모자랄 정도로 똑같았다. 정말 이걸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겪었단 말이야? 생각은 물론이오 나 말고 이런 것들을 겪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에 충격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이었을 때 횡단보도 봉사활동을 하다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었다. 혼자 외진 횡단보도를 지키는데 어떤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었고 너무 놀라 정말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이후로 선생님께 찾아가 이야기했지만 개선된 바는 없었다. (봉사활동은 당연히 그만두었고, 그 횡단보도는 사람이 오가지도 않아서 누가 지키기도 않았다) 이후에도 '짧은 치마 입으면 위험해'라는 말은 기본이고, 기분 나쁜 스킨십을 모르는 사람에게 당해도 '네가 여지를 준 거 아니야?"란 말도 꽤 들었다. 30대가 되고 나서야 범죄의 예방 주체가 왜 '나'여야만 하며 내가 짧은 치마를 입어서 성추행, 성폭행을 당할 만하고 내가 원치 않는 스킨십의 원인이 왜 당연히 나인 건지 의문을 품었다. 요즘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뭘 봐'라는 눈초리를 보내거나 몰카 의심이 되는 곳에서도 '걸리면 족친다' 혹은 '봐라 루저 **야'라는 생각으로 막 다닌다. 물론 이러한 생각보다는 범죄를 예방하는 분위기, 성범죄의 경각심 등이 퍼지는 게 중요하겠다.
82년생 김지영과 나 자신의 삶이 닮아 보였던 건 영화 속 주인공과 나 모두 3남매에 '아들이 최고, 아들이 결국 부모에게 효도한다'라는 집안 분위기가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스스로 보다는 누군가에게 (큰 누나) 이끌려 개선되는 게 눈에 띄는 남동생의 모습은 소름까지 돋을 정도였다. (남동생 연기자 분, 연기력 wow) 누군가가 아파봐야 아는 문제들, 본인도 겪었고 또 그걸 삼켜낸 상황에선 받아들이는 게 편한 문제 그게 남녀차별이다. '지금이 문제다'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차별의 문제가 사회의 수면 위로 떠오르고 '혐오'의 문제로까지 부딪히기도 하며 변화가 무던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 제목에 왜 '82년생'이 붙여졌는지 조금만 생각해보자. 남녀차별이 태어났을 때부터 인식되어 나도 모르게 "아 난 남자니까, 아 난 여자니까" 말이 튀어나오는 게 80년대생 들이었다. (차별에 민감하게 구는 나조차도, 나도 모르게 '이러면 안 되지'가 불쑥 찾아오고 또 순간 문제로 인식되지 않아 놀랄 때가 있다) 이 시대의 사람들 그리고 이 시대의 사람들을 낳은 사람들은 남녀차별이 일상적이었고 보편적이었고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 차별을 문제로 인식하고 바뀌어 나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나 때는 그랬어'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뭐' '왜 이렇게 민감해'를 생각하기도 혹은 입 밖으로 서슴없이 내뱉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80년대 생 그들의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리고 차별이 보편적으로 흘러가는 일상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잡이다.
사회 내에서 강자와 약자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없는 게 이상하지. 하지만 강자 밑에 약자가 있어야만 하고, 약자의 힘으로 강자의 약점을 건드리며 차별의 아픔이 발생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피라미드는 균형이 쌓여 견고하게 오랜 세월을 무너지지 않았다. 불균형된 부분이 있었다면 그만큼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한다. 사회의 구성도 마찬가지다. 남자와 여자가 같이 살아가는 삶 그리고 그 남자와 여자가 구별은 되되 차별은 되지 않는 삶이어야 사회는 견고해진다. "왜 여자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게 힘든가? 혹은 왜 높은 자리에 남자의 비율이 많은가?" "왜 여자만 육아 휴직을 (보다) 편하게 쓸 수 있는가?" "왜 남자는 육아휴직을 쓰면 승진에서 누락되는가?" 이러한 의문을 품어 본 적 있다면 당신은 불균형을 인식하고 또 바꿔나갈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아지길 기대하며 희망을 항상 생각하려 한다. 희망을 무너뜨리는 기사를 봐도 희망을 기대한다.
리뷰하기 예민하겠다 싶은 영화였는데, 왜 예민해야 하지?라는 생각도 들었다(주인공에 감화하다 보니). 그러다가 이슈가 되는 게 바람직하다 싶어서 써봤다. 이 밖에도 할 말이 참 많고, 떠오르는 장면들도 많다. 자꾸 안을 파고는 영화가 진짜 좋은 영화라는 걸 '82년생 김지영'이 깨닫게 해 주었다. 참 고맙다. (그렇지만 두 번은 못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