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뉴욕

자연을 좋아하는 내가 뉴욕을 걷는 방법

by HyeminMoon




토론토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침내 뉴욕을 가게 되었다. 사실 큰 도시보다 아기자기하고 사람 냄새나는 작은 도시를 편애해 왔기에 미국은 궁금의 대상일 뿐 기대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비행기 표를 끊고 나니 '그래도 미국이기에'하는 기대로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피어슨 국제공항에서 마지막 토론토를 뒤로하고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토론토에서의 시간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실감했다. 누군가는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돌아오고 누군가는 떠나는 설렘으로 채워지는 이 공간에서 나는 다행히 남은 목적지가 있어 동시에 두 감정을 느끼며 조용히 토론토를 뒤로 할 수 있었다. 언젠가 나의 가족이 생긴다면 함께 다시 펼쳐볼 한 페이지처럼.







두 시간 반의 비행 후 JFK 공항에 도착했다. 또 픽업 차로 한 시간 정도 후에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호스텔로 예약을 했는데 미국은 호스텔 스케일도 남달랐다. 5층짜리 건물에 한 층에 룸이 10개는 넘게 존재했고 우리나라 호스텔의 주 숙박객은 젊은 층이라면 이곳은 남녀노소 다양하게 묵고 있었다. 여행을 위해 방문한 사람부터 그곳이 집이 된 사람까지. 밴프에서와는 다르게 짐을 도둑맞을까 좀 더 바짝 긴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캐리어에 자물쇠도 안 잠그고 다녔던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큰 여행들을 거듭하며 깨달은 것은 계획은 계획일 뿐 마음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기에 마음을 편히 먹기 시작한 것이다.


Anyway 토론토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고 미국에 도착했어서 지칠 대로 지쳤었지만 뉴욕에서 주어진 시간은 고작 5일이었기에 또 바로 거리로 나가야만 했다. 뉴욕의 지하철은 듣던 대로 더럽고 다양한 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토론토의 경험이 있어 꽤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어렵다던 뉴욕 지하철도 꽤 잘 타고서 말로만 듣던 타임스퀘어에 도착했다.








한 15분쯤 서 있었을까 관광객과 뉴요커가 뒤섞여 만들어 내는 열기에 곧장 벗어나고 싶었다. 토론토와 어느 정도는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달랐고 존재감이 확실했다. 역시 듣던 대로 천천히 음미하는 도시이기보다는 부딪혀보는 도시라는 걸 깨닫고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단 허기진 배를 채우러 가야만 했다.







타임스퀘어를 빠져나와 나는 본능처럼 소호로 발걸음이 향했다. 소호는 듣던 대로 유럽처럼 꽤 아기자기한 분위기였다. 건물이 낮아지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개성 있는 뉴요커들이 거리마다 있으니 뉴욕에 왔음을 체감했다. 타인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다채롭게 입은 사람들을 자신감에 차 있어 보였고 눈도 즐거웠다.


푸릇푸릇한 나무들과 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거리를 참 예쁘게 만들고 있었는데 뉴욕은 여름에 가야 한다는 말이 공감이 됐던 순간이다. 이마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나도 최대한 뉴요커처럼 걸으려고 노력했다.

그러기엔 고개를 좌우로 한참 살피며 뉴욕 구석구석을 담았지만.







걷다 보니 해가 예쁘게 비추고 있던 빨간 서점을 하나 발견했다. 해외에 나가면 서점 가는 게 이제는 하나의 루틴이 된 것 같다. 사실 그들의 언어로 된 서적을 보기 위함은 아니고 저마다 다른 서점들의 냄새를 맡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책에 빠져있는 손님의 모습을 관찰하는 건 꽤 흥미롭다.







이번 뉴욕 여행에서 가장 기대한 것은 바로 재즈바다. 한창 재즈에 빠져 있을 때라 두 개의 재즈 공연만은 사전에 예약하고 방문했다. 그 첫 경험은 Mezzrow다. 예약을 하고 갔지만 선착순 입장이라 오픈시간에 맞춰가는 걸 추천한다.







혼자 공연을 즐기러 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조금은 어색하게 앉아 공연을 보고 있는데 같이 웨이팅을 했던 옆 테이블 모녀가 먼저 말도 걸어주시고 눈빛을 보내주어 외롭지 않게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나는 아주 외향형이지만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날 때는 꽤나 뚝딱거리는 내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언어가 바뀌니 조금 더 심해졌다. 그래서 그 모녀와도 술의 힘을 빌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캐나다는 다정한 이미지이지만 자본주의의 나라인 미국이라 왠지 사람에 대한 기대가 되진 않았지만 편견이었다. 이 큰 도시에 다양한 이유로 뉴욕에 머무는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 이런 순간들이 주어지면 나는 어떤 역할도, 기대도 없이 그저 '나'로 존재한다.

내가 무엇에 설레는지, 어떤 분위기를 좋아하는지, 누구에게 마음이 열리는지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낯선 환경에서 나를 발견하는 순간은 늘 짜릿하고 혼자 여행을 거듭하는 이유가 된다.


방구석 유튜브로 듣던 평면적인 재즈 공연과는 확연히 달랐다. 모두가 쉽게 스며들 수 있는 명랑한 재즈였다.

Mezzrow의 낮은 천장 아래에서 나는 약간의 어색함과 함께 조금 들뜬 채로 첫 재즈 공연을 맞이했다. 평소처럼 관객이기보다 막 재즈 세계에 입문한 사람처럼 조용히 설렜던 것 같다.







둘째 날 아침 9시부터 준비해서 간 곳은 바로 Bryant Park.

빌딩 숲 사이에 끼워 넣은 단순한 공원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 도시가 남겨둬야 했던 여백의 간절함이 느껴졌다랄까. 뉴욕의 출근길을 직접 걸어보니 그 공간이 뉴요커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더 잘 알 것 같았다. 고정 벤치가 아닌 각자 원하는 자리와 각도로 옮길 수 있도록 둔 의자와 테이블도 그저 들렀다 가는 곳이 아닌 머물다 가는 장면을 만들고 있어 인상 깊었다. 햇빛을 따라 나도 초록 벤치를 옮겨 앉아 생기 가득한 뉴욕의 나무를 한참 구경했다.








근처 베이글샵에서 고대하던 연어베이글 샌드위치를 포장해서 커피랑 즐겨줬다. 반쪽을 다 먹기도 전에 배가 부르고 물려서 반쪽은 그대로 가방에 넣어주었다. 잠시 북창동순두부가 간절했다.







미국에서도 계속되는 커피 기행 첫 번째 목적지는 La Cabra.

중간에 ㅁ자로 짜인 바 중심의 구조가 먼저 눈에 띄었다. 모든 기물이 바 아래에 정돈되어 있고 오로지 추출에 집중하게 만든 구조가 참 좋았다. 손님들은 다들 일행과의 대화 중에도 눈은 바에 집중 됐던 것 같다. 한동안 경비를 모으느라 팀홀튼만 마시다가 라카브라에 온 상태였던지라 아주 기대가 됐다. 이미 검증된 브랜드였기에 맛은 둘째치고 그저 라카브라 뉴욕 매장에 앉아있는 내 모습에 한껏 취해있었던 것 같다.







4일 내내 기승부리던 뉴욕의 여름이다. 아무리 뚜벅이가 익숙다하지만 체감 40도가 넘는 뉴욕의 거리를 하루 2만 보 이상 걷기란 쉽지 않았다. 땀을 흘린다는 표현이 아니라 싼다는 표현이 맞았다. 덕분에 옷도 화장도 가벼워지고 관광객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사실 여행 추구미인 것이다.






기대했던 빈티지샵은 실패로 돌아갔다. 뉴욕에서 쇼핑할 거라고 토론토에서 그렇게 아꼈는데 빈티지 쇼핑은 아직 어렵게 느껴졌다. 사실 토론토에 있으면서 손에 집히는 대로 옷을 입고 다니다 보니 단벌신사의 삶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해외에 나와있으면서 그 시선에서 꽤나 자유로워졌다. 가장 쉽게 느껴진 게 옷이었고 생각보다 큰 해방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해 질 녘 Little Island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선셋을 보는 것까지는 계획이 아니었는데 타이밍이 맞는 거 보니 계획이 생각보다 구체적이었나 보다. 허드슨강 위에 떠 있던 Little Island는 브라이언트 파크랑은 다르게 묘하게 고립된 느낌도 줬다. 뉴욕시티 한복판에서 언덕을 오르고 강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독특했다. 이곳만큼 그 대비가 극명한 곳은 드물기에 모든 장면이 선명하게 남았다.








길게 늘어진 High Line에서 또 한 번 선셋을 바라봤다. 도시의 중간층에서 내려다본 뉴욕은, 거리에서 올려볼 때보다 덜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하루 종일 구글맵에 의지해 다녔더니 진절머리가나 하이라인만큼은 그냥 걷기로 했다. 도시를 둘러볼 때 나는 건물보다 사람을 오래 바라보는 습관이 있는데 그 도시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가 더 궁금한가 보다. 하이라인을 걷던 중, 한 벤치에 앉아 선셋이 비친 빌딩을 그리고 있는 청년을 발견했다. 그에겐 특별하지 않을 평범한 저녁 루틴이겠지만 잠시 옆에서 가만히 구경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특별했다.


한국에서는 멈춰있는 게 어쩐지 흐름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유를 드러내는 방식이야 다양하고 많겠지만 저런 모습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도시가 조금은 부러웠던 것 같다.








뉴욕의 지하철은 거칠지만 살아있는 공간이라고 들었다. 역 입구로 내려가면 퀘퀘하고 뜨거운 공기가 내 숨을 턱 하고 막아대서 힘들었지만 다양한 뉴욕인들을 구경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에 흥분되기도 했다. 일부러 버스킹 소리를 따라가기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돈 주고 본 재즈공연 보다도 더 짜릿했다. 그저 더럽다고 표현하기엔 뉴욕에서 가장 살아있는 공간 중 하나이다.








두 번째 커피기행 목적지는 브루클린 Bushwick이라는 동네 끝에 위치하고 있었던 Sey Coffee. 관광 명소에 위치한 게 아니라 브루클린 골목에 꽤나 뜬금없이 위치해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오래된 창고를 개조한 듯 미니멀하면서도 곳곳에 걸린 식물들이 생기를 더해주는 공간이었다. 매장 한가운데에 천장에 창이 나있었는데 전등 없이도 충분히 자연광을 떨어뜨려 분위기를 내는 방식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내가 괜히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공간에 대해 생각해 보면 따뜻함과 차가움이 적당히 공존하고 장식보다는 구조와 빛이 중심이 되는 곳인데 그런 점에서 Sey Coffee는 내 취향과 정확히 닿아있었다. 두 잔의 커피를 마시며 내가 어떤 공간을 좋아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곳이었다.








하루 종일 갈증에 시달려 마시고 마시는 뉴욕 여행 중에 말차 레몬 소다는 강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선 아직 '말차 붐'이 본격적으로 오기 전이었다. 이미 토론토와 뉴욕에서는 말차 음료가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었던 메뉴였다. 텁텁한 느낌이 싫어서 음료는 자주 사 먹진 않는 편인데 갈증을 내려주는 데는 이게 최고다. 정확히 1년 후쯤부터 한국에도 말차 음료가 다양하게 생겨났는데 아직 뉴욕에서 마셨던 저 레몬 말차 소다를 대체할 곳을 찾지 못했다. 그날의 분위기와 나의 상태가 섞여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카페 소비가 줄어들 기미가 없는 한국에서, 커피만큼이나 베버리지의 존재감도 커지고 있다. 처음으로 베버리지에 대해서도 폭넓게 생각하고 나아가 '무엇을 팔 것인가'에 대한 시선을 조금 넓혀준 계기였다.








1시간이 걸려 나온 무자비하게 짠 파스타로 저녁을 해결하고는 기분이 상한 채로 두 번째 재즈 공연을 위해 Village Vanguard로 향했다. 무려 1935년에 문을 연 전설적인 재즈 클럽에서의 공연이라니. 운이 좋게도 피아노 바로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파스타로 인해 언짢았던 기분이 덕분에 환기 됐다. 화려하지 않고 세월이 묻은 조명과 벽은 재즈 역사에서 상징적인 곳임을 보여줬다. 아 그래서 맥주 대신 왠지 마티니를 마셔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날의 공연은 피아니스트 Bill Charlap가 이끄는 Bill Charlap Trio였다. 연배가 있어 보이는 연주자들이 등장하니 그들의 호흡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메즈로우에서 들었던 경쾌한 재즈와는 완전 다른 미국의 스탠다드 재즈를 들을 수가 있었다. 무대와 관객과의 사이 거리가 거의 없어서 건반을 누르는 소리, 주고받는 눈빛 하나하나까지 볼 수가 있었고 촬영도 불가한 덕분에 그들의 숨소리까지도 다 놓칠 수 없게 만들었다.







마지막 날의 아침은 Central Park로 맞이했다. 숙소에서 걸어서 고작 30분 거리였는데 마지막날에서야 온 게 아쉬웠다. 머무는 내내 화창했던 날씨 덕에 감사하게도 여름의 센트럴 파크를 남부럽게 즐길 수 있었다. 구글맵 없이 걸어도 상관없이 푸르고 아름다웠다. 각자의 방식으로 쉼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150년이 지나도록 도시인들의 정신적, 육체적 안식처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시간이 없는 나머지 미술관은 MOMA 한 군데만 방문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그 안에서 작품과, 감상하는 사람, 공간의 에너지를 보는 게 사실 더 즐거웠던 것 같다.






센트럴파크를 벗어나 Summit 전망대로 가기 위해 다시 빌딩 사이를 거닐자니 어안이 벙벙했다. 올라와서 바라본 뉴욕은 더욱 밀도 있어 보였다. 사실 너무 많은 사람들과 사방이 거울로 된 공간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올라온 길로 내려가려고 했지만 정상까지 올라가야 내려올 수 있는 구조였기에 버거웠던 경험이었다고 한다.







마지막 날 저녁을 위해 차이나타운 거리로 향했다. 차이나 타운이라고 해서 상상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관광지라기보다는 낮과 밤이 모두 활기찬 커뮤니티의 중심지 느낌이 강했다. 나는 느낌이 가는 곳으로 바로 자리를 잡고는 와인을 끝내주게 마셔주었다. 아무래도 전망대나 미술관보다는 현지인의 생활과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에서 그들을 구경하는 것이 좀 더 끌린다.


브루클린 브릿지를 보러 가려던 것도 잊은 채 나는 그 동네에 스며들어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었다. 특별할 건 없었지만 브루클린 브릿지를 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없을 만큼 완벽했던 마지막 날의 일정이었다. 평소 직감을 믿는 편인데 그날 밤의 직감은 뉴욕에서의 최고로 생생한 순간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도시를 포기할 수는 없는 사람이지만 큰 도시 속에서도 작고, 사람 냄새나는 공간을 주로 찾아다녔다. 자연과 함께할 때 좀 더 마음이 편해지고, 그런 순간에 내가 누구인지를 더 잘 알게 되었지만 뉴욕에서도 나만의 시선으로 자연과, 사람, 공간을 골고루 느끼며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을 잘 선택한 것 같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이 있듯 좋은 공간을 마주할 때면 그곳에서의 삶을 한 번쯤 상상하곤 했다. 듣던 대로 복잡하고 빽빽한 도시라 모든 것을 한눈에 보고 느낄 새가 없어 아쉬움도 있지만 그 또한 뉴욕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푸릇한 여름의 뉴욕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 감사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