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프를 아시나요

케이크 대신 설산을 마주하다.

by HyeminMoon



외노자의 삶을 사느라 토론토를 벗어나보지 못했던 나는 26번째 생일은 토론토를 벗어나 또 한 번 온전히 혼 자만의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다. 그렇게 토론토에서 떠나는 첫 여행지로 단풍으로 더욱 유명한 몬트리올이나 자연과 더 가까운 밴쿠버 보다는 더 광활한 대자연을 느낄 수 있는 밴프로 정했다.









토론토에서 비행기로 또 한 번의 이동을 한다는 게 대구에서 제주도 가는 것 마냥 설렜다. 평소 지니고 다니지도 않던 보조배터리와 애플워치까지 풀 충전하며 또 다른 설렘으로 전 날 잠에 들었다.


입국 이후에 다시 찾은 피어슨 공항이 꽤 익숙했다. 이륙 후 비행기 옆 좌석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하시길래 따라 읽었다. 할아버지는 착륙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고 나는 책을 펼친 지 30분 만에 덮었다. 아무래도 어린 나는 잠이 많으니까요..







캘거리 공항에 도착해 예약했던 픽업 차량을 타고 2시간가량 더 이동을 해야 했다. 밴프에 가까워지기 시작하니 보이는 풍경들에 벌써 카메라를 켜 찍어댔다. 잠자리엔 딱히 예민하진 않아 사람구경도 할 겸 여행을 가면 호스텔에 묵곤 한다. 어떤 사람들과 묵을지 걱정 반 기대반으로 짐을 풀어두고 또 곧장 밴프를 마주하기로 한다.







밴프의 다운타운은 다운타운이라고 하기엔 정말 자그마하다. 골목으로 빠지면 금방 조용해지고 사람보다 산이 더 크게 느껴져 덩달아 차분해졌다.






밴프 첫 일정은 커피로 목을 축이고 동네 뒷산을 올라보기로 했다. 밴프는 큰 계획 없이 그저 자연에 스며들길 원했다. 곧게 뻗어있던 Tunnel Mountain으로 가는 길은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자꾸만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노래도 없이 아무도 없는 길을 씩씩하게 걸었다. 평일 대낮인데 다운타운을 조금 벗어난 거리에 사람이 없는 게 낯설기만 했다.


밴프에 거주하는 주민은 약 9000명인데 매년 이 마을을 찾는 사람은 4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인생 최고일 풍경들을 매일 마주하는 주민들이 너무 부러울 뿐,, 토론토 이전에 밴프를 알았더라면 아마 캘거리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30-40분 정도 올랐을까 정상은 금방이었다. 겨우 동네 뒷산의 뷰가 이 정도라니. 뒤로 보이는 보우강은 날이 흐렸어도 눈이 부실만큼 푸르렀다. 배고픔도 잊은 채 밴프 맛보기에 정신 팔려있다 하산하니 그제야 미친 듯이 배가 고팠다.







일단 눈에 보이는 곳으로 들어와 맥주를 시켰다. 자고로 맥주는 저렇게 머슴들이 마실 것만 같은 맥주잔이 좋다. 전생에 뭐였는지 저런 것에만 설레는 내가 가끔 어이없다. 테라스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니 허기를 달래랴 뷰 구경하랴 바쁜 채로 밴프에서의 첫끼를 해결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평온하고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마치 트루먼쇼 같았다. 나도 내내 미소를 머금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다행히 성수기는 아니었어서 관광객이 차고 넘치진 않아 고즈넉한 밴프를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괜히 곰이나 엘크, 순록이 나올까 기대하며 걷는 것도 이곳에서만 가능한 것이라 묘미다. (못 보고 왔지만,,) 아쉬운 마음을 숙소 앞에서 맥주로 비워내고서 첫날을 마무리했다. 혼자 여행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먹기보단 마시기 위주가 된다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만큼은 사람이 그렇게 그립다.








둘째 날 아침이 얼른 밝기를 바라며 일찍이 잠에 들었다. 이른 아침 셔틀버스를 타고 Lake Louise로 향한다.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어 들어가자마자 마주한 풍경은 너무 맑아서 말을 아끼게 됐다.







호수는 잠시 뒤로하고 Agnes Tea House까지 올라보기로 했다. Tunnel Mountain 마냥 가벼운 트래킹일 줄 알았는데 왕복 3시간이 걸리는 꽤 난이도가 있는 코스였다. 뒤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되돌아갈 순 없었다.


한국의 반대편에서 록키산맥을 따라 트래킹 하는 내 모습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그림 같은 풍경과 함께 혼자 걸으니 평소 등산을 좋아하는 아빠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해외여행 한 번 안 가본, 늘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보시며 굳이 비행기 타고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고 웃으며 말씀하시던 아빠다.

아빠께도 눈이 쌓인 록키산맥을 보여드릴 수 있는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정상엔 눈이 다 녹지 않고 어느 정도 남아있었다. Agnes Tea House만 믿고 아무것도 안 먹고 물도 없이 올라갔는데 떡하니 닫혀 있었다. 숨을 고르며 저 빙하물을 마실까 몇 번이나 고민했다. 정상은 호수보다 더 고요했고 그새 하늘은 아침보다 더 맑아지고 있었다.







왕복 3시간을 오르고 내리는 동안 누군가에게 맞출 필요도, 따를 방향도 없이 온전히 내 속도를 따라갔다.

숨이 차더라도 단순한 이 반복 속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참 편했다.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거창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려오니 시간이 고여있는 것처럼 호수는 잔잔하고 더 푸르렀다. 하루 종일 바라보고 있으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라보고 있으니 내내 복잡했던 생각도 함께 잦아졌다. 이걸 하루만 볼 수 있다는 게 서럽도록 아쉬웠다. 샌드위치랑 커피로 대충 허기를 달래고는 호수를 바라보며 벤치에 앉았는데, 3시간의 트래킹 때문인지 솔솔 졸리더니 코까지 골며 잤다. 눈을 떴을 때도 호수는 여전히 잔잔했다.







호수 앞에는 다양한 나라의 관광객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기념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남이 찍어주는 게 늘 어색했던 나는 그저 눈에만 담자고 생각을 하다가 결국 돌아가기 30분 전에 다급히 한국인 관광객을 붙잡고서 사진을 부탁했다. 사진은 한국인이 잘 찍으니까요.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셔틀버스에 몸을 싣기 전까지 돌아보고 돌아보며 최대한 눈에 담았다. 챙겨 온 신라면으로 둘째 날 마지막 끼니를 만족스럽게 해결했다. 이 날이 사실은 내 생일이었는데, 해외로 떠나오니 그 몇 해 전 보다 축하 메시지가 적었지만 축하와 케이크 대신 설산을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잠에 들기 전 숙소 창문 밖으로 보이는 선셋을 보며 씩씩하게 자축했다. 생일 선물로 눈 쌓인 록키산맥을 마주하는 날이 살면서 또 있을까?







밴프의 카페는 무려 6시 반에 연다. 이런 곳이라면 미라클 모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오전 6시에도 사람이 가득한 이곳에서 활기찬 에너지를 받으며 마지막 날을 시작했다. 오전부터 움직이면 정신이 맑고 일의 효율이 올라가는 나로서 하루를 일찍 여는 이곳의 사람들의 생활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마지막 날은 자전거를 타고 근교를 돌아다닐까 했는데 렌털샵이 많지도 않고 예약을 따로 안 한 나머지 그냥 뚜벅이가 되기로 했다. 면허가 없어서 늘 뚜벅이였던 나는 실은 걷는 게 더 익숙했다. 걸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거늘. 구글맵에만 의존한 채 Vermillion Lake로 향했다.






가다 보니 휴대폰도 터지지 않아 표지판만을 의지한 채 걸어가야 했다. 생각보다도 더 친절했던 표지판 덕에 길을 잃지 않고 찾아갈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걸어가던 중에 오래된 데크가 있어 멈춰 섰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뷰가 눈앞에 펼쳐지니 시간이 멈춘 듯했다. 답답했던 신발도 벗어보고 가만히 앉아 호수 표면에 비친 런들 산과 윤슬을 한참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얼굴을 감싸며 솔솔 불어오는 바람도 참 좋았다.







숲에 있던 쓰러져 있는 나무도, 무작위로 자라난 풀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숲길을 걷는다는 건 신비하고 생소한 경험이었지만 내 모든 감각에 집중할 수 있어 참 귀중한 시간이었다.







가벼운 트래킹과 산책이라지만 이틀 동안 부지런히 걸어 다녔더니 몸에 피로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이때 밴프에서만 꼭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온천이다. 긴 산책 후에, 1886년부터 운영 중인 Banff Upper Springs를 찾았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 온천을 즐긴다니 문화 차이적인 부분에서 조금 긴장됐던 것 같다. 사실 5월이라 날이 꽤 더워서 목까지 몸을 담그고서 앉아있자니 숨이 막혀왔다. 그래도 덕분에 잠시 몸과 정신이 말랑말랑해졌다.







아침부터 구경하느라 아무것도 못 먹고 온천까지 하고 나왔더니 배가 고파 눈이 돌아간 상황이다.

마지막 날이니 먹고픈 것 다 먹고 왕창 마셔주었다.







그렇게 뚜벅이의 짧은 밴프여행이 끝이 났다. 명소를 다 둘러보진 못해 아쉬움이 남았지만 또 방문할 이유를 남겨둔 것이라 해둔다. 밴프를 내 발로 거닐 수 있던 것이 혼자 했던 어떤 여행 보다도 의미 있었다. 20대 초반에 불안을 떨쳐 내기 위해서 했던 제주도 여행이 떠올랐다. 어린 내가 쉽게 떠날 수 있는 곳은 제주도밖에 없다고 생각해 매년 떠났었는데 그 당시엔 밴프를 홀로 여행하는 나의 모습은 상상도 못 했다.



고독한 순간들을 마주할수록 나 자신과 함께하는 것이 진정으로 좋아졌다. 홀로 하는 여행은 가끔 삶에서 오는 모욕이나 굴욕이 우리 감정의 중요하지 않은 주변에만 머물도록 해주며 현실로 돌아왔을 때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게끔 해준다. 불안을 뒤로하고 당장 떠날 수 있는 어른이 되는 게 어쩌면 꿈이었던 것 같다.


부지런히 떠나 내가 나를 위해 준비한 26번째의 생일은 밴프라서 더욱 오래 기억된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가장 또렷한 장면을 뽑으라면 밴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밴프를 아셨다면,, 여러분이 할 일을 아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