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②』

82세 노교장의 낯선 세상 생존기

by 느릅내

Chapter 2 QR코드의 늪


1. 유리 요새 무언의 거부

겨울 햇살은 빌딩의 외벽 유리창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카롭고 시린 빛 어디에도 사람을 녹일 만한 온기는 없었다. 82세 김도헌은 거대한 유리 요새 같은 '미래 빌딩' 로비 앞에 멈춰 섰다.

은퇴한 동료 교장과의 점심 약속을 위해 집을 나설 때만 해도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정갈하게 닦인 구두 굽이 보도블록을 때릴 때마다 규칙적인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평생 시간을 어겨본 적 없는 그였기에, 약속 시간 20분 전에 도착한 스스로가 대견했다.

과거의 도헌이라면 건물 안으로 거침없이 발을 들였을 터였다. 예전 같으면 묵직한 황동 문 손잡이를 잡고 어깨의 힘을 실어 문을 밀었을 것이다. 로비의 웅장한 울림을 즐기며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것이 그가 아는 유일한 입장 방식이었다.

그 시절 문은 사람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정직하고 물리적인 실체였다. 누군가 문을 열어주면 가벼운 목례를 나누고, 무거운 문을 붙잡아 뒷사람을 배려하던 온기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 도헌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그런 정겨운 아날로그의 문이 아니었다.

그의 눈높이에 놓인 차갑고 평평한 태블릿 PC 한 대가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기계 앞에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말없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표정에는 익숙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주머니에서 익숙하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환하게 빛나는 화면을 기계에 갖다 댔다. 그러면 기계는 무심한 비프음과 함께 보이지 않는 빗장을 스르르 풀었다. 문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 물리적인 저항감은 이제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사람의 손에서 느껴지던 무게감과 눈 맞춤의 온기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대신 짧은 인식의 순간이 입장을 결정하고 있었다. 견고해 보이던 유리문이 소리 없이 열리는 광경을 도헌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지켜보았다.

그의 손에는 수십 년 세월이 묻은 낡은 가죽 지갑과 정갈하게 접힌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 하이테크 요새에 입성하는 데 필요한 '디지털 열쇠'는 그의 손에 없었다. 그는 주춤거리며 입구 쪽으로 한 발짝,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때 제복을 입은 보안 요원이 기계보다 더 기계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렸다. 마치 성벽을 넘으려는 침입자를 발견한 수문장처럼 단호하고 위압적인 기세였다.

“어르신, 그냥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옆에 기계 쓰셔야 해요.”

도헌은 당황하여 걸음을 멈추고 헛기침을 내뱉으며 뒤로 주춤거렸다. 요원은 귀찮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작은 태블릿 기계를 가리켰다.

“거기 패드에 체크인하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QR코드 찍으셔야 문 열려요.”

도헌은 움찔하며 고개를 깊게 끄덕이며 연신 뒷걸음질 쳤다.

“아, 예. 알겠습니다. 이게 그 입구에서 하는 절차인 모양이구먼. 바로 해보겠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검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기계는 설명 없이 검은 화면을 유지한 채 도헌의 숨통을 조용히 압박하고 있었다.


2. 빛나는 사각형 안의 미궁

도헌은 마른침을 삼키며 양복 안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냈다. 지난번 손녀가 '할아버지 혹시 모르니 깔아둔다'라며 설치해준 앱의 이름이 무엇이었던가.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화면 위를 바쁘게 움직이는 형형색색의 아이콘들을 더듬기 시작했다.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수십 년간 수천 명의 제자들 앞에서 분필을 잡고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논하던 당당한 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손은 손바닥만 한 유리판 위에서 출구를 찾지 못해 비참하게 헤매고 있었다.

어렵사리 앱을 찾아 실행시켰지만, 화면은 그의 절실한 기대를 저버리고, 묵묵부답이었다. 로그인을 하라는 문구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창이 번갈아 나타나며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것은 마치 도헌의 무지를 비웃으며 조롱하는 디지털 세상의 유령처럼 느껴졌다.

기억나지 않는 비밀번호의 조합 앞에서 도헌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노랗게 변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멀리 서 있는 보안 요원을 향해 절박한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저, 여보게. 이게 잘 안 되는 데 좀 도와줄 수 있겠나?”

도헌은 평생 지켜온 교장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 목소리에 힘을 주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원은 한숨을 내쉬며 다가와 도헌의 휴대폰을 뺏다시피 가져가 거칠게 손가락을 휘둘렀다.

그의 손가락은 마치 마법이라도 부리는 듯 화면 위를 눈부시게 날아다녔다. 그의 눈에는 이 복잡한 정보의 나열이 너무나 당연하고 투명한 것처럼 보였다. 몇 번의 터치와 슬라이드 끝에 화면에는 기괴한 검은 점들의 집합체가 나타났다.

“자, 여기 나왔네요. 이걸 기계 빨간 불빛 나오는 곳에 대세요.”

요원은 휴대폰을 돌려주며 마치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뒤도 안 돌아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도헌은 요원이 건네준 휴대폰을 깨지기 쉬운 보물처럼 두 손으로 소중히 받쳐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계 앞으로 다가갔으나, 기계는 여전히 냉담했다.

코드를 들이대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기대하던 신호음은 로비를 울리지 않았다. 도헌의 등 뒤로는 어느새 정장을 입은 젊은이들의 긴 대기 줄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등에 박히는 느낌에 도헌은 목덜미가 화끈거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뒤에서 기다리던 젊은 남자가 시계를 보며 짧고 날카로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 소리는 고요한 로비에 거대한 바위가 떨어지는 것처럼 무겁게 울려 퍼졌다. 도헌은 죄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다시 한번 휴대폰을 기계에 비췄다.

너무 가까웠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 멀었던 것일까. 기계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도헌은 휴대폰을 든 팔을 앞뒤로 조금씩 눈치를 보며 애처롭게 움직여 보았다. 그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투명한 유리문은 굳게 닫힌 채 그를 거부했다.

과거 교장 시절, 그는 전교생 앞에서 한 시간 동안 훈화 말씀을 늘어놓곤 했다. 그때는 나의 말 한마디가 곧 학교의 법이었고, 모든 아이가 나의 입술 끝을 주목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고작 이 작은 사각형 하나를 설득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세상이 나를 향해 “당신은 이제 쓸모없는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선언하는 것만 같았다. 손가락 하나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이 빠르고 매정한 디지털의 세상. 그 속에서 나는 작동하지 않는 낡은 태엽 시계처럼 구석으로 버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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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천 장의 상장을 건네던 손의 무력감

도헌의 시야가 점점 흐릿해지며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기계의 빨간 불빛이 핏발 선 붉은 눈동자처럼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나를 감시하고, 나를 거부하며, 끝내 밖으로 밀어내려는 냉혹한 수문장의 눈빛이었다.

손바닥에는 축축하게 땀이 배어 나와 휴대폰이 자꾸만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려 했다. 평생 약속 시간을 어겨본 적 없던 그가, 이제는 문턱 하나를 넘지 못해 고립되었다. 시간은 이미 약속한 정오를 지나 1분이, 다시 2분이 무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동료 교장이 식당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문밖을 내다보고 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찢어졌다. 그는 단 한 번도 남을 기다리게 한 적 없는 철저한 사람이었기에 자괴감은 더욱 뼈아팠다. 등 뒤의 줄은 더욱 길어졌고, 로비의 공기는 압박감으로 가득 찼다.

“어르신, 좀 빨리해주시겠어요? 저희 다 바쁜 사람들이라 좀 곤란해서요.”

뒤에서 기다리던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시 한번 도헌을 채찍질했다. 도헌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깊게 숙이며 갈라진 목소리로 비굴하게 사과했다.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내가 이런 게 영 서툴러서... 금방 다시 해보겠네.”

교장 시절, 누구보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복도를 사열하던 그의 모습은 지워졌다. 한마디 호령에 전교생을 일제히 정지시키던 그 카리스마는 이제 흔적조차 없었다. 그는 이제 빛나는 사각형 미궁 속에 갇혀 구원을 구걸하는 초라한 노인일 뿐이었다.

그의 마디 굵은 손가락은 더 이상 세상을 지휘하는 지휘봉이 아니었다. 그저 조그만 유리판 위에서 벌벌 떨며 제발 통과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도구였다. 그 무력감이 도헌의 심장을 송곳처럼 찔러 깊고 푸른 상처를 내고 있었다.

“할아버지, 제가 좀 봐 드릴까요?”

그때였다.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한 여학생이 천사처럼 그에게 다가왔다.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학생은 도헌의 창백해진 안색과 떨리는 손을 이미 알아챈 모양이었다. 여학생의 목소리는 로비의 차가운 기계음보다 백 배는 더 따뜻한 위로가 되어 들려왔다.

여학생은 도헌의 손에서 미끄러질 듯 위태롭게 들려 있던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도헌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거칠고 주름진 손을 등 뒤로 감추고 싶었다. 자신의 노쇠함이 그 아이의 생기 넘치고 매끄러운 피부와 대비되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아, 할아버지. 화면 밝기가 너무 어두워서 기계가 코드를 못 읽는 거예요.”

학생은 능숙하게 화면 위쪽을 쓱 내리더니 설정 바를 오른쪽 끝으로 밀었다. 그리고는 코드를 다시 선명하게 불러오며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카메라가 이 어두운 화면 속 코드를 인식 못 했던 거예요. 자, 이제 보세요.”

여학생의 손가락이 단 두 번 가볍게 움직이자 화면이 순식간에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해졌다. 학생은 밝아진 화면을 기계의 붉은 눈 아래로 마치 마법을 부리듯 자신 있게 가져갔다.

“이렇게 밝게 올리고 갖다 대면 바로 되거든요. 걱정하지 마세요!”

기계에 갖다 대자마자 경쾌한 비프음이 로비의 높은 천장까지 울려 퍼졌다. 마치 지금까지의 사투가 한 편의 우스운 농담이었다는 듯, 기계는 너무나 쉽게 길을 열어주었다.


4. 무너진 자존심의 둑

드디어 문이 열렸지만, 도헌은 힘이 빠졌다. 5분의 사투가 무색하게 기계는 단 2초 만에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부드럽게 열리는 유리문 너머로 낯설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 보였다.

도헌에게 그 소리는 새로운 길이 열리는 축복의 소리가 아니었다. 자신이 평생 믿고 살아왔던 세상의 문이 닫히는 마지막 작별 소리였다. 기계의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견고하던 유리문은 소리 없이 양옆으로 비켜서서 그를 비웃었다.

“자, 이제 되셨어요. 들어가시면 돼요. 다음부터는 화면 밝기를 꼭 확인하세요!”

여학생은 휴대폰을 돌려주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 예쁜 미소를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는 바람처럼 로비 안으로 사라져 자기만의 빠른 세상으로 달려갔다. 도헌은 멀어지는 학생의 뒷모습에 대고 연신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맙네, 학생. 나 같은 사람 때문에 고생이 많았어. 정말 고마워.”

학생의 배려 덕분에 요새의 문은 열렸지만, 도헌은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안도감보다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게 올라오는 둔탁한 통증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 통증은 목구멍을 꽉 막아 세우고 그의 늙은 숨통을 조여오는 무거운 자괴감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창피함'과는 그 결이 완전히 다른 종류의 근원적인 고통이었다. 평생 남을 가르치고 바른길로 인도해온 교육자로서 지켜온 마지막 자긍심이었다.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그의 인생 최후의 보루였다.

그런 그에게 오늘 겪은 일은 그 보루가 처참하게 짓밟힌 사건이었다. 학생의 친절은 분명 고마웠지만, 동시에 그는 잔인한 거부의 진실을 보았다. 자신이 이제 혼자서는 문 하나조차 열 수 없는 '거대한 무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은 도헌의 가슴을 정면으로 때렸다. 그는 자신이 이제는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곁으로 밀려난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열린 유리문 너머의 세상이 왠지 나를 비웃는 거대한 함정처럼 기괴해 보였다.

도헌은 납덩이를 매단 듯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사람들 틈에 끼어 위층으로 올라가면서도 그의 시선은 오직 자신의 구두 끝만을 향했다.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존재를 투명하게 지워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엘리베이터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었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와 깊게 패인 주름,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는 이 모습이 지금의 세상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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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데이터 성벽 앞의 망설임

간신히 약속 장소인 식당 층에 도달했지만, 시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복도 끝에 자리한 식당 안은 생각보다 훨씬 조용했다. 손님들은 삼삼오오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주문을 받으러 다니는 직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각자의 식탁 위에는 작은 키오스크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도, 주문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 화면을 두드렸다. 그 모습은 마치 식탁마다 작은 창구가 하나씩 설치된 것처럼 보였다.

도헌은 빈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키오스크를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메뉴 사진이 화려하게 넘겨지고 있었고, 가격과 옵션, 추천 표시가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가 이내 멈췄다. 아까 로비에서 겪은 일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다. 또다시 화면을 잘못 건드려 엉뚱한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다. 옆 테이블에서는 젊은 부부가 능숙하게 주문을 마치고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조용한 진동음과 함께 통로 끝에서 작은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접시를 실은 낮은 AI 로봇이 사람들 사이를 부드럽게 지나 식탁 앞으로 다가왔다. 로봇은 정확히 멈춰 서더니 기계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주문하신 음식이 도착했습니다.”

도헌은 순간적으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로봇은 그를 바라보지도, 기다리지도 않았다. 임무를 끝낸 뒤 다시 방향을 틀어 조용히 사라졌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도헌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사람이 건네던 “맛있게 드세요”라는 말 한마디가 사라진 자리에서, 음식은 더 정확하고 더 빠르게 도착하고 있었다. 편리함은 분명 눈앞에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 편리함에 손을 얹지 못한 채 식탁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순간 도헌은 깨달았다. 문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이 자리의 주인이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술은 그를 안으로 들였지만, 여전히 말 걸지 않는 거리에서 그를 시험하고 있었다.


6. 편리함이 세운 차가운 데이터의 성벽

세상은 점점 더 빠르고 편리해진다고 모든 광고와 매체가 목소리를 높여 찬양한다. 하지만 그 편리함이라는 이름의 이면은 도헌의 눈앞에 투명한 장벽을 세우고 있었다. 그 벽은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온몸으로 밀어서 부술 수도 없는 기이한 장벽이었다.

오직 0과 1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데이터의 성벽이었다. 도헌은 그 성벽 밖으로 소리 없이 추방된 디지털 유민이 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신기술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분 제도가 그를 보이지 않는 하층민으로 낙인찍고 있었다.

약속 장소인 식당 저 멀리서 동료 교장이 반갑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도헌은 억지로 얼굴 근육을 끌어올려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로비의 그 차가운 태블릿 PC 앞에 꽁꽁 묶여 있었다.

빛과 속도의 시대에서 그는 자신이 설 자리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평생 일궈오고 사랑했던 세상이 자신을 거부하는 풍경을 지켜보는 것은 고문이었다. 그것은 누구의 명백한 잘못도 아니었기에 더욱 쓸쓸하고 처절한 종말처럼 느껴졌다.

도헌은 동료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나직하게, 아주 나직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여보게,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야. 문 하나 여는 게 이토록 고단할 줄이야.”

그의 목소리는 물기 어린 가냘픈 진동이 되어 테이블 위를 힘없이 떠돌았다. 창밖의 빌딩 숲은 여전히 차가운 빛을 내뿜으며 위압적인 자세로 고요하게 서 있었다. 도헌의 말은 그 거대한 유리 요새의 거대한 침묵 속에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

세상은 여전히 그의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깊은 한숨 소리를 듣지 못했고, 들으려 하지도 않는 삭막한 정오였다. 도헌은 앞에 놓인 차가운 물잔을 만지작거리며 낯선 문명 속으로 홀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의 등 뒤로 또 다른 방문객이 다가오자 기계는 다시 신호를 내며 응답했다. 그것은 도헌에게는 결코 허락되지 않았던, 너무나 쉽고도 잔인한 환영의 인사였다. 도헌은 비로소 깨달았다. 이 세상의 문은 이제 사람의 손이 아니라 숫자의 명령에만 열린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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