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세 노교장의 낯선 세상 생존기
1. 정적과 감각의 전면전: 사물들의 침묵
현관 센서 등이 몇 차례 깜빡이다가 주황빛으로 번졌다. 예전 같았으면 문 앞에 발을 들이는 순간 또렷하게 켜졌을 불빛이었다. 도헌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더 안으로 들어섰다가, 불이 제대로 켜지지 않자 다시 몸을 멈췄다. 자신이 사물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그제야 실감했다.
불빛은 어깨 위 먼지를 비추다가 흔들리듯 꺼졌다. 어둠은 단순히 빛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압력처럼 도헌의 온몸을 천천히 감싸는 무게였다. 그는 구두를 벗지 못한 채 현관 벽에 기대어 섰다. 차가운 벽지가 셔츠를 뚫고 등줄기를 타고 내려와 척추 마디마디에 서늘한 감촉을 남겼다.
거실 저편의 괘종시계가 ‘탁, 탁, 탁’하고 울렸다. 신혼 초기에 장인어른이 손수 골라 선물해 준 시계였다. 그때는 시계가 울릴 때마다 도헌이 늘 다음 약속을 향해 몸을 돌렸지만, 이제 그 소리는 그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주기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가 버렸는지를 하나씩 짚어 주는 표시처럼 들렸다.
그 초침은 거대한 기계의 톱니가 맞물리며 시간을 밀어내는 소리처럼 들렸고, 그 단면마다 도헌에게 남겨진 쓸모들이 조각처럼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시계는 서늘하게 속삭이는 듯했다.
“너는 늦었다. 너의 보폭은 이미 이 세상의 빠른 태엽과 맞물리지 않는다.”
도헌은 구둣주걱을 찾기 위해 벽면을 더듬었다. 평소라면 눈을 감고도 낚아챘을 물건이 오늘따라 손등을 툭 치고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챙그랑’ 하는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그는 허리를 숙이기 전 잠시 망설였다. 숨을 한 번 고른 뒤 조심스럽게 몸을 굽혔다.
무릎 관절에서 ‘드득’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둣주걱을 쥐는 순간, 그는 자신이 마치 기능은 남아 있으나 호출되지 않는 부품처럼 느껴졌다. 아직 형태는 남아 있으나 이제는 쓰이지 않는 물건. 그는 내려다본 구두의 긁힌 자국을 보며, 오늘의 패배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에게만은 선명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2. 1960년대, 푸캇산의 혈흔: 청독사의 사수
서재 의자에 몸을 던진 도헌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초침 소리가 한 박자 늦게 들리는 사이, 그의 눈앞에 1960년대 월남에서 맹호 9호 작전인 푸캇산 전투가 인화되었다. 형광등 아래 가지런한 서류와 먼지 쌓인 책등이 흔들리더니, 눅눅한 정글의 공기와 썩은 낙엽 냄새가 그 자리를 밀고 들어왔다.
만년필의 차가운 감촉은 어느새 소총의 철제 몸통으로 바뀌었고, 고요한 서재의 침묵은 총성과 숨죽인 신호음으로 갈라졌다. 맹호부대 공수지구대, 이름만으로도 적을 떨게 했던 ‘청독사’ 팀. 당시 병장이었던 도헌은 팀의 사수이자 가장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대원이었다.
정글은 퀴퀴한 썩은 잎 냄새와 화약 연기가 뒤섞인 거대한 무덤 같았다. 안개는 독가스처럼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는 M16 개머리판을 어깨에 밀착시킨 채 낮게 포복했다. 뺨을 스치는 나뭇잎, 진흙 속에 섞인 적군의 땀 냄새. 그의 감각은 인간의 것이기보다 생존을 위해 단련된 짐승의 것에 가까웠다.
숲의 정적이 기묘하게 뒤틀리던 순간, 그는 손을 들어 팀원들에게 정지 신호를 보냈다. 11시 방향, 덤불 사이로 총구가 햇빛을 받아 아주 미세하게 번뜩였다.
“병장 김도헌, 저격수 확인.”
그는 속삭이며 방아쇠에 검지를 걸었다.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온 세상이 조준경 안으로 수렴되었다. 들숨과 날숨 사이, 모든 소음이 사라진 공백 속에서 검지 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마침내 단 한 발이 정글의 공기를 찢고 나갔다. 반동이 어깨를 타고 전해지는 순간, 도헌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그리고 이 팀에서 가장 강력한 ‘쓸모’를 지닌 존재임을 확신했다.
비가 퍼붓던 밤, 퇴로가 끊긴 절벽 아래에서 그는 부상당한 전우를 등에 업고 진흙탕을 기었다. 적의 박격포탄이 주변을 갈가리 찢어놓을 때도 그의 팔에는 신들린 듯한 힘이 서려 있었다.
“김 병장, 나를 버려라! 이러다 다 죽는다!”
“우리 팀에 버리는 놈은 없습니다. 숨만 쉬고 계십시오.”
그때의 도헌은 단 한 순간도 자신이 불필요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기계를 굴리는 핵심 부품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그 톱니는 소리 없이 기계에서 빠져나왔다. 쓰임을 다한 부품처럼.
3. 스크럼에서 책상까지: 사라진 연대, 다른 전장
도헌은 서랍 깊숙한 곳에서 빛바랜 졸업앨범을 꺼냈다. 고교 시절 럭비부 단체 사진 속 그는 진흙투성이 얼굴로 럭비공을 끌어안은 채 포효하고 있었다. 그 시절의 그는 팀의 일부였고, 동시에 팀을 버티게 하는 축이었다.
스크럼을 짜던 순간의 압력과 동료들의 숨결은 아직도 몸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서로의 어깨가 밀착될수록 개인의 힘은 사라지고, 대신 집단의 무게가 전진했다. 그는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졸업과 함께 팀은 흩어졌고, 스크럼은 더 이상 짜이지 않았다. 한때는 분명히 필요했던 자신의 자리가, 아무 말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그때 처음 배웠다.
전쟁이 끝난 뒤, 그리고 럭비장의 함성이 사라진 뒤에도 도헌의 삶은 곧바로 평온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교육 현장으로 돌아와 낮에는 행정과 수업, 회의 속을 오갔고, 밤이 되면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았다. 형광등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던 것은 총이나 공이 아니라 두꺼운 전공 서적과 논문들이었다.
그는 교육 전문직으로 일하며 스스로를 다시 평가받는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 선택이 도망은 아닌지, 현장을 떠난 자신이 여전히 쓸모 있는지 수없이 자문했다. 다섯 해 동안 이어진 밤의 독서는 체력보다 인내를 요구했고,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붙잡고 되돌아가는 시간이 그의 일상이 되었다.
결국 그는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수여식 날의 박수는 짧았고, 그의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그에게 이 학위는 도착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웠다. 자신이 아직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그리고 배움이라는 방식으로 여전히 삶의 전선에 서 있을 수 있다는 최소한의 증거였다.
그 밤, 도헌은 책상 위에 놓인 논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것은 무기가 아니라, 그가 선택한 또 하나의 전장이었다.
4. 자녀라는 낯선 전파: 교정되는 삶
소파 위 스마트폰이 신경질적으로 진동했다. 갑작스러운 진동에 도헌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그는 곧바로 손을 뻗지 않고 잠시 그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피할수록 더 커질 불안이 예감처럼 밀려왔다.
화면에는 ‘아들’이라는 두 글자가 떠 있었다. 도헌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전화를 받는 일조차 예전처럼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는 통화 버튼을 밀었지만, 손끝이 잠깐 망설이며 화면 위에서 미끄러졌다. 두 번, 세 번의 시도 끝에야 겨우 연결되었고,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괜히 숨을 고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버지, 아까 보내드린 기프티콘 쓰셨어요?”
아들의 목소리는 밝고 다정했다. 걱정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도 도헌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는 도헌의 기억을 낮의 한 장면으로 단번에 되돌려 놓았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혼자 멈춰 서 있던 자신, 기계 앞에서 뒤로 밀려난 채 줄을 막고 있다는 느낌. 누군가의 시간을 빼앗고 있다는 미안함과 함께, 자신이 사회의 흐름을 늦추는 존재가 되었다는 자각이 조용히 고개를 들던 순간이었다.
도헌은 대답 대신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아들은 곧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어디를 누르면 되는지, 화면을 어떻게 보여주면 되는지. 말들은 친절했지만, 그 친절 속에는 ‘방법’이 전제되어 있었다. 아들에게 그것은 배려였겠지만, 도헌에게는 자신이 이미 뒤처졌다는 확인처럼 들렸다. 그는 더 묻지 않았고, 더 설명하지도 않았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은 뒤, 도헌은 한동안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고, 화면은 이미 꺼져 검은 거울처럼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문득, 기술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기술이라는 언어를 이제는 자유롭게 쓰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미묘한 차이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조차 그를 점점 낯선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5. 식탁 앞의 심리전: 수치심을 덮는 온기
“당신, 아직 안 자요?”
서재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아내 영순이 들어왔다. 그녀의 움직임은 조용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깨우지 않기 위해 오래도록 몸에 밴 습관이었다.
영순의 손에는 따뜻한 물 한 잔과 죽 한 사발이 들려 있었다. 죽에서는 아직 김이 옅게 올라왔고, 숟가락이 사발 가장자리에 부딪히며 가느다란 소리를 냈다. 그 가느다란 소리는 공기 속으로 스며들어, 집 안을 한층 더 조용하게 만들었다.
“속 좀 달래요. 오늘 하루 힘들었잖아요.”
그녀의 말투에는 묻지 않으려는 배려가 섞여 있었다. 무엇이 힘들었는지, 어디서 상처를 받았는지 굳이 캐묻지 않았다. 도헌은 그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짧게 말했다. “나 아직 죽 먹을 나이 아니야.”그 말은 영순을 향한 항변이라기보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방어에 가까웠다.
영순은 잠시 도헌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아주 작게 오르내렸고, 그 미세한 호흡에는 말을 대신하는 망설임과 기다림이 담겨 있었다. 대신 도헌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얹었다. 주름이 깊게 패인 손이었지만, 그 온기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당신은 평생 우리 집의 대들보였어요.”
그 말은 위로라기보다 사실에 가까웠다. 도헌은 그 문장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이제는 힘을 줄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강해 보이기 위해 세워 두었던 어깨가 눈에 띄게 내려앉았다.
도헌은 그 순간 알았다. 자신을 끝내 지탱해 온 것은 전쟁의 용맹도, 경기장의 함성도 아니었다는 것을. 이렇게 말없이 내미는 한 사람의 손, 수치심 위에 조용히 덮이는 이 온기야말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삶의 버팀목이라는 것을.
6. 핵심 질문: 나는 아직 배울 수 있는가?
아내가 방으로 돌아간 뒤, 도헌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집 안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는 평온과는 거리가 멀었다. 달빛이 서재 바닥 위로 창백한 무늬를 그리며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도헌은 조심스럽게 백지를 펼쳤다. 종이는 지나치게 하얗고 깨끗해서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그는 만년필을 들어 한 문장을 적었다. 글씨는 예전보다 느렸고, 획 하나하나에 불필요할 만큼의 힘이 들어갔다.
[나는 아직 쓸모가 있는가?]
그 질문은 절망에서 터져 나온 외침이기보다는, 스스로를 다시 세우기 위해 멈춰 선 자리에서 나온 숨에 가까웠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삶을 지탱해 온 수많은 순간을 떠올렸다. 총성과 함성, 교단의 소음과 밤의 책상, 그리고 말없이 손을 내밀던 아내의 온기까지.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은 나이도, 시대의 변화도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스스로 이제는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단정을 짓는 순간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만년필을 내려놓지 않은 채, 그 문장 아래에 또 하나의 문장을 적었다.
“나는 아직 배울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앞선 문장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심문하는 질문이 아니라, 다시 길 위에 서기 위한 허락에 가까웠다.
도헌은 나이라는 계급장을 조용히 내려놓듯 마음속에서 하나씩 떼어냈다. 배움이 이어지는 한, 쓸모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조용히 이어진다.
그는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 당장 답을 찾지 못해도 괜찮다고.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을 붙들고 내일로 넘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도헌의 밤은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으로 천천히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