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⑤』

82세 노교장의 낯선 세상 생존기

by 느릅내

Chapter5 AI 민원로봇과의 말다툼



그날 이후 도헌이 주민센터로 향한 것은 단순한 행정 처리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최근 들어 자신이 점점 ‘설명하지 않는 쪽’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감각이 있었다. 누가 밀어낸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말이 먼저 줄어드는 느낌. 오늘은 그 감각이 건물의 문 앞에서, 뚜렷한 형태를 갖추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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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이 빠져나간 공간

주민센터의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 도헌의 귀에 ‘띠링’ 하는 소리가 또렷하게 박혔다. 그 소리는 잠시 반가운 인사처럼 들렸다. 그러나 도헌은 곧 알아차렸다. 그 인사는 사람에게 건네는 것이 아니라, 출입을 확인하는 기계의 신호라는 것을.

그는 잠깐 멈춰 섰다. 말이 통하지 않는 순간이 사람을 작게 만든다는 사실보다, 그 ‘작아짐’이 너무 빠르게 일어난다는 사실이 더 씁쓸했다.

자동문이 닫히자 소리는 공기 속으로 흩어졌고, 그 뒤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정적이 남았다. 소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말이 빠져나간 자리처럼 텅 빈 정적이었다. 이곳은 조용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평온’이 아니라 ‘규정’에 가까웠다.

마치
“여기서는 말을 아껴야 합니다”
라는 문구가 벽에 보이지 않게 붙어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도헌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괜히 기침이라도 하면 주변의 시선이 쏠릴 것 같았고, 말 한마디를 꺼내기 전에 먼저 머릿속에서 분량을 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말은 허용되지만, 길면 잘렸다. 그 규칙이 공기처럼 퍼져 있었다.

이곳의 공기는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 정돈은 사물만이 아니라 사람까지 가지런히 세우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벽면 화면의 기계음과 버튼 전자음만이 공간을 채웠다. 사람들은 서로를 보지 않은 채 화면 앞에서 자기 차례만 기다렸다. 기다림은 공동의 시간이 아니라, 각자에게 배당된 개인의 몫이었다.

도헌은 문득 예전의 주민센터를 떠올렸다. 커피믹스 냄새가 은근히 퍼지고, 번호표를 들고 앉아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옆 사람과 말이 섞이던 곳. 느리고 번거로웠지만, 말은 끊기지 않았다. 그 말들이 이 공간을 분명한 ‘사람의 자리’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사람은 있었지만, 말은 없었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기계음과 침묵이었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정리된 이 정적은 깔끔했지만, 어딘가 허전했다.


2. 사람을 닮은 로봇, 그러나 사람은 아닌

흰색 플라스틱 몸체의 민원로봇 ‘민원이’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로봇은 매끈하고 새것처럼 반들거렸다.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은 표면은, 이곳이 사람의 손길보다 규칙의 손길로 유지되는 공간임을 말해 주는 듯했다.

로봇의 얼굴은 사람을 닮았으되, 사람의 얼굴과는 분명히 달랐다. 눈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를 검은 점 두 개와 입 모양을 본뜬 선이 있을 뿐이었다. 표정이 없다는 사실마저 계산된 결과처럼 느껴졌다. 너무 닮지도, 너무 다르지도 않은 그 중간지대가 사람을 오래 붙잡았다.

“안녕하세요. 민원 안내를 도와드리겠습니다.”

로봇의 인사는 공손했다. 발음은 또렷했고, 억양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친절은 관계로 이어지지 않았다. 인사는 있었지만, 반응을 기다리는 여백은 없었다. 말은 흘러나왔지만, 대화는 시작되지 않았다.

도헌은 기계 앞에서조차 자세를 바로 세우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사람의 얼굴’에 반응해 왔는지를, 이 순간에야 새삼 깨달았다.

그는 주변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창구 대부분은 무인 운영 중이었고, 사람이 앉아 있는 창구 앞에는 노인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 줄에는 묘하게 닮은 표정들이 이어져 있었다. 초조함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표정, 이곳에서는 속도를 기대하지 말자는 듯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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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질문은 있었지만, 대화는 없었다.

도헌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소된 기록이 포함된 서류가 왜 필요한지, 그 서류가 없으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그리고 기한이 왜 이렇게 촉박해졌는지까지 차분히 풀어냈다. 그는 한 문장이라도 덜 오해받기 위해 말을 고르며 설명했고, 중간중간 멈춰 다시 문장을 다듬었다.

“예전에 제출했던 자료인데요, 그게 시스템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요.”

도헌은 일부러 말을 짧게 끊어 보았다. 로봇이 이해하기 쉬운 방식일 그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면에는 곧바로 새로운 버튼들이 떠올랐고, 그의 설명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말씀이 너무 깁니다. 핵심 키워드를 말씀해 주세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화면은 멈춘 듯 빛나고 있었고, 도헌의 입은 다음 말을 찾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로봇의 목소리는 여전히 공손했지만, 그 말에는 여지가 없었다. 사람에게서라면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할 틈이 남았겠지만, 로봇의 기준에서 ‘길다’라는 평가는 곧 처리 불가를 의미했다.

그는 다시 숨을 고르고 말을 접었다. 맥락을 빼고, 사정을 덜어내고, 남은 단어들만 골라냈다. 설명이 아니라 나열에 가까운 말들이 이어졌다. 그럴수록 화면은 더 빠르게 반응했고, 로봇의 답변은 점점 짧아졌다.

‘말을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는군.’

도헌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질문은 분명히 하고 있었지만, 그 질문은 대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대화라면 서로의 말을 조금씩 고쳐 가며 방향을 맞춰야 할 텐데, 이곳에서는 어긋난 순간 곧바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길어진 말은, 짧은 답으로 잘렸다.


4. 길어지는 설명, 짧아지는 자존감

도헌은 자신이 점점 로봇에 맞춰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처음에는 이해를 돕기 위한 조정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간단하게 말하고, 불필요한 배경 설명을 덜어내면 대화가 수월해질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설명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정을 말하는 대신, 기계가 처리할 수 있는 문장으로 자신을 ‘번역’하고 있었다.

그는 문장을 시작하기 전에 머릿속으로 한 번 더 걸러 보았다. 이 말이 너무 길지는 않은지, 감정이 섞여 있지는 않은지, 로봇이 이해하지 못할 표현은 없는지. 그렇게 고르고 또 고른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말이 잘릴 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허락되었던 ‘길게 말할 권리’를 하나씩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을 불러주세요.”

도헌은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다시 선택해 주세요.”

로봇의 대답은 짧고 단정했다. 요청의 맥락이나 이유는 고려되지 않았다. 다시 선택하라는 말은, 다시 말하지 말라는 뜻처럼 들렸다. 선택지는 있었지만, 그 안에 자신의 삶이나 사정이 들어갈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자신이 민원을 넣는 쪽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쪽이 된 듯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 설명은 얇아졌고, 감정은 지워졌으며, 남은 것은 처리 가능한 정보뿐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어디까지 남아 있을까.’

도헌은 속으로 되뇌었다. 사람은 사정을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람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정이 길어질수록 방해가 되었고, 설명이 많아질수록 오류로 분류되었다. 그는 자신이 투명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도헌은 이 말다툼이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존중의 문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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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절차라는 이름의 유령

잠시 어색한 정적이 이어진 뒤, 결국 젊은 직원이 서둘러 다가왔다. 그는 도헌의 얼굴과 로봇 화면을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별다른 설명 없이 키보드와 화면을 빠르게 조작했다. 버튼 몇 개가 눌리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전환되자, 그동안 막혀 있던 문제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풀려 버렸다.

로봇이 읽지 못한 유형이라는 짧은 설명이 이어졌고, 프린터에서는 곧바로 서류가 출력되었다. 십여 분 동안 이어졌던 말다툼과 설명, 조심스러운 요청들이 단 1분 만에 정리된 것이다.

“효율성 때문입니다.”

직원은 관용구처럼 말했다.

도헌은 그 말 속에서 이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기준을 분명히 느꼈다. 효율이라는 말은 편리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생략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효율’이라는 단어는 유령처럼 떠돌았다. 도헌은 문득, 이 유령이 사람들의 목소리만이 아니라 표정까지도 얇게 눌러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사람들의 움직임과 판단을 지배하는 기준.

로봇이 반복하던 안내 문구와 직원의 짧은 설명은 서로 다른 목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가리키는 방향은 같았다. 오래 설명하지 말 것, 사정은 요약할 것, 흐름을 방해하지 말 것.

도헌은 문득 생각했다. 이곳에서는 문제를 이해하는 것보다 빨리 처리하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누군가의 말이 길어지는 순간, 그 말은 곧 비효율로 분류된다. 그렇게 분류된 말들은 절차라는 이름 아래 조용히 밀려난다.

서류는 해결되었지만, 마음에는 설명되지 않은 감정이 남았다.

6. 사람의 자리

도헌은 나서려다 멈추었다.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무언가가 등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한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로봇 앞으로 다가갔다.

“저기요… 우리 손주 말인데요.”

할머니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고, 문장도 매끄럽지 않았다. 말은 몇 번이나 끊겼고, 같은 이야기가 앞뒤를 바꿔 반복되었다.

그러나 로봇은 반응하지 않았다.

“해당 민원은 온라인으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화면을 한 번 더 바라보다가,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손을 움켜쥐었다.

할머니는 잠시 멈췄다. 표정이 한순간, 접혔다. 손끝이 화면 아래를 더듬었고, 숨이 한번 얕게 꺾였다. 표정이 한순간, 접혔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에서 오는 떨림이었다.

도헌은 끼어들지 않고 할머니의 말을 끝까지 기다렸다.

“천천히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도헌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 한마디에 할머니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말이 다시 이어졌고, 목소리에는 안도의 기색이 섞였다.

그 순간 도헌은 분명히 깨달았다. 이 공간에서 정말로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니었다. 부족한 것은 말을 끝까지 들어 주는 사람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끊지 않고, 효율로 재단하지 않는 태도였다.

사람의 자리는 ‘듣는 태도’로 만들어진다. 도헌은 그 자리가 바로 자신이 서 있는 자리임을 받아들였다.

7. 기록과 조용한 반항

주민센터를 나온 도헌은 건물 옆 벤치에 앉았다. 그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과 펜을 꺼냈다. 지금, 이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도헌은 천천히 메모를 남기기 시작했다. 그는 수첩 첫 줄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 내 말은 시스템 앞에서 잘렸다.’

잘려 나간 말들, 중간에서 끊긴 설명들, 요약하라는 요구 속에서 사라져 버린 사정들. 오늘 이곳에서 오간 말들은 곧 잊힐 것이 분명했지만, 그렇기에 더 기록해 두고 싶었다.

그는 잠시 펜을 멈추고 생각했다. 조금만 줄여 말했더라면 상황은 훨씬 빨리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면, 그는 자신의 사정을 끝까지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헌은 그 선택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펜 끝을 세우며 마음에 박았다. 오늘은 졌다. 다음에는, 더 천천히 말하겠다고.

‘말은 짧게, 핵심만.’

오늘 하루 동안 그가 가장 자주 느낀, 말 없는 압박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규칙을 그대로 따르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시스템 앞에서 다시 말을 줄이지 않겠다고, 요약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설명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았다.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휴대전화를 보며 걷는 이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드나드는 주민센터의 문.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도헌의 마음속에서는 분명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말이 통하는 자리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저절로 유지되지 않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더듬고, 돌아가고, 느리더라도 끝까지 말하게 해 주는 사람. 도헌은 그런 사람이 되기로 조용히 마음먹었다. 그는 그 사실이 무겁게 좋았다. 그래도 끝까지 말을 해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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