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세 노교장의 낯선 세상 생존기
신도림행 열차가 진입한다는 안내 방송은 첫 마디를 뱉자마자 날카로운 고주파 소음 속으로 침몰했다. 역내 천장에 매달린 낡은 스피커는 마치 고장 난 악기처럼 떨렸고, 그 진동은 쇳가루 섞인 바람과 인파의 소란에 부딪혀 형체를 잃은 웅얼거림으로 변질되었다.
문장은 끝맺음 없이 흩어졌고, 방향을 가리키는 지시어들은 소음의 파도 속에서 녹아 사라졌다. 도헌은 밀려드는 출근 인파에 떠밀리듯 서 있다가 발밑의 노란 유도선을 밟으며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그의 시선은 잠시 먹통이 된 스피커를 스쳤다가, 이내 익숙한 체념을 담아 바지 주머니 속 스마트폰으로 내려갔다.
액정 화면 위로는 사람들의 열기와 지하철역 특유의 습기가 엉겨 붙어 뿌연 안개가 서려 있었다. 도헌은 셔츠 소매를 끌어당겨 화면을 거칠게 문질렀지만, 기름진 얼룩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음성인식 엔진을 구동했다. 화면 하단에서 푸른색 파형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기민하게 일렁이며 그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신도림역 화장실 위치 알려줘."
도헌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기계는 주변의 소음을 무차별적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옆 사람의 가방 지퍼가 열리는 날카로운 마찰음, 승강장으로 진입하는 전동차의 육중한 모터 소리, 멀리서 쏟아지는 자극적인 광고 CM송이 도헌의 질문 위로 겹겹이 포개졌다.
기계에게는 이 모든 소리가 우선순위 없는 동등한 데이터일 뿐이었다.
잠시 후 화면에 떠오른 결과값은 **[신돌 임혁 가장 실위치]**라는 무의미한 나열이었다.
도헌은 입술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며 스마트폰 마이크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켰다. 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파찰음을 정확히 만들어내려 애쓰는 그의 모습은 흡사 기계에게 검열을 받는 죄수 같았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지금 길을 묻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게 자신이 정상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사용자임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였다.
"신. 도. 림. 역."
한 글자씩 끊어칠 때마다 성대의 떨림이 차가운 금속 테두리를 타고 손끝까지 전달되었다. 그러나 기계의 알고리즘은 음절 사이에 존재하는 0.5초의 인간적인 망설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화면에는 **[Error code: 404 – No result found]**라는 문구와 함께 끝없이 회전하는 로딩 바가 나타났다.
도헌은 다시 입을 열려다 멈췄다. 이 소란스러운 공간에서 기계는 인간의 간절한 발음보다 지하철의 무기질적인 소음을 더 정확하고 정직한 데이터로 신뢰하고 있었다.
공과금이 이중으로 납부된 사실을 확인한 도헌은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번호를 누르는 손끝에는 이미 여러 차례의 실패가 남긴 미묘한 경계심이 실려 있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린 뒤, 사람의 체온이 완전히 제거된 디지털 음성이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주파수 대역이 좁고 메마른 그 목소리는 누군가를 돕기보다는 효율적으로 분류하고 걸러내기 위해 설계된 필터처럼 들렸다.
도헌은 최대한 정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기계가 좋아할 만한 형식으로 문장을 정리하고 군더더기를 덜어낸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제 자동이체가 두 번 됐습니다. 확인 후 환불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계적인 대답이 끼어들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금 납부', '이사 정산', '고장 신고' 중 선택해 주세요."
도헌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수화기를 쥔 손가락 마디에 힘이 들어가며 피부가 하얗게 질렸다. 그는 다시 한번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게 아니라요, 돈이 두 번 빠져나갔습니다. 이중 출금이요."
그러나 기계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다시 말씀해 주세요"라는 녹음된 문장만 1초의 오차도 없이 반복했다.
기계에게 중요한 것은 문장의 맥락이나 사용자의 억울함이 아니었다. 오직 미리 정의된 데이터베이스 속 '정답 단어'와 일치하는지 여부뿐이었다. 그 목록에는 '이중 출금'도, '부당함'도, '사정'이라는 인간의 언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헌은 결국 자신의 목소리를 버리기로 했다. 감정을 완전히 제거하고 뉴스 앵커처럼 평평하고 단단한 톤을 만들어냈다. 말은 더 이상 전달이 아니라 입력값이 되었다.
"요. 금. 납. 부."
그제야 기계는 만족한 듯 응답했다.
하지만 연결의 끝에는 생년월일과 비밀번호를 요구하는 10단계의 ARS 미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숫자를 누를 때마다 전자 비프음이 귀를 찔렀고, 도헌은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러 온 고객이 아니라 정해진 단어를 외우지 못한 열등생이 된 기분을 느꼈다.
이후 접속한 챗봇 서비스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환불 규정이 궁금해"라고 입력하자마자 화면에는 형형색색의 광고 팝업들이 연쇄적으로 튀어 올랐다. 질문은 해결의 출발점이 아니라 소비를 유도하기 위한 신호에 불과했다.
도헌은 기계가 알아듣기 쉬운 방향으로 자신을 계속 줄이며 문장을 고쳐 썼다.
"환불. 규정."
돌아온 것은 70페이지 분량의 빽빽한 PDF 이용 약관 링크였다. 텍스트는 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정작 그가 원하는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쇼핑몰 지하 4층 주차장, 도헌은 '사전 정산기'라는 이름의 거대한 철제 함체 앞에 섰다. 차가운 형광등 불빛이 콘크리트 바닥에 얼룩처럼 번져 있었고, 정산기는 도헌을 내려다보며 위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도헌은 차량 번호, 네 자리를 입력했다. 숫자를 누를 때마다 터치패드는 둔탁한 진동만을 돌려줄 뿐 확신을 주지 않았다.
[조회 중입니다…]
화면 위의 모래시계 아이콘이 느리게 회전했다. 5초, 10초가 흐르자 뒤편의 공기는 눈에 띄게 무거워졌다.
유모차를 끄는 부부는 바퀴를 멈춘 채 미묘하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장바구니를 든 노인은 발을 구르며 시선을 도헌의 등 뒤에 꽂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무언의 질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해당 차량 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도헌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니, 내 차가 분명 저기 있는데?"
그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다시 번호를 눌렀다. 이번에는 기계가 정신을 차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더 세게, 더 정확하게 터치했다.
하지만 정산기는 단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동일한 에러 메시지를 되풀이했다. 도헌의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바로 뒤에 선 남자가 일부러 들리게 시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은 기계음보다 더 날카롭게 도헌의 자존감을 긁어냈다.
도헌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붉은색 호출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에서는 지직거리는 잡음만 새어 나올 뿐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CCTV 카메라 렌즈를 향해 조난자처럼 조심스럽게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카메라는 각도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그의 움직임을 차갑게 기록하기만 했다.
그 순간 도헌은 깨달았다. 이곳에서 그는 도움을 요청하는 시민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오류'로 분류된 존재라는 것을.
결국 그는 사람들에게 연신 사과한 뒤에 차로 돌아가 차단기 앞까지 차를 몰아가야 했다. 기계의 무능은 도헌의 수치심으로 치환되어 지하 주차장의 차가운 공기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도헌은 외투도 벗지 못한 채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켰다. 은행 앱을 실행하자 "장기 미사용으로 인해 비밀번호 재설정이 필요합니다"라는 냉정한 문구가 그를 맞이했다.
본인 인증 단계에 들어서자 기계의 요구는 이전보다 훨씬 집요하고 세밀해졌다.
"신분증을 어두운 배경에 놓고 빛 반사가 없게 촬영해 주세요."
도헌은 책상 위를 정리하고 조명을 이리저리 옮겼다. 바닥에 검은색 외투를 펴고 그 위에 신분증을 올린 채 숨을 죽이며 촬영 버튼을 눌렀지만, 결과는 같았다.
"신분증의 홀로그램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일곱 번째 거절 메시지가 떴을 때 그의 팔 근육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계의 기준은 인간의 신체적 한계나 피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다음 단계인 안면 인식은 더욱 가혹했다. 스마트폰 화면 속 타원형 가이드라인 안에 얼굴을 맞추라는 지시가 이어졌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눈을 크게 깜빡이세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세요."
"입을 크게 벌리세요."
어두운 방 안에서 스마트폰의 푸른 빛만이 도헌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입을 벌린 채 지시에 따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은 인간의 존엄을 증명하기보다, 시스템의 승인을 구하는 동작처럼 보였다.
기계는 도헌이라는 인간의 생애나 정직함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픽셀로 잘게 쪼개진 데이터와 저장된 기준값의 일치율만을 계산할 뿐이었다.
10여 분의 사투 끝에 돌아온 것은 **[Error: BIO -999 – 본인 확인에 실패했습니다]**라는 차가운 선고였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도헌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눈앞에 분명히 살아 있는 '나'가 있는데, 기계는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네가 아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현관에 들어선 도헌은 습관처럼 어둠 속에서 한마디를 던졌다.
"불 켜."
하지만 인공지능 스피커는 그의 쉰 목소리를 '정의되지 않은 노이즈'로 분류하며 명령 수행을 거부했다.
도헌은 가방을 내려놓고 스피커 앞에 다가가 가장 또렷한 발음과 인위적인 톤으로 다시 말했다.
"헤이 기기, 거실 조명 켜줘."
이번에는 조명이 켜졌지만, 거실이 아닌 베란다의 보조 등이 번쩍였다.
도헌은 기계를 탓하는 대신 스스로를 점검했다.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기계가 좋아할 만한 말의 속도와 억양을 중얼거리며 맞춰 보기 시작했다.
명령은 길어졌고 목소리는 부자연스러워졌다. 집 안에서조차 그는 주인이 아니라 기계의 비위를 맞추는 훈련생이 된 듯했다.
이 비굴한 교정 수업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의 키오스크 앞에서도 기계의 속도에 자신의 반응을 맞추는 기이한 훈련은 반복되었다.
기계의 불완전함을 보완하는 책임은 언제나 인간의 몫이었다.
길가에 선 도헌은 'AI 혁신'이라는 찬란한 약속들이 도시의 공기를 채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현실에서 기계는 어제 했던 실수를 오늘 반복했고, 인간은 그 실수를 감당하기 위해 더 많은 주의력과 인내심을 소모해야 했다.
이제는 인간이 기계의 논리에 맞춰 스스로를 난도질하는 시대여서는 안 된다. 이제는 반대여야 했다.
기계가 인간의 지친 목소리와 다급한 사정을 배워야 했다.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도헌은 밖을 보았다. 화면 앞에서 멈춰 선 사람들, 스스로를 의심하며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 그들 모두는 기계라는 장벽 앞에서 각자 고립된 채 자신의 무능을 반성하고 있었다.
도헌은 가방끈을 세게 움켜쥐었다. 대답하지 않는 대상에게 말을 거는 대신, 같은 경험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차례였다.
이 사회에 정말 나만 이런 것인지, 아니면 우리 모두 거대한 시스템 속에 갇혀 있는 것인지.
질문은 이제 기계가 아닌 사람을 향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