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⑧』

82세 노교장의 낯선 세상 생존기

by 느릅내

제8장 낡은 매듭과 황금 배지


1. 4호선의 불청객과 가장 낮은 공약

지하철 4호선 당고개행 열차가 선로를 날카롭게 짓이기며 비명을 질렀다. 낡은 쇠붙이의 금속음이 객차의 정적을 거칠게 찢었다. 퇴근길의 승객들은 하루의 고단함에 절어 무표정하게 휴대폰 화면 속으로 침잠해 있었다. 박지훈 장관은 수행원들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정적 속에 섬처럼 고립된 채, 무릎 위 ‘G-Smart Project’ 결재 서류를 응시했다. 수조 원의 숫자가 적힌 종이는 그의 목을 서서히 죄는 무거운 바위 같았다. 그는 불안할 때마다 나타나는 오래된 습관대로 엄지손톱 끝을 만지작거렸다. 빳빳한 정장 깃이 경동맥을 압박했고, 손바닥의 식은땀은 서류 모서리를 조금씩 적셔갔다.

“장관님, 다음 역입니다. 보도진이 출구까지 진을 쳤으니 가급적 서두르셔야 합니다.”

비서관의 낮은 보고에 지훈이 무겁게 서류를 덮으려던 찰나, 열차가 크게 덜컹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그 소란을 틈타 노약자석 쪽에서 거칠고도 훈계조 섞인 목소리가 고요를 뚫고 들어왔다.

“박지훈. 너 아직도 불안하면 손톱 물어뜯니? 30년이 지나도 그 못된 버릇은 여전하구나.”

지훈의 손가락이 그대로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거기엔 낡은 중절모와 곳곳이 해진 갈색 재킷을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30년 전, 칠판 먼지 자욱하던 교실에서 그를 부르던 김도헌 선생님이었다. 세월은 스승의 어깨를 굽게 했지만, 사람의 본질을 꿰뚫는 그 서슬 퍼런 눈빛만은 예전 그대로였다.

경호원들이 즉각 앞을 가로막았지만 지훈은 다급하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도헌은 수행원들의 서늘한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지훈의 넥타이 매듭을 툭툭 쳤다. 최고급 실크의 광택도 도헌의 눈에는 스스로를 옥죄는 화려한 밧줄처럼 보이는 듯했다.

“이 차가운 쇳덩이 칸에 갇혀서 비싼 넥타이만 매고 있으면 세상이 다 보이냐? 네 눈을 가린 장막부터 치워라. 바닥을 봐라, 지훈아. 진짜 세상은 발밑에 있단다.”

도헌은 인자하면서도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알사탕 하나를 꺼내 지훈의 손바닥에 꾹 눌러주었다.

“5학년 2반 반장 선거 때 네가 했던 말, 나는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다. 친구들 신발 끈 풀리면 제일 먼저 달려가 무릎 굽히겠다던 꼬마. 지금 네 신발 끈은 누가 매어주고 있냐? 화려한 간판이 아니라, 작은 돌부리가 사람을 넘어뜨린단다.”

지훈은 대답 대신 사탕을 입에 넣었다. 혀끝을 자극하는 쌉싸름한 맛. 그것은 부당한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교단을 떠나야 했던 도헌이, 공사판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버텨온 고단한 세월의 맛이었다. 스승의 거친 손마디에 박힌 굳은살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감내한 수모의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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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96년 가을, 장마가 길던 해의 기억

관사로 돌아온 지훈은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1996년, 유난히 장마가 길어 운동장이 늘 진흙탕 웅덩이투성이였던 해였다. 사진 속 소년 지훈은 구멍 난 운동화가 부끄러워 발가락을 잔뜩 오므린 채 구석에 서 있었다. 가난은 소년의 어깨를 굽게 했고, 젖은 신발 냄새가 들킬까 늘 불안했다. 그런 그에게 김도헌 선생님은 유일하게 따뜻한 이름을 불러준 어른이었다.

반장 선거 날, 아이들은 거창한 공약을 내걸었다. 피자를 쏘겠다거나 전교에서 제일가는 반을 만들겠다는 구호가 난무했다. 지훈은 마지막으로 단상에 올라 떨리는 손으로 낡은 교탁을 붙잡고 간신히 입을 뗐다.

“저는... 여러분의 신발 끈이 풀리면 제일 먼저 달려가 무릎을 굽히겠습니다.”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신발 끈 묶어주는 게 반장이냐, 신발장이냐!” 하지만 도헌 선생님만은 웃지 않았다. 그는 아이들을 진정시킨 뒤 지훈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지훈은 단 한 표 차이로 반장이 되었다. 그 한 표는 다름 아닌 선생님의 신뢰였다.

방과 후, 도헌은 지훈을 불러 사탕을 건네며 말했다.

“지훈아, 정치는 높은 곳에 화려한 깃발을 꽂는 경쟁이 아니야. 남의 신발 끈을 묶어주려면 내가 먼저 가장 낮은 곳으로 무릎을 굽혀야 하지. 그게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지만, 동시에 가장 위대한 자세란다. 남의 발을 만질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법이야.”

얼마 후 도헌은 학교를 떠났다. 전교조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문제 교사' 낙인이 찍힌 탓이었다. 도헌이 떠나던 날, 지훈은 운동장에서 자신의 신발 끈을 단단히 고쳐 맸다. 이후 도헌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얼마동안 인력시장을 전전하며 거친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지훈은 대학생이 되어서야 소문을 들었다. 도헌이 퉁퉁 부은 다리를 문지르면서도, 지훈에게 줄 사탕 한 봉지를 사기 위해 인력시장을 서성였다는 사실을. 도헌은 자신의 등이 구부정하게 굽어가는 동안 제자의 허리가 대나무처럼 꼿꼿이 펴지기를 바랐다.


3. 500억의 가위표와 관료주의의 벽

장관실의 공기는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기획조정실장 송민호가 두툼한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다.

“장관님, 스마트 시티 예산 500억을 삭감하는 건 행정적 자살행위입니다! 이미 여당과 협의가 끝난 사안입니다.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하시렵니까?”

송 실장에게 정치는 효율의 극대화였고 예산은 실적의 지표였다. 지훈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화려한 마천루 아래 실핏줄처럼 얽힌 낡고 좁은 골목들이 보였다.

“송 실장님, 스마트 시티 도로에 휠체어 탄 노인이 넘을 수 없는 턱이 몇 개나 되는지 아십니까? 깨진 보도블록 때문에 다치는 분들이 몇 명인지 보고받으셨냐고요. 집 앞 시장 가는 길조차 지뢰밭인데, 5G가 무슨 소용입니까?”

“그건 미시적인 문제입니다! 국가적 성장 동력을 생각해야죠!”

“아니요.” 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예산 중에 ‘누군가의 신발 끈을 묶어주는 돈’이 단 1원도 없다는 게 부끄럽습니다. 드론 배달보다 시각장애인이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바닥을 고치는 게 지능형 도시의 기초입니다. 바닥이 바로 서지 않은 도시는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지훈은 조감도 위에 거대한 가위표를 그었다. 펜 끝에 도헌의 굳은살이 겹쳐 보였다. “500억 전액을 노후 지역 보도 평탄화와 보청기 보급으로 재편성하세요. 사업 이름은 '발밑 예산'입니다. 제 명령입니다.”

송 실장의 얼굴이 떨렸다. 지훈은 그날 밤, 신념을 위해 평생의 직장을 던졌던 스승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로비스트들이 가득 메운 소음 속에서도 그는 주머니 속 알사탕을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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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론의 폭풍과 낡은 생활기록부

반격은 예상보다 거셌다. 언론은 박 장관이 ‘포퓰리즘’에 빠졌다고 맹비난했다. 공격의 화살은 노교사 도헌에게까지 무자비하게 뻗쳤다.

“해직 경력이 있는 교사가 장관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 “국가 핵심 사업을 좌초시킨 배후 세력의 정체!”

도헌의 낡은 아파트는 기자들의 카메라 소리에 점령당했다. 과거 칼럼은 ‘체제 전복적 선동’으로 둔갑했다. 지훈은 격노했다. 스승의 명예가 자신의 행보 때문에 흙탕물에 처박히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참모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단상 위에서 지훈은 세련된 원고를 밀어놓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낡아빠진 종이 한 장을 꺼냈다. 40년 세월이 묻어 누렇게 변색된 기록이었다.

“이것은 제 5학년 2반 생활기록부입니다.”

기자석이 술렁였다. 지훈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제 스승 김도헌 선생님은 저에게 이념이 아니라 ‘사람’을 가르치셨습니다. 선생님은 배고픈 친구에게 사탕을, 풀린 신발 끈 앞에서는 무릎을 굽히는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이 배후라고 부르는 그분은 평생 무릎 굽혀 타인의 신발 끈을 묶어온 평범하고 위대한 스승일 뿐입니다.”

지훈은 잠시 말을 멈추고 객석을 응시했다. “선생님의 굳은살은 권력의 흉터가 아니라 가족과 신념을 지킨 고귀한 땀의 증거입니다. 저는 장관이라는 배지 뒤에 숨지 않겠습니다. 스승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여러분이 매일 밟는 보도블록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SNS에서는 시민들이 스승과의 추억을 올리는 챌린지가 시작되었다. 권력이 지우려 했던 진심이 기억 속에서 부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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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본회의장: 숫자의 폭력에 맞선 진심

국회 본회의장. 야당은 박지훈 장관 해임 건의안을 상정했다. 단상으로 향하던 지훈에게 송 실장이 다가와 소매를 붙잡았다.

“장관님. 제가 직접 그 골목들을 다녀왔습니다. 턱 하나 깎는 게 휠체어 타는 분들께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것보다 큰 기쁨이더군요. 제가 틀렸습니다. 이 보고서, 끝까지 책임지고 밀어붙이겠습니다.”

지훈은 송 실장의 손을 굳게 잡고 단상에 올랐다. 야유가 쏟아졌다. “보도블록이나 깔 거면 장관 그만둬라!”, “미래 기술을 포기한 책임을 져라!”

지훈은 모든 소음을 뚫고 발언했다. “의원 여러분. 정치가 할 일은 신기루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매일 걷는 발밑의 돌멩이를 치워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국가의 품격입니다. 우리는 가장 낮은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전광판의 실시간 여론이 ‘해임 반대 75%’로 치솟았다. 숫자를 움직인 것은 국민의 발밑을 보겠다는 지훈의 진심이었다. 해임 건의안은 압도적 표차로 부결되었다. 지훈은 방청석 멀리서 중절모를 고쳐 쓰는 도헌을 보았다. 도헌은 소리 없이 웃으며 주머니를 툭툭 쳤다. 사탕이 아직 많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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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광장의 매듭과 완성된 수업

국회 밖 광장에는 기이하고도 감동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수만 명의 시민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옆 사람의 신발 끈을 서로 묶어주기 시작했다. 청년이 미화원의 신발 끈을, 경찰이 대학생의 운동화 끈을 매어주었다. 무릎을 굽히는 이 행위는 그 어떤 연설보다 강력한 언어가 되었다. 광장은 거대한 신뢰의 매듭으로 변했다.

그 뒤, ‘발밑 행정’은 전면 재편되었다. 관료들은 현장으로 나갔고 도시의 문턱은 사라졌다. 상인들은 지훈을 보면 반갑게 외쳤다. “어이, 박 반장! 이번엔 어느 골목 끈 묶어주러 왔어? 여기 아주 짱짱해!” 지훈은 넥타이보다 무거운 책임의 매듭을 매일 느꼈다.

한 달 뒤, 박 장관은 다시 홀로 4호선에 올랐다. 노약자석 근처에는 익숙한 중절모의 도헌이 있었다. 지훈은 반대편 취준생의 풀린 신발 끈을 보았다. 그는 조용히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정성껏 끈을 묶었다.

“매듭이 야무지구나. 이제야 장관 노릇 제대로 하네. 끈을 잘 묶어야 넘어지지 않는 법이지.”

도헌이 다가와 사탕 하나를 지훈의 손바닥에 쥐여주었다. 스승이 지켜낸 신념이 제자의 손에서 다시 새로운 매듭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선생님, 이제 저 손톱 안 물어뜯습니다. 발밑을 보고 있으니까 불안하지 않거든요. 어디에 서 있는지 비로소 분명해졌습니다.”

도헌은 제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번 인생 시험은 만점이다. 정치는 결국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거란다. 그게 바로 수업의 완성이지.”

지하철 문이 열리자 수많은 ‘반장’들이 각자의 길로 걸어 나갔다. 전광판에는 보도블록 수리 완료 소식이 흘렀다. 낮은 곳에서 시작된 변화가 이제 세상을 움직이고 있었다. 열차의 고동 소리는 이제 내일을 향한 희망처럼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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