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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킴 디자인 Aug 29. 2024

메리언 앤더슨 홀, 명명권

헌정 소식, 공연장의 이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공연홀은 6월 8일 공식적으로 메리언 앤더슨 홀(Marian Anderson Hall)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오케스트라의 이사회 의장을 지낸 금융가 Richard Worley 와 그의 아내이자 인권 변호사 Leslie Miller가 약 340억 원(2,500만 달러)의 기부금을 내고 명명권을 받았고 이 부부는 흑인 성악가인 메리언 앤더슨 (Marian Anderson)의 이름으로 공연장을 명명하기로 하였다.




공연장은 명명권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기업에 명칭을 대여/양도한다. 국내의 경우, 우리은행은 예술의 전당 실내악 공연장에 45억원을 지원하여 IBK챔버홀이란 이름을 20년간 사용할 수 있었다. CJ 토월 극장도 CJ를 붙일 수 있게 하는데 150억 원을 지원했다.


링컨센터의 '애버리 피셔 홀(Avery Fisher Hall)은 레코드 회사 창업자이자 드림웍스 대표이며 세계 최고의 현대미술 컬렉터이기도한 데이비드 게펜이 1,300억 원(1억 달러)을 기부한 후 영구 명명권을 갖게 되었고 이후 데이비드 게펜 홀로 불리고 있다.


장소가 불릴 때마다 브랜드의 인지도는 높아지고, 기업은 문화 서포터의 이미지를 쌓는다.



         좌: Richard Worley & Leslie Miller ⓒ Lifestyles Magazine. 우: 메리언 앤더슨 홀 오프닝



이 부부의 명명권 헌정 소식은 그러한 이유로 특별하다. 이 둘의 터전인 필라델피아 사회와, 오랫동안 지원해 온 음악, 그 교집합에 속한 상징적 인물인 메리언 앤더슨에게 공연장의 이름을 헌정하는 모습은 울림이 있다. 시대를 아우르는 가치를(축적한 자산의 쓰임새를 결정할 정도로) 귀하게 여기는 리더의 모습을 본다.


한 인터뷰에서 Richard Worley 는 “사람들이 ‘메리언 앤더슨 홀에서 만나요.’라고 할 때마다 그녀의 용기, 음악적 업적이 회자할 것이다. 앤더슨은 일생동안 투지와 우아함으로 차별에 맞서 승리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좌: 링컨 기념관 공연, April 9, 1939 ⓒ Hulton Archive/Getty. 우: 메리언 앤더슨의 리사이틀을 듣기 위해 모인 75,000명의 청중 ⓒ FDR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전설적인 콘트랄토이자 인권운동가인 메리언 앤더슨(1897~1993)은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흑인 최초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섰다. 그녀는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당시의 미국을 떠나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에서 116회의 리사이틀 가졌다. 잘츠부르크의 연주회에서 마에스트로 토스카니니는 메리언의 음악을 듣고 ‘'100년에 한 번 있을 법한 목소리’라고 말한다.


미국으로 돌아온 메리언은 티켓 파워 3위에 오르는 인정을 받는다. 하지만 대중의 색안경과 사회의 불평등은 변함이 없었다. 로스앤젤레스의 최고급 호텔에서 머물렀을 때조차도 그녀는 다이닝룸의 입장을 제한받았다. 뉴저지주의 프린스턴에서 연주회를 할 때는 호텔의 숙박이 거부된 메리언에게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자신의 집에 방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둘은 평생의 우정을 쌓는다.



역사적인 사건은 1939년에 일어난다. 워싱턴 DC의 컨스티튜션 홀에서 계획했던 공연이 보수적인 여성단체의 보이콧으로 무산되었고 매체들은 이 사실을 크게 다룬다. 그 단체의 회원이었던 Eleanor Roosevelt 영부인은 공식적으로 단체를 탈퇴하면서 진정서를 제출한다.


“위대한 아티스트의 공연을 보이콧한 단체의 입장에 반대한다. 이들은 계몽의(enlightened) 길로 모두를 안내할 기회가 있었지만 실패하였다." 영부인은 이 단체의 액션을 히틀러의 정치 행태에 비유하며 분노하였다. 그후 엘리노어는 워싱턴 기념탑 (Monument)이 직선으로 보이는 링컨기념관의 야외에서 그녀가 공연하도록 지원하였다. 이 음악회에서 앤더슨은 비애가 섞인 목소리로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과 "America"를 열창한다. 이곳에 75,000명이라는 인종을 아우르는 관중이 모였으며 역사적 군집으로 회자된다. 




좌: 음악감독 유진 오먼디와 함께, 1938년 ⓒ Adrian Siegel Collection. 중앙: 대통령 집무실에서 존 F. 케네디와 함께, 1962년 ⓒ Philadelphia Orchestra Archives. 우: 유엔 인권 위원회, 1964 ⓒ Alamy




좌: 매리언 앤더슨 홀 헌정 기념 음악회, June 8, 2024 우: 이날 공연했던 성악가 오드라 맥도널드과 지휘자 야닉 네제 세갱 ⓒ Pete Checchia / The Philadelphia Orchestra


아이젠하워와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 등 여러 무대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 메리언은 유엔 인권위원회 대표단으로 한국전쟁 당시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은음을 내는 콘트랄토로 분류하지만, 소프라노의 고음과 바리톤의 낮은음까지 낼 수 있는 희소성이 있다. 여러 음반을 스트리밍으로 들었을 때, 흑인 영가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바흐의 아리아나 슈베르트의 가곡도 색다른 감동을 주었다. 오래된 녹음 상태 특유의 아날로그적 감성도 느낄 수 있다.


펜실베니아주는 2024년 6월 8일을 “메리언 앤더슨의 날”로 정하였고 공연장에서는 기념 콘서트가 개최되었다.




“메리언 앤더슨은 평생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메리언 앤더슨 홀의 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예술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홈페이지


 "그녀는 우리의 미래를 인도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북극성이 될 것입니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더 다양한 연주자와 작곡가를 포함하면서 클래식 음악의 청중을 넓혀왔습니다. 우리는 메리언 앤더슨의 지속적인 현존이 이 홀에 있다는 기쁨과 함께 계속 공연을 할 것입니다."  - 야닉 네제 세갱,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 




메리언 앤더슨이 간절히 원했던 포용적인 미래는 도래했을까. 이 헌정 소식으로 우리는 조금 더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메리언 앤더슨 홀, 명명권 헌정의 사례 © 2024 

by Yoori Kim is licensed underCC BY-NC-ND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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