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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질 en axor
Oct 27. 2022
2년 전 처음 병원진료 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듣는 얘기, 그리고 변함없이 못 지키는 얘기가 바로 "술 끊으세요"였다. 사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긴 했다. ㅆㅂ 즐거운 일 하나 없는 인생에 유일한 낙이 자기 전 한 잔인데 그것도 못하냐.
그래도 성의는 보여야겠으니 하루 한 잔 하던 걸 이틀에 한 잔으로 줄이긴 했다. 근데 이건 진짜 엄청난 성의를 보인 거라고. 왜냐 하면 '자기 전 한 잔'이라는 게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딱 한 잔이거든. 술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주량이 약한 (억울한) 체질이라, 진짜로 하루 한 잔밖에 안 마신다. 근데 그걸 이틀에 한 번씩 참은 거라고. "어이구 그래 대~단한 성의다"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야, 누가 너한테 커피를 이틀에 한 잔만 마시라고 해봐라. 나만큼 잘 참았을 거 같냐?
어쨌든 원래 술이 약했던데다가 평소 트레이닝 횟수마저 줄었으니 간이 안심을 하는 것인지, 주량이 확 줄어든 게 문제다. 여럿이 마시는 술자리에서는 티가 더 잘 난다. 술은 마시다 보면 는다던데, 오늘의 내 주량은 나도 알고 상대도 알던 그 주량이 아닌 것이다. 어느 순간 좀 취한 것 같다는 생각을 서로 느끼긴 하는데, 아직은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기회에 똑똑히 말하는데, 이 싸람들아. 아무리 혀가 안 꼬였어도 "나 안 취했어!"라는 말은 제발 곧이 곧대로 믿지 말라고.
오늘도 그렇다. 명동에서 마신 후 지하철 3호선을 타야 하는 내가, 걷다 보니 바로 옆 을지로3가역을 두고 시청역까지 온 것에 대하여, 어쨌든 지하철은 탔으나 충무로가 아닌 충정로역에 내린 것에 대하여, 그러고는 왜 3호선이 아닌 5호선이 지나가는지 고민한 것에 대하여, 그나마 보라색과 주황색을 구분할 정신이 있음에 스스로 기특해 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 엄청난 여정을 단톡방에 토로했는데 아무도 걱정하지 않더라고. 걱정이 뭐야, 비웃을 거면 데리러와서 비웃으라는 내 코멘트에 30분째 아무도 답이 없다. 썩을 놈들. 그럴 거면 평소에 찝적거리지나 말든가.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술이 무서운 이유는 취하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 깨기 때문이라는 거.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던가. 신나게 술마시고 나면 깰 때 너무 괴롭다. 숙취를 말하는 게 아니라 우울감을 말하는 거다. 묻어뒀던 감정들이 너무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만큼 더 힘들고, 그렇다고 남들에게 괴로움을 토로하면 주사 그 이상으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결국 오롯이 혼자서 감당해야 할 몫인 거지. 그렇게 집 앞 지하철 계단을 올라오지 못하고 웅크린 채 몇 시간을 보내기를 여러 번. 이제는 누구에게도 도움 같은 건 청하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서 왜 또 술을 마셨느냐고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그래도 오늘은 나름 괜찮았다. 충무로역과 충정로역을 헷갈린 것 말고는 집까지 잘 왔고, 지하철 계단도 잘 올라왔고, 오자마자 강아지 밥과 물도 줬다. 이제 눕는다. 씻는 건 좀 이따가 하고, 일단 조금만 울다가 자자. 슬퍼서 우는 게 아니고 그냥 눈물이 나는 거니까 딱히 위로는 필요 없다. 지하철에서 울음이 터지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야. 좀 있으면 괜찮아지니까 기다리자. 내일 아침 눈만 안 붓길 바라면서.
좀 한심하긴 해. 이럴 줄 알았으면서 술은 왜 마셨니. 그렇지만 그거 알아? 가끔 이렇게 격한 감정변화를 느끼는 것도 밋밋한 일상에 조금 활력소가 되거든. 꾸준히 계속 우울할 것이냐, 가끔 격하게 슬플 것이냐. 뭐가 더 나은 건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술 마시며 떠들 땐 즐거웠으니까 됐어. 의사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나는 술 안 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