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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Jun 04. 2020

멜론과 먹방

내 경험상 카페에서 들려오는 음악은 대부분이 멜론 탑 100(아니면 빌보드 탑 100)이고 거의 소음 공해에 가까운 수준인데, 이러한 음악들은 단순히 듣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소음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즉 소음으로 소음을 차단하는 것이야말로 카페에서 사용되는 음악들에 주어진 진정한 기능인 셈이다. 여기서 음악은 그것의 반대말인 음소거에 도달하게 되고, 따라서 음악=음소거(무음)가 된다.

그런데 이는 이미 존 케이지가 4분 33초에서 선취한 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존 케이지는 1952년에 청중들 앞에서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들려주지 않았다. 따라서 존 케이지를 포스트 모더니스트이고, 사기꾼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술 자체를 그것의 본연의 기능에 해당하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으로부터 박탈하는 것이 오늘날 가능하다는 점이며, 자본이야말로 그것을 무리 없이 실행할 수 있는 현대적 '주체'라는 사실이다(인간이 과연 주인=주체일 수 있을까?). 따라서 이런 상황을 가정해볼 수도 있겠다. 한 명의 음악 애호가가 카페 주인 혹은 점원에게 지금 카페에서 트는 음악은 진정한 음악이 아니라며, 즉각 중단할 것을 요청하는 장면을 말이다. 하지만 음악 애호가가 주장하는 예술의 진정성이라는 개념은 곧장 자본의 논리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의심이 간다면 당신이 내일 직접....

이러한 요구가 즉각 관철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즉 카페 측에서 당신을 일종의 괴짜 다루듯이 대하고, 당신의 요구를 일종의 헤프닝으로 치부할 것이다. 왜냐하면 카페에서 음악을 트는 것은 '상업적으로 자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의심해봐야 할 대상은 총 2가지가 아닐까. 과연 '소비자가 왕=주체'일까 하는 의문이 그 중 하나이며(왜냐하면 오늘날 주체는 자본 그 자체이기에), 다른 하나는 오늘날 자연화된 것들에 대한 진지한 반성 또는 성찰이다. 도대체가 인간 세상에서는 자연스럽다는 느낌 자체가 일종의 개념이기 때문이다(즉 언어화된 문화 속에서 자연이라는 것은 하나의 단어 또는 개념으로 취급될 뿐이다).

페미니즘이 본격화되기 이전에는 자연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던, 인간의 성욕을 한번 들여다보자. 어떤 과학자에 의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테스토스테론이 활성화되는 정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에 의하면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밝히는 사람'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것이다. 물론, 주지하다시피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만 섹스를 밝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도 성욕이 강할 수 있는데, 사회화 이전에 태생적으로 성욕이 강한 사람도 있을 테지만, 오히려 '사회적 지위가 낮기 때문에' 성적인 차원에서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없는 성욕'을 자신의 성행위를 통해 활성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동물의 사회성에 모종의 방점을 찍는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인간이 자연 속 동물 중 하나라는 것을 부정하면서도, 그러한 인간이 자연적 동물성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즉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모순인 셈이다. 물론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도 있지만 (인간의) 사회=(동물의) 무리는 아니며, 사회와 무리의 차이점이 발생하는 곳은 무릇  언어를 질료로 삼는 정치적 공간이다. 하지만 러한 정치적 공간 또한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경향이 강해지는 시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 가능해진다. 먹방은 정치적인가? 대관절 먹방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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