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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Feb 25. 2021

시, 알다가도 모를 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황인찬

 시란 무엇인가?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어를 읽듯이 시어에 접근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는 시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시어와 일상어를 구분할 줄은 압니다. 김수영의 시에서 “풀이 눕는다”라는 문장을 접할 때, 우리는 풀이라는 단어를 일상적 맥락으로부터 분리한 뒤, 다른 차원에서 바라봅니다(예컨대 시어로서 ‘풀’은 실제 풀이 아닌, 민초(민중)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식으로 말이죠).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시를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가 시를 읽는 것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고요. 오히려 정반대이겠죠. 시를 모른다는 사실이야말로 시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어도 일상어에 관해서만큼은 잘 안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일상어로부터 시어를 분리하는 위와 같은 관점을 반박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니체에게 언어란 ‘은유와 환유로 이뤄진 기동부대’입니다. 즉 언어 자체가 이미 시적 비유인 셈이죠. 자신의 손가락(언어)으로 달(실재하는 대상)을 가리킨다고 믿던 사람이, 그러한 손가락 자체가 이미 구부러져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면?     

 

 “나는 말한다. 이 여인이라고. 휠덜린, 말라르메 그리고 시의 본질을 시의 주제로 삼는 모든 시인들은 명명의 행위에서 염려스러운 경이를 보았다. 말은 나에게 말이 의미하는 것을 주지만, 먼저 그것을 지워 버린다. 내가 이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녀에게서 뼈와 살로 된 현실을 몰수하여 부재하게 하고 없애 버려야 한다. 말은 나에게 존재를 주지만, 존재를 박탈당한 존재를 준다.”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모리스 블랑쇼, 그린비, 2013, p. 42)     


 누군가를 언어로 공격하는 일을 ‘언어폭력’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블랑쇼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언어 자체가 이미 폭력이라고 하는 것 같아요. ‘구부러진 손가락(왜곡된 언어)’으로 지시된 달과 명명 행위로 인해 “뼈와 살로 된 현실을 몰수”당한 저 여인은 얼마나 억울할까요? 노자老子식으로 말하자면, 달은 ‘달’이 아니고, 여인은 ‘여인’이 아닌데 말이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인에게는 일상어에 의해 억압되어 있던 실제 대상들(달과 여인)을 구출하는 임무가 주어지게 됩니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일상어)는, ‘약속’이기 때문에 관습화된 지각방식을 사회구성원들에게 강요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언어적 관습에 사로잡힌 인간을 양식장에 갇힌 물고기에 비유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시어는 일상어라는 양식장의 그물코를 찢는 날카로운 창에 비유할 수도 있을까요. 여전히 '시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지만,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무엇을 하는가? 시인은 언어를 공격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중의 관습화된 지각방식을 공격합니다.      


 시클롭스키는(여기서부터는 이장욱 시인의 책 <혁명과 모더니즘을 참고했습니다) 이러한 미학적 전술을 ‘낯설게 하기’라고 명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인은 ‘독서’를 ‘저자와 독자 사이에 이뤄지는 격렬한 악수’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때 독서는 단순히 눈으로 읽는 시각적인 행위에서, 손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촉각적인 행위로 변형됩니다. 더 나아가 기존의 저자와 독자 사이의 관습적인 위계 관계는 ‘악수’라는 표현을 통해서 동등한 관계로 전복됩니다.      


 이러한 시적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독서’라는 단어 또는 행위를 다른 방식으로 지각하게 합니다. 시클롭스키에 따르면 “말은 사물입니다.” 말은 단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지각되는 사물이기도 합니다. 시를 낭독하는 사람은 사회적 약속인 언어로 청중들과 소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입속에 있는 혀끝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내밀하게 터치합니다.     

 

 아래는 오늘 소개할 황인찬 시인의 시입니다.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황인찬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우리는 시어로서의 백자가, 일상어로서의 백자와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이 시에서 백자는,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백자는 “수많은 여름들”이 될 수 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그것들”이 될 수도 있고, 시적 화자의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을 가리킬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백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하신 분들이 여전히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답은 영원히 사라졌는데, 5연에서 볼 수 있듯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시적 화자가 이미 사라졌기 때문입니다(“나는 사라졌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 서 있었다 /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에서, 화자인 “나”가 처한 상황과도 유사하지 않나요? 백자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순간, 독자 또한 (2연에서처럼), 대답 없는 백자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부지불식간에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진정으로 놀라운 점은, 이토록 무수한 것들로 변신할 수 있는 백자가 여전히 “백자”라는 하나의 단어로 남아 있는다는 사실입니다. 손오공이 나무 막대기로 변신하든, 아리따운 미녀로 변신하든, 손오공은 여전히 ‘손오공’이잖아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랑의 방식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이라는 한 단어 안에 무수한 사랑의 색채들을 밀어 넣습니다. 그럼으로써 ‘사랑’ 안에 무엇이 남습니까? “남습니다 / 아무것도 없음이”(<영원한 자연>) 삼원색을 모두 합치면 검은색이 남는다고 하죠.      


 어쩌면 사랑은 빨간색이 아니라 검은색에 가깝지 않을까요. 모든 빛깔을 빨아들이는 ‘사랑’의 내부는, 어쩌면 어두운 빈 공간일지도 모릅니다. 무한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무無에 가까워지는,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처럼 말입니다.


 사랑을 정의될 수 없는 무엇으로 남겨두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암흑지점입니다 .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없는 달의 뒷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를 통해 “뼈와 살로 된 현실을 몰수”당한 이후에도 여전히 명명되지 않는 여인의 그림자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이에 대한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자 중언부언의 풍경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백처럼 불가해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또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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