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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Apr 12. 2021

SNS를 할수록 우울해지는 이유

<과잉존재> 책리뷰

주말에 넷플릭스에서 <소셜 딜레마>를 봤습니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 따르면 미국의 청소년 자살률이 급증하던 2011년은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가 급속도로 성장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먼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률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IT 업계 거물들이 주로 하는 기만적인 행동 중 하나는, 자신의 어린 자녀들에게만큼은 스마트폰 사용 시기를 최대한 늦춘다는 것입니다. 안데르스 한센에 의하면 인스타그램은 일종의 도파민 공장입니다. 우리는 SNS에 끊임없이 주의력을 빼앗깁니다. IT 기업들의 최대 목적은 ‘어떻게 하면 사용자들을 우리 플랫폼에 오래 머물게 하는가’입니다. 사용자들이 머무는 시간 자체가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관심상품만이 아니라 관심 그 자체도 돈이 되는 시대입니다.


이번 리뷰에서 다룰 <과잉존재>의 저자 김곡은, 이 시대를 ‘관종의 시대’로 정의합니다. 다음날 아침에 이불킥을 하는 중2병과는 달리 관종은 칼차단합니다. 중2병은 허세를 부리는 반면 관종은 어그로를 끕니다. 타인을 대행하고자 하는, 그래서 타인의 ‘좋아요’에 목매는 관종에겐 이불킥을 날릴 만한 시간도 없습니다. 반성의 주체가 되는 자기 자신을 타인의 시선 속에서 이미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SNS 시대의 비극입니까? 그렇습니다. 관종에게 타인의 관심과 ‘좋아요’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입니다. 관종은 악성 댓글을 남기고 표백제를 마시고 급기야 사타구니에 불을 지르지만, 그것은 오로지 좋아요의 운명에 순응하기 위해서입니다.


SNS는 이러한 관종의 성질에 불을 붙이는 기름입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고 개방된 것처럼 보이는 사이버 스페이스는 실은 긍정성으로 불타는 지옥입니다. 일종의 칭찬 감옥’이랄까요? 이처럼 좋아요 아니면 싫어요(무관심)로 표현되는 세계에는 양극단만이 있을 뿐 그 중간이 없습니다.


따라서 세계는 점점 1과 0으로 비트화된 디지털을 닮아갑니다. 이것은 양극성 장애나 경계성 성격장애를 유발하는 형태로 인간을 퇴행시킵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대한민국 우울증 환자가 100만명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또한 20대 여성 기분장애 환자가 4년새 2.5배가 증가했는데요. 기사 원문(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989726.html)을 잠시 빌려오자면 “기분장애는 비정상적 기분이 장시간 지속되는 장애를 넓게 일컫는 것으로, 우울증·양극성 장애 등을 포함한다.”


양극단에 있는 조증(1)과 울증(0)이 서로를 되먹이며, 자아의 통합 능력을 방해합니다. 자아의 통합 능력? 말이 조금 어려운데, 일종의 일관성, 자아의 일관된 기분 상태 정도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기분장애는 이러한 일관성을 방해하는 정신 질환이죠.


한 마디로 말해서 기분장애란 비일관적인 기분 상태가 지속되는 현상입니다. 반려견과 반려묘를 예로 들어봅시다. 강아지는 주인의 반응에 일일이 반응합니다. 반면 (반려묘를 키워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고양이와 주인 사이에는 일종의 경계가 있어요. 아무리 주인이라고 해도 그 경계를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집사’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SNS와 SNS 사용자 중 누가 주인일까요? 확실한 것은 관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관종은 좋아요라는 먹이와 댓글들의 무수한 손짓에 일일이 반응하는 강아지에 가깝죠.

자, 그러나 우리는 동물인 동시에 인간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헤겔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동물”입니다. 인간성은 처음에 동물성을 부정함으로써 출현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대립물(동물성)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죠. 인간성을 정의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늘 인간성 바깥을 경유해야만 합니다.


관종을 정의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우리 모두가 일정 부분 관종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체가 상황을 결정한다.”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문장인데요. 오늘날 SNS라는 매체를 거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스콧 갤러웨이에 따르면 구글이야말로 오늘날의 신입니다. 중세인들이 사제들에게 질문했듯이 현대인은 구글을 거치지 않고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런 시대에 누가 관종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기 PR을 해야 하고 전시해야 하고 검색어를 입력함으로써 빅데이터에 스스로를 노출시킵니다, ‘좋아요’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결국 좋아요를 받지 않은 게시물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긍정성의 지옥은 실제로는 관종들의 거대한 전장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기분 장애와 같은 정신 질환은 참전군인들에게 발병하는 PTSD, 즉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로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잘 아시겠지만 프로이트는 1차세계대전 이후 이러한 PTSD에서 초자아라는 개념을 발견합니다. 다만 오늘날의 초자아는 프로이트의 부성적 초자아보다는 멜라닌 클라인이 제창한 모성적 초자아를 닮았습니다.


부성적 초자아가 모든 것을 금지하는 권위적 아버지라면, 모성적 초자아는 모든 것을 오냐오냐하며 긍정해주는 ‘나쁜 어머니’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나쁜 어머니에 대한 해결책으로 ‘밀당’을 주장합니다.


“나쁜 어머니가 요냐오냐하며 경계도 없지만 믿지도 않는 인간을 길러내는 반면, 좋은 어머니는 밀당까꿍하여 경계를 지켜서 믿을 줄도 아는 인간을 육성하는 것이다. 확실히 요가와 명상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거기엔 이런 밀당의 교육과 저항의 연습이 없다. 밀당만이 오냐오냐에 저항한다.” -P.174-


밀당까꿍이라니... 밀당한 뒤 다시 까꿍한다는 뜻으로 저자가 만든 조어겠죠. 아무튼, 무조건적인 오냐오냐와는 달리, 밀고 당기기는 아이와 어머니 사이의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물론 이 과정은 아이에게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엄마와 아빠는 아이들의 숭배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아이들이 자신들을 보통의 인간 존재로서 보아주기를 희망하면서, 이상화와 증오의 극단들을 견뎌”냅니다. 신뢰는 SNS와는 달리 자아의 경계를 철폐하지 않습니다. 즉 과잉존재를 낳지 않습니다.


“멜라니 클라인의 유작은 <외로움에 관해서>였다. 이 짧은 논문에서 그는 인간에게 외로움은 결코 제거되지 않으며, 대상세계 속에서 외로움은 필요하다고까지 말한다. 왜냐하면 외로움이란 자아와 대상이 서로에게 타자로서 분리되는 고통, 그로써 자아도 대상도 결코 완전할 수 없음을 깨우치는 고통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완전하지 않은 대상만 신뢰의 대상이 된다. 완전한 것은 믿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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