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작품은 <트랜짓>에 이어 이번이 2번째였습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장면들은 물론, 특히 마지막 엔딩씬은 정말이지 압도적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연기해야 하는 사람은 얼마나 외로울까?'.....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바로 눈 앞에 있는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 조니에게, 과거의 자기 자신을 연기해야 하는 여주인공 넬리의 곤궁 때문입니다.
아우슈비츠에서 훼손된 그녀의 얼굴은, 2차세계대전으로 인해 파괴된 전후 유럽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피닉스>는 유럽이 앞으로 어떻게 자기 자신을 복원/재연해야 하는지 질문하는 작품으로도 읽힙니다.
물론 여기서 재연 가능성은,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연기'라는 예술적 형식으로 묘사됩니다. 즉 유럽=넬리는 참상 이전의 자기 자신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인 셈입니다. 문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유럽 도시처럼 돌아온 아내 넬리가, 조니의 눈에는 너무나도 낯설게 비춰진다는 점이죠.
만일 카메라가 감독의 눈에 해당한다면, 감독의 눈이 도달하게 되는 곳은 평화로운 유럽과, 전후 폐허가 되어버린 유럽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시차입니다. 마지막씬에서 넬리가 깨닫는 것 또한 그녀가 모방하고자 했던 과거의 자신(조니의 아내)과의 내적인 간극이죠.
플라톤 이후 철학에 대한 예술의 명증성은 언제나 의문시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넬리가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도달하게 된 차가운 진리 때문이 아닙니다. 넬리의 아름다움은, 그녀가 과거의 자기 자신과 결별하는 방식/형식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고 느꼈습니다.
넬리는 결코 남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이별 선언은 어디까지나, 노래라는 예술적 형식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저는 여기에 크리스티안 페촐트만의 모종의 균형 감각이 존재한다고 느꼈습니다.
니체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조화라고 부를 만한 것이 분명 <피닉스>에는 있어요. 물론 저는 이 영화를 살짝살짝 졸면서 봤기 때문에, 어쩌면 영화가 영화를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예컨대 소설가 정지돈은, 졸면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 또한 영화를 감상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 같아요. 저로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주장 또는 독법입니다.
.......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