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레스토랑 문화
지극히 개인적으로, 프랑스에서 살면서 느끼는 이 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여성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것은 16년 전 이 나라에 막 도착했을 때,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말도 통하지 않았음에도 막연하게 느꼈던 묘한 안도감의 근원이었다. 프랑스가 문화적으로 남성보다 « 여성 »에 특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은 일상의 자잘한 일들 속에서 자주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프랑스어로 남성과 여성의 존칭은 각각 무슈와 마담인데, 이 « 신사, 숙녀 »를 지칭할 때 언제나 우선적으로 여성을 먼저 부른다. 안내방송에서 사람들을 부를 때, 이들은 « 마담, 무슈 »로 부르지 절대 « 무슈, 마담 »으로 부르지 않는다. « 신사, 숙녀 » 가 아닌 « 숙녀, 신사 여러분 »이 정형인 것이다. 이는 또한 모든 공식적인 서신에서도 그렇다. 받는 상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몰라서 둘 다를 불러야 할 경우 그 편지의 첫머리에는 언제나 마담을 먼저 쓰고 무슈를 쓴다. 식당에서 음식을 서빙할 때도 그렇다. 몇 명이 앉은 테이블이든, 연장자가 많은 가족 테이블이든, 상하 관계가 뚜렷한 사람들의 테이블이든 상관없이, 여성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서비스가 제공된다. 남편과 함께 외출을 해도 이런 여성 위주의 사고를 자주 느낀다. 물건을 사러 가도 점원은 늘 « 마담 »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먼저 묻고 귀 기울이는 느낌이고, 주도권이 여성에게 있으리라 예측하고 대화한다는 느낌을 자주 받기 때문이다. 프랑스 여성들은 대체로 당당하고 주관이 뚜렷하며 독립적이지만, 사회 문화적으로는 « 약자 »로 여겨져 보호받고 존중받는다는 것이 재미있다. 여성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여성을 천하게 여기는 사회보다 여성으로서 살아가기에 훨씬 나은 것은 당연하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안에 떨어야 하는 사회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요즘엔 소위 이 « 레이디 퍼스트 »의 문화에서도 살짝 짜증이 날 때가 있다.
그 뒤에 숨겨진, 여성은 약자처럼 « 돌봐주어야 할 » 존재라는 생각, 이에 따라 고착화되었을 남성의 취향과 여성의 취향에 대한 편견들 때문이다. 아마도 이 사회의 여성에 대한 배려들이 70년대 여성 해방 운동 이후에 이루어진 남녀평등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보다는 여성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일종의 « 품위 있는 매너 »라고 생각하는 부르주아 귀족문화에서 비롯되었기 때문 일 것이다. 그런 생각은 특히 그 « 옛날식 매너 »가 변치 않고 보존되고 있는 곳에서 마주치게 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곳이 바로 프랑스의 레스토랑들이다.
식당에 갈 때마다 가장 자주 벌어지는 일이면서도 매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 와인 테이스팅이다.
식당에서 와인을 병으로 주문하면 서버는 손님 앞으로 와인을 가져와 주문한 그 와인이 맞는지 우선 확인하게 하고, 그 앞에서 와인병을 열어 맛보게 한다. 원했던 그 와인의 맛이 맞는지, 혹시 디캔팅이 필요한지, 온도가 적당한지, 상하지는 않았는지를 직접 맛보고 판단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때 그 테이블에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대표로 맛을 보게 되는데 이 « 대표자 » 선정 과정에 자주 기분이 상한다. 보통 열 번 중 일곱 번쯤의 빈도로 서버들은 주저 없이 남편을 대표자로 여기고 그의 잔에 와인을 따라준다. 누가 테이스팅을 할 것인지를 묻는 빈도는 열 번에 세 번쯤이다. 단 한 번도 « 마담 »의 잔에 먼저 따라주는 경우는 없었다.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와인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으리라 짐작하고 오랫동안 별다른 불만은 없었는데 최근 들어 의문을 갖게 됐다. 우선은 아무리 외국인이라도 와인은 프랑스인들만의 문화가 아닌데 너무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이런 차별은 프랑스인 남녀가 마주한 다른 테이블에서도 자주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혹시 초반에 서버에게 직접 와인을 주문한 사람이 맛을 보도록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짐작도 해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각자에게 하나씩 돌아가는 음식 메뉴판과는 달리 테이블 당 하나씩만 배당되는 와인 리스트 메뉴판이 대부분 남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와인을 고르는 일은 두 사람이 상의해서 결정한다고 해도, 서버에게 직접 주문하는 일은 대부분 와인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남자가 하게 되는 거다. 와인 리스트를 보는 것도, 고르는 것도, 맛을 보는 것도 모두 남자의 일이라는 생각, 이 « 와인 문화 »가 아주 오랫동안 « 남성들만의 영역 »으로 여겨져 왔음을 알 수 있는 대목들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인터넷 상에서 이 부분에 대해 나와 같은 불만을 제기하는 프랑스 여성들의 글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는데, 와인 유통과 서비스업, 전문 소믈리에 여성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문제제기도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와인에 대해서라면 지식은 많지 않아도 애정은 그 누구 못지않은 사람으로서, 매번 와인을 고르는 일에 절반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여성이니 넌 잘 모를 거야 라는 선입견은 받아들이기 매우 곤란한 일이다. 프랑스에서는 전통적으로 남성이 « 알아서 » 골라주는 와인만을, 최고의 상태에서만 여성들이 마시는 것을 나름의 « 배려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배려가 차별로 느껴지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프랑스 고급 식당의 또 한 가지 성차별은 남녀의 경제력, 즉 돈과 관련이 있다.
파리에서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듯 하지만, « 가격 없는 메뉴판 »이라는 것이 있다. 처음 이 메뉴판을 받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자주 가기 힘든 최고급 식당에 처음 갔던 몇 해 전의 일이다. 남편과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판을 펼쳤는데, 어딘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가격이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당이 있나 싶어서 남편에게 물어보니 남편의 메뉴판에는 가격이 적혀있다고 했다. 알고 보니 프랑스의 고급 식당, 특히 옛날식 서비스를 하는 전통 부르주아식 식당들은 대접 « 받는 » 위치에 있는 손님들이 가격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가격이 가려진 메뉴판을 내놓는다고 했다. 참으로 섬세하고 감동적인 배려가 아닐 수없지만, 그 « 대접받는 »사람들의 카테고리 안에 « 여성 »이 자연스럽게 속해있다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가격 따위, 내가알 바 아니지, 그런 건 남자들의 일이랍니다 » 하며 천진하게 즐길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 숫자 없는 메뉴판은 마치 내비게이션 없이 여행해야 하는 낯선 동네 같아서, 결국 남편에게 요리 하나하나를 대며 « 이건 얼마야? 이건? » 을 한참 동안 소곤거리어야 했다. 지금도 그 메뉴판을 생각하면 손이 닿지 않아 긁지 못하는 등허리의 가려움증과 같은 답답함이 몰려온다.
비슷한 맥락에서, 보다 일상적으로 겪게 되는 답답한 상황 중에는 또 계산서의 문제도 있다.
프랑스의 식당은 계산을 식당의 입구에서 하지 않고, 앉은 테이블에서 하는 방식이라서 계산을 하겠다고 이야기하면 서버가 계산서를 가져다준다. 그런데 매번, 늘, 한결같이, 프랑스의 서버들은 계산서를 남편에게 주고 갔다. 물론 서버는 매번 « 반반 계산하나요? » 를 묻지만, « 누가 계산하나요? »는 묻지 않는다. 우리 부부의 경우 외식비 예산을 공동계좌에 넣어두고 쓰기 때문에 사실 누가 계산을 한다고 해도 상관은 없지만, 매번 남편이 본인 앞에 놓인 계산서를 들고 카드를 꺼내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남녀 사이에 더치페이는 할 수 있지만, 여성이 밥을 사는 일은 없다는 것인가? 그러면 안된다는 걸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일까? 왜? 이렇게 대부분의 여성이 일을 하고 경제력이 있는 사회에서 왜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실제로는 그럴 수도 없고, 그렇지도 않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래도 겉으로나마 여전히 여성은 경제적으로 배려받아야 하는 존재로 두고 싶은 걸까? 혹시 이런 식으로 여성을 경제적 영역에서 멀리 두고 남녀의 임금차별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닐까? 등등의 다양한 생각들이, 남편이 카드 비밀번호를 누르고 결제를 기다리는 몇 초 동안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불편하다면 내가 카드를 꺼내 « 내 밥값은 내가 냅니다! 나도 그만큼의 경제활동은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요! » 외치거나, « 잘못 짚으셨네요, 오늘은 내가 내는 날인데~ » 할 수도 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또 뭐가 있을까 싶어 쓴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만다.
그래도 이런 생각들이 나만의 투덜거림은 아닌 모양이다.
최근에 남편과 갔던 한 이탈리아 식당에서의 일이다. 와인을 한 병 주문했고, 그 식당의 와인 담당인 여성 서버가 다가왔다. 우리 두 사람에게 와인 라벨을 확인시켜준 그녀는 와인 병을 열고 자연스럽게 내 잔에 따라주었다. 묻지도 않고 나에게 테이스팅을 맡긴 첫 서버였다. 속으로는 놀랐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잔을 들어 신중하게 맛을 보고 좋다는 신호를 했다. 그녀가 멀어지자 남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 여자들의 연대가 드디어 시작됐군 » 하면서.
"이게 뭐라고, 연대 씩이나" 하며 웃었지만, 물론 기분은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요청한 계산서 또한 그 여자 서버가 가져다주었다. 계산서는 우리 두 사람 사이, 정확히 중간 지점에 놓였다. 그 날의 계산은 물론, 내가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카드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