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 4색 프랑스 청년들의 와인가게
클레르 + 파비엔 + 베르트랑 + 클로드
시작은 클레르였다. 루브르 학교에서 미술사 석사를 마친 후 파리 마레 지구의 갤러리에서 일을 하고 있던 클레르는 2012년, 마침내 결단의 시기가 왔음을 느꼈다. 늘 꿈꾸던 자신만의 갤러리, 젊고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하고 소개할 수 있는 나만의 갤러리에 대한 꿈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문제는 파리의 임대료였다.
젊은 무명작가들을 위주로 한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감당하기엔 너무 부담이 컸고, 결국 클레르는 갤러리와 함께 수익을 낼 수 있는 다른 사업을 병행하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레스토랑. 아버지부터 남동생까지 가족들이 모두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덕분에 그녀에겐 가장 친숙한 분야이기도 했다. 하지만 레스토랑 운영의 구체적인 현실을 들여다보니 그 또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수익은 날지 몰라도, 식당 운영이란 육체적, 정신적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라서 갤러리를 “겸한” 부업으로는 마땅치 않아 보였다. 그녀는 문득, 그렇다면 와인에만 집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익숙한 문화이기도 했고, 언젠가 정식으로 배워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길로 그녀는 일을 그만두고, 한 유명 요리학교의 와인 수업 프로그램에 등록한다.
파비엔은 클레르의 루브르 학교 후배이자 직장 동료였다. 학창 시절부터 뜻이 잘 맞았던 두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이 갤러리 프로젝트를 함께 꿈꿔왔고, 그렇게 동업을 결심한다. 두 사람은 발품을 팔아 파리 시내 곳곳으로 이 “갤러리 겸 와인가게”를 할 만한 장소를 물색한다. 와인가게 까지 합해지니 최소 두 배의 공간이 필요하게 된 상황, 물론 임대료와 자본금의 규모도 몇 배로 뛰었고, 마땅한 장소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여기에서 두 사람은 각각 한 명씩,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을 떠올린다. 베르트랑과 클로드였다.
네 사람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베르트랑은 파비엔 친구의 남편이다. 당시 베르트랑은 터키인인 아내를 따라 8년째 이스탄불에 머물고 있었는데, 우연히 시작하게 된 와인 사업이 커져 급기야 직접 와인을 만들기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 터키에서의 와인사업엔 한계가 있었고, 프랑스로 돌아와 사업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파비엔의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오로지 이 사업에 동참하기 위해 서둘러 파리로 돌아왔다.
클로드는 클레르와 와인 수업에서 만났다. 네 사람 중 가장 나이가 어리지만, 그에게도 와인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나름 인재들이 모인다는 파리 정치대학에서 석사까지 마쳤지만, 그는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오랫동안 방황했다고 한다. 좀 더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는 그 말에 다른 설명은 필요 없었다. 인문학, 사회과학 전공자에게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는 시대인 것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나 또한 인문학 전공자로서 오랫동안 비슷한 고민을 했으니까. 그는 언제나 관심이 많았던 와인을 배워보기로 했고, 그 수업 과정에서 만난 클레르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한다.
갤러리 옆 까브. 예술과 와인
마침 유기농 와인, 작은 규모의 와인이 파리에서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대형마트를 처음 맞이했던 부모세대가 정형화된 대규모 배급 와인과 맥주에 반색했다면, 프랑스의 현재 젊은 세대에게는 건강한 식생활이 중요해졌고, 재래시장, 직거래 상품들과 함께 유기농 와인이 인기를 끌었다. 그 붐을 타고 동네에는 1, 2 년 사이에 크고 작은 새로운 와인가게가 서 너 곳이나 새로 생겼다. 그 사이에서 이들의 까브 “바로-여기”는 갤러리와 함께한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오가는 와인가게에 비해 갤러리는 있는 듯 없는 듯 차분했지만, 그 예술의 기운 덕분으로 이 공간에 들어서면 왠지 모를 우아함이 느껴졌다.
네 사람 중 와인에 대해서는 가장 아마추어에 가까운, 주로 갤러리 일을 맡아하며 뒤늦게 와인의 세계에 입문한 파비엔은 이렇게 말한다.
잘 몰랐던 세계지만, 와인과 갤러리 일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어요. 토양, 품종, 제조방식처럼 와인이 만들어지는 모든 요소들에는 만드는 사람의 철학이 담겨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세계가 펼쳐지니까요. 그 또한 예술품이라 할 수 있죠. 게다가 요즘엔 병에 붙이는 라벨도 개성을 담기 위해 신경 써서 디자인을 해요. 와인의 맛을 보고 생각하고 토론하는 일에는 마치 아티스트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 같은 즐거움이 있습니다
각자의 취향, 각자의 와인
살아온 흔적이 다른 만큼 이 네 명의 친구들은 와인에 대한 취향도 매우 달랐다. 재미있는 것은 좋아하는 와인의 성격이 그들 각자의 히스토리와 닮아있다는 것이다.
내추럴 와인/ 클래식한 와인
클레어: 저는 자연스럽고 살아있는 와인이 좋아요. 보다 독창적인 세계를 지닌 와인이요. 예를 들면 한결같이 오크통 나무 향 만 강한 와인은 별로예요. 바이오 다이내믹 농법의 와인들은 기본적으로 자연 친화적이기도 하지만, 이런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너무나 매력적이죠.
베르트랑: 저는 여전히 클래식한 와인에 애정이 있어요. 어느 정도의 견고함을 갖춘 와인이요. 내추럴 와인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그 불균형성이나 유동성이 늘 신경 쓰여요... 이해하기 힘든 그 독창성이 불편할 때가 있고요.
파비엔: 저는 클레어와 비슷해요. 하나로 규정하기 힘든 와인, 뭔가 얘기를 걸어오는 와인, 자기 세계만의 세계가 있는 와인이 좋아요.
클로드: 음... 저는 그 둘 사이예요. 하지만 내추럴이건 클래식이건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완성도가 있는 잘 만든 와인이 좋아요.
가격과의 관계
베르트랑: 사실 완성도가 있는 와인들은 가격대가 높은 와인들이 많은데, 저는 가성비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괜찮은 와인이어도 가격이 너무 비싼 와인보다는 평균 이상의 맛이지만 가격도 합당하다고 느껴지는 와인을 선호해요.
클레어: 저는 가격이 중요하다고 생각 안 해요. 와인은 하나의 예술 작품 같은 건데, 그렇게 가격으로 좋다, 나쁘다를 판단할 수 없죠.
여기까지 듣고 나니, 대부분의 의견이 베르트랑과 클레어를 기준으로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직접 와인을 만들고 판매까지 해봤던 베르트랑의 구체성, 상업적 감각과 예술작품을 이해하고, 알리는 작업을 오랫동안 해왔던 클레르의 기획자적 감각의 차이일 것이다.
토론하는 와인
주관도 강하고 개성도 너무나 다른 네 명의 동업자다. 이들은 거의 모든 결정을 함께 하고 있다고 한다. 네 명이 늘 나와 있을 필요는 없다 보니, 모두가 함께 나오는 것은 한 주에 한번 점심때뿐이고, 보통은 각자의 스케줄에 따라 두 명씩만 근무한다. 가족 간에도 동업은 힘든 일이라는데, 혹시 경영에 불편함이 있지는 않을까 싶지만, 그들은 그렇기 때문에 온종일 문자를 주고받느라 전화기가 쉴 틈이 없다며 웃는다.
그 모든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늘 고맙고 소중한 존재인 것은, “일하는 시간에 비해 만족할만한 매출”이 나올 만큼 꽤 괜찮은 현재 상황 덕분은 아닐까? 어쩔 수 없는 속물인 내가 하는 추측이다.
제2의 삶
이 와인가게의 공동창업자가 된 이후로 삶에 변화가 있었냐는 질문 앞에서 모두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변화... 많은 변화가 있었죠...”라고 하면서도 각자 그간의 삶을 돌아보는지 누구도 딱히 말을 잇지 못했는데, 파비엔이 불현듯 정적을 깨며 말했다. “자유, 결국엔 자유로움을 느낀 것이 가장 큰 변화죠”라고. 그러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맞아. 책임도 물론 크지만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는 살면서 처음인 것 같아”라고.
당신들 각자의 제2의 삶이 너무나 근사하다고, 이 사업의 성격과 네 명의 조합이 너무 잘 어울린다는 내 말에 가장 연장자인 베르트랑은 웃으며 말했다.
“제2의 삶이요? 나는 벌써 한 제 4 의, 어쩌면 제 5 의 삶쯤 되는 것 같은데요?”
그러자 가장 젊은 끌로드가 받아쳤다.
“그래요, 저도 이제 곧 제3의 인생을 시작할지도 몰라요. 내겐 또 다른 꿈이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다. 제2의 삶이 있다면, 제 5의, 제 6의 삶은 또 왜 없겠는가?
이렇게 유동적인 와인처럼, 이렇게 토론하며 변화해가는 까브처럼, 인생도 생각하기에 따라 몇 번이고 새로운 시작이 있을 수 있는데...
어쩌면 이번 생은 아직 안 망한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