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Another sad song, Bandits OST
쓰여진 글을 씹어대는 날이 늘어났다. 왜 내 글은 매번 가라앉은 불행을 이야기할까. 왜 내 문장은 비에 젖은 길고양이 꼬리처럼 축 늘어져 달랑거릴까. 간결하고 가벼운 리듬의 글을 쓰고 싶다고 바라지만 그건 내가 모르는 언어의 형태다. 질척이는 글을 잘근잘근 씹는다. 이내 모든 게 지겨워졌다.
환희의 빛, 풀이 아닌 꽃, 어제가 아닌 내일, 젖은 비가 아닌 최소한 적란운 같은 거라도 적어 보자며 말간 화면을 바라봤다. 빈 공백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웃었다. 비웃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쩐지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들, 여전히 한가운데에 떠 있는 태양 같은 것들을 손등의 핏줄을 세워 찬양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지독한 멜랑콜리는 여전히 글 사이사이에서 일렁인다. 빛, 꽃, 내일, 적란운, 내가 꺼낼 수 있는 긍정의 극치 사이에서, 쉼표와 마침표 사이에서, 그것은 여지없이 고개를 내민다. 축축이 젖은 나무껍질 같은 문장들은 내가 아무리 잘근대며 낱말들을 씹고 게워내도 사라지지 않는다. 잘린 손톱만큼도 전혀.
시월의 어느 서점에서 조율을 마친 기타를 안고 그녀는 말을 시작했다. 보덴제에서 이 곡을 불렀던 적이 있어요. 밴디트 Bandits라는 영화에서 나온 노래인데, 혹시 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워낙 오래된 영화인 데다 유명하지 않아서요. 노래 제목은 Another sad song. 또 다른 슬픈 노래,라는 뜻인데요.
(숨을 고르고)
처음 영화 속 이 곡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자신에게 뭐가 문제인지 자꾸만 슬픈 노래를 만든다는 가사가 제 얘기 같아서요. 저도 밝고 긍정적인 노래를 쓰고 싶어서 그런 멜로디를 종종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자꾸만 슬픈 노래가 되더라고요. 한참을 그러다 결국엔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는 그냥 이런 사람이구나, Another sad song을 만드는 사람이구나 하고요.
(다시 숨을 고르고)
음악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시절의 공기를 부르고 냄새를 부르고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나게 하는, 음악만큼 순간을 환기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 생각해요. 참, 그때 기억나는 게 제가 한국 노래만 부르다가 처음으로 영어로 된 노래를 불러서인지 사람들이 점점 더 모여들었거든요. 그곳은 독일이었지만 오스트리아 스위스가 가까이 접해있어서 모여드는 돈들이 다양했어요. 유로를 제외하고는 독일에서 쓸 수 없으니 가방에 그대로 들고 돌아와 책상 서랍에 넣었어요. 그 동전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요. 그럼 이제 노래를 부를게요. 제목은 Another sad song입니다.
눈을 감고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짓던 그녀가 1번 플랫에 카포를 끼고 Em코드를 연주한다. Em- Am- D- G-Em-C-B7의 반복. 또 다른 슬픈 노래라는 제목과는 달리 시원한 포크풍의 스트로크 리듬이었는데 발랄한 리듬을 두고 슬픔을 노래한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했다. 그리고 곡이 끝날 즈음엔 그런데 그게 어때서, 했다. 또 다른 슬픈 노래면 어때서. 내가 하고 싶은 노래를 하고 쓰는 게 어때서. 내가 나를 이야기하는 게 어때서. 그게 다 뭐 어때서.
정해진 시간이 마무리될 즈음 나는 그녀에게 슬픔이 아니라고, 당신의 노래는 나에게 치유의 노래라 말했다. 고요한 시간에 머물도록 허락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자주 위로받았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어떤 말도 없이 그녀는 가만히 웃었다. 그녀의 노래를 닮은 웃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아. 그렇구나. 이제 그런 것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는구나.
그녀는 십오 년째 음악을 하며(음악을 한다라는 말이 멋지다, 문학을 한다 처럼) 수많은 구간을 지나왔을 것이다. 자기가 만든 노래 한 음절 음절과 지나고 머무는 호흡, 그 모든 것이 잔잔히 가라앉을 때까지 그녀는 곱씹고 되뇌었을 것이다. 분해하다 멈추다 다시 이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슬픈 노래 Another sad song라는 감각은 어디 즈음에서부턴가 그녀에게 작은 끄덕임으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아, 난 그런 사람이구나 아니면 그 비슷한 정도로만.
입안에 계속 머물던 잘근거림이 우연히도 그녀를 만나더니 그쳤다. 나는 더 이상 내 글을 씹어대지도 그래서 지겹지도 않다. 그녀가 그녀를 노래하듯 나 역시 나를 쓸 수밖에 없다고 여길 뿐이다. 그렇다. 나는 나를 쓴다. 그 밖에 내가 또 뭘 쓸 수 있을까.
서랍 속 동전들을 생각한다. 어디서 쇠냄새가 달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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