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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는 죽은 나무에는 집을 짓지 않는다

by 윤신


식물처럼 온몸으로 햇빛을 받으며 바다 곁을 걷는다. 그녀와 나. 월요일 한낮의 도로는 조용해서 작은 소리와 사소한 움직임에도 예민하고 다정하다. 백색 소음에 가까운 시간. 한 때 바다의 조각이었을 발밑을 두 다리로 유영하다 작고 낮은 어린 나무 사이에 까치가 지어놓은 집을 발견했다. 새는 왜 저렇게 몸이 가는 나무에 집을 지을까. 그것도 나무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둘레가 얇고 키가 큰, 그래서 바람이 불 때마다 휘청거리는 나무 그 꼭대기에다가. 저 멀리, 또 저 멀리에도. 비슷한 류의 나무에만 까치집(까치라 생각한 것은 그 근처에 보이는 새들이 모두 까치였기 때문이다)이 있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인간이 모르는 까치의 호오라던가 습성이라던가, 뭔가가. 우리는 촘촘히 지어진 둥지를 찬탄하며 바라본다. 바다였던 자리에 인간이 집을 짓고 그곳에 또 새가 집을 짓고. 시야의 모든 면들을 바람이 쓸어내리는 고요한 평일의 낮. 다시 우리는 걷고 그녀가 말했다.


새가 되고 싶어요 새가 되어 이곳저곳에 집을 짓고 자유로이 다니고 싶어요.

그러네요. 새가 되면 바다 앞이든 숲의 안이든, 마음에 드는 곳 어디든 살 수 있네요.

그리고 나는 웃었다.

그런데 보통 새가 되고 싶다고 하면 자유로이 날고 싶어서, 아닌가요?


새는 좋겠다. 자유로이 날고 집도 마음대로 짓고. 인간이 만든 경계와 수치 너머 어디든 나뭇가지를 물고 집을 지어다 살고. 물론 그 나름의 고충은 있겠지만 거기까지는 차마 알지 못하고. 얼마 걷지 않고 우리는 곧 남이 지은 각자의 집으로 향했지만, 나는 자주 그날의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의 하늘과 얕게 돋은 풀 같은 것을 생각했다. 직접 집을 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도 바랐다. 그러나 그건 나의 게으름과 체력이 허락하지 않을 테고.


봄은 여기에 있다. 드문드문 산수유와 매화가 핀 반쪽짜리 봄. 그리고 지금 내 바로 맞은편엔 배가 붉고 볼이 흰 새가 포르르 날아 나뭇가지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사진을 찍어 그녀에게 물었더니 곤줄박이라는 새라고 한다. 곤줄박이도 참 예쁘게 생겼구나. 하지만 까치일 거야. 그날의 그 집주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울라브 하우게의 시를 읽었다.


까치가 이사를 했다

까치는 죽은 나무에는 집을 짓지 않는다


그렇다. 둘레가 유독 얇고 키가 커서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던 그 나무도 어쨌든 살아있던 거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살아있는 것, 그게 뭐라고. 아니 그게 다라서. 살아있어 봄이 오고 살아 있어 새가 날고 살아 있어 걷는, 그게 다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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