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빛 쇠기러기 무리가 머리 위로 날았다. 큰 날갯짓으로 하나의 대형을 이뤄 하늘을 가로지르는가 싶더니 벼를 다 베어낸 논에 날개를 잠재워 앉는다. 푸드득, 날개는 더 긴 비행을 원하지만 겨울이 끝날 무렵까지 그들은 이곳에 머물 것이고 긴 목을 더듬어 이곳의 지리를 냄새를 온도를 기억할 것이다. 겨우내 오고 가는 길 속에 마주한 모든 것들을 사랑할 것이다.
소명과 사명은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나요.
기러기 무리에서 멀지 않은 카페에서 사장이 등을 보이며 물었다. 내가 주문한 라테의 우유거품이 스팀피처 안에서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우유가 휘몰아치고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은 문장을 곱씹었다. 소명, 사명, 소명, 사명, 소명, 사명. 두 개의 단어를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니 소명도 사명도 아이들 말장난 같다.
나는 말했다.
일이 움트고 시작되는 방향이 아닐까요. 내 의지가 이끄는 일인지 누가 나에게 부여하는 일인지.
그는 말했다.
그것도 맞겠지요, 그러나.
순간 사람들이 우르르 카페 안으로 들어서서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쳤다. 카페에서 소명과 사명보다 중요한 건 손님의 주문이었고 그들의 주문을 받는 것은 일단 그의 사명이었다.
소명이든 사명이든 한참 잊고 겨울을 지냈다. 올 겨울은 유독 지독한 감기에 걸려 기침을 달고 살다 끝내 늑골염에 걸렸고 의사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파업을 했다던가 지인의 가족이 병원에서 강제 퇴원을 당했다는 얘기를 들었고 만 네 살의 아이는 내가 자기에게 불리한 말을 할 때면 ‘그런 말 하지 마, 마음 아파.’라는 얘기를 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일상. 매일 입고 벗는 속옷처럼 나에게 붙어선 일상. 아이를 데리고 일 년에 한두 번 300km 너머 나의 엄마 집에 가고 또 일주일을 머물다 오는 아주 보통의 일상.
그러다 소명을 다시 마주친 건 내 옷장처럼 뻔한 날들 그 한가운데서였다.
버릇처럼 오래된 골목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낡은 이 층집 계단 사이의 화분이나 거친 회벽의 질감, 문 앞에 내놓은 나무 의자(볕이 좋은 날이면 주인이 나와 앉아 있다), 붉은 벽돌의 건물, 붉은 락카로 적힌 '철거 예정'이라는 글씨, 적요한 공기와 오래된 가로등 아래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와 함께라고 다를 건 없다. 그날도 대구의 오래된 골목, 발이 기억하던 곳을 아이와 점점이 더듬어가다 어느 커피 바 앞에 얼핏 발이 멈춰 섰다. 소명. 카페의 이름이 그랬다. 소명召命 커피바. 원래는 세탁소였던지 가죽잠바, 세무 잠바, 무스탕, 밍크오바라고 유리창 초록색 시트지 위에 쓰여 있는, 언뜻 지나면 카페인지도 모를, 하지만 그 옆 공간엔 엄연히 커피 머신이 있고 LP와 스피커가 늘어선 바도 있는.
벽지를 뜯은 콘크리트 내벽이 그대로 드러난 실내로 들어서자 초록색 책상 스탠드가 있는 자리에 오후의 빛이 가로새어 들었다. 커피와 케잌을 시켜 그 빈틈에 몸을 밀어 넣었다. 아이가 색연필로 노트에 그림을 그리는 사이 다시 만난 소명과 곁에 붙어선 사명을 생각했다. 소명, 사명, 소명, 사명. 두 낱말을 입안에 굴리다 문득 그는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그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했지만 역시 알 수는 없었고 그렇다면 나에게 그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나의 소명과 사명. 단순하지만 쉽게 꺼내기 힘든 말들. 그런데 이내 아이가 내게 초록 모자 인형을 건네며 말했다. 엄마, 이제 우리는 모험을 떠나야 해. 잘은 몰라도 당장의 내 소명 및 사명은 초록 모자의 모험이 되었다.
카페에서 나왔을까,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본업을 두고 필라테스 자격증을 따고 또 다른 교육을 받는, 어딘가에 길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출구들을 끊임없이 만드는 자신에 대한 얘기였다. 발이 멈췄다. 어차피 이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아주 난데없지만 소명이 별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명이라는 거 말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어딘가에 섞여 있는 거 아닌가. 살아가면서 스스럼없이 해나가는 일 어딘가에 끼어있는 것 아닌가. 간판도 없는 작고 낡은 카페의 이름이기도 한 소명, 그 위대하고 어려운 이름은 어쩌면 우리가 찾아 나선 일들과 불러낸 일 그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우리가 우리의 생에 불러든 일. 그녀가 그녀의 생에 불러들인 일. 그게 소명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사명은 그 뻔한 일상 속 우리에게 주어진 크고 작은 일들일테고 분명 그 둘은 특별한 이들에게 부여된 특별한 이름들은 아닐 것이고. 뭐 그런 생각들.
(나중에 보니 소명과 사명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익숙한 화두인 듯했다. 소명은 영어로는 calling, 부름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사명은 mission, 해야 할 직임이라는 의미, 였던가. 그러나 그때 그 사장이 내게 묻고 싶은 게 이거였던지는 아직도 모르고 '그것도 맞겠지요, 그러나' 뒤의 문장도 나는 알지 못한다.)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쇠기러기는 여전히 그곳에서 날개를 파득댈 것이고 기침은 내 목구멍 끝에 걸려있다. 의사들의 파업과 아이의 성장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조류처럼 계속 이어지다 그만두다 끊기다 바뀔 것이다. 카페의 사장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물어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질문의 내용은 조금 바뀌었을 수도 있다.
당신에게 소명과 사명은 무엇인가요.
그러면 거기엔 또 하나의 새로운 소명과 사명이 몸을 비틀며 깨어날 것이다. 소명, 사명, 소명 사명.
역시나 아이들 말장난처럼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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