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이라는 게 좋았다. 마냥 신났다. 오전에는 혼자 자주 가는, 새가 보이는 카페에서 미루던 글을 쓰다가 오후에는 며칠 전 예약해 둔 애프터눈 티세트를 먹고 저녁즈음 가족과 케잌에 촛불이라도 불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리라는 기분이 들었다. 설렜다. 완벽이라는 게 있을까마는 그저 좋았다. 생일, 생일, 생일. 한 것 없이 축하받아도 뻔뻔히 좋은 우리들의 찬란한 벌쓰데이. 두근댈 정도로 생일이 기다려졌다. 어떤 하루가 될까. 어떤 일이 있을까. 빛은 얼마나 환할까. 이미 생일과는 관계없이 기대는 날로 날로 몸집을 키우며 몸을 부풀렸다.
펑-
그러나 마음은 터지지 않았다. 안돼, 하는 마음. 얇게 언 낱장의 얼음 같은 마음 때문이었다.
기대하지 마. 설레지 마. 기대의 애인이 실망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마음을 다잡았다. 기대하지 마, 기대하면 안 돼. 소리까지 내서 말했다. 그러자 얼굴을 마주하고 앉은 아이가 왜? 하고 물었다. 밥을 먹던 참인가 다 먹고 치우려던 참인가 그랬다. 왜? 왜 기대하면 안 돼? 기대해도 돼. 그리고 이초 간의 정적. 그런데 기대가 뭐야?
기대는, 어떤 좋은 일이 있을까 하고 기다리는 마음이야. 그래서 설레는 마음이야.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좋은 거잖아. 그런데 왜 하면 안 돼?
순간 수없이 고꾸라지던 어리고 늙은 기대들이 떠올랐다. 조각나고 부서져도 어김없이 싹을 틔우고 피어오르던 나의 기대들. 나는 말했다. 실망할까 봐. 실컷 좋을까 기대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까 봐. 아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이다. 만 네 살의 아이는 그까짓 거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괜찮아. 그건 지금 일이 아니잖아. 지금 좋으면 좋은 거지. 아니, 지금은 지금을 즐겁게 살아야지라던가 즐기면 돼라던가. 하여튼 아이는 그런 식의 말을 했다. 웃음이 났다. 그러네, 정말 그러네. 좋은 거 맘껏 누리다가 언젠가의 일은 그 언젠가에 생각하면 되겠네.
어쩌면 당신은 아이가 산 생은 고작해야 만 사 년이니 꺾여본 기대가 얼마겠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비울수록 깨끗하고 명료해지는 대표 중의 대표가 집과 정신이다. 비우자. 실망한 적 없는 것처럼 기대하고 울어본 적 없는 것처럼 웃고. 아니 이건 다른가. 뒤따라올 실망의 확률을 알면서도 기대하고, 실컷 울어본 적 있으면서도 다시 크게 웃고. 뭐 그런 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고 그렇게.
생일은 지났다. 역시 완벽하지 않았지만 적당히 즐겁고 적당히 염려스럽고 적당히 유쾌한 날이었다. 그리고 역시 무엇보다도 한 것도 없이 많은 이들에게 잔뜩 축하한다는 얘길 들었다. 축하해. 누구보다 즐거운 하루 보내. 봄철에 망고를 보면 내 생각이 나게 해 주겠어. 귀여운 으름장과 잊지 못할 축하의 말들과 선물. 심지어 동물 복지 유정란에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직접 만들었다는 케잌까지. 내가 뭘 했다고. 난 그냥 엄마의 생배를 갈라 나온 것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어김없는 생일 축하의 말들. 차고 넘치는 고마운 말들. 태어나서 고마워, 같은 황송한 말들. 내 평생의 의문을 한 번에 감싸 안아주는 말들.
아. 문득 바로 지금, 꼭 지금 이 말을 당신에게 되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
태어나줘서 고맙습니다. 닳고 또 새로 돋던 기대들과 그 숱한 꿈과 마음을 지나 지금까지 잘 살아와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태어남을 심심深深히 축하합니다.
어제 일이다. 지하철에서 운이 좋게 앉았는데 앞에 선 사람이 말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생일이 있는 계절을 좋아하더라. 그러자 옆에 선 사람이 말했다. 나 여름이 싫은데. 하지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선가, 내가 봄을 좋아하는 이유가. 어쩔 수 없이 봄을 기대하는 이유가.
당신도 당신이 태어난 계절을 좋아하길, 실망이야 어찌 됐든 가벼이 기대하길 역시나 심심히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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