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를 팔았다. 방구석 한 귀퉁이에서 고양이 털과 커튼 사이 새어든 빛을 온몸으로 조용히 받아내던 옅은 갈색의 크래프터. 이름은 제리였다.
지난겨울 남쪽으로 여행하다가 산 아래 거푸집에서 도자기를 만들어 파는 가게와 그 도자기에 음료를 내어주는 카페가 함께 있는 '왕방요'라는 곳에 간 적이 있다. 바닥과 탁자 위 겹겹이 겹쳐져 있던 그릇들이 카페의 작은 선반에 홀로 놓여 하나의 오브제 objet처럼 빛을 내는 것을 보면서 똑같은 색과 형태(물론 손으로 빚었으니 완벽히 똑같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의 물건이라 해도 그것이 자리한 공간이나 (비거나 혼잡한) 상태에 따라 얼마나 달리 보이는지를, 그 당연한 이치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물론 나는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는 없다. 쌓여있는 책, 쌓여있는 식료품, 쌓여있는 신발, 쌓여있는 옷, 우리 집은 마치 겹겹이 겹쳐져 있던 그릇의 공간과도 같다. 어떤 이유에서든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고 사물을 애정하는 성격을 가진 인간에게 미니멀이란 불가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빈 벽의 나무 선반에 올려진 다기 하나를 본 순간. 공백의 아름다움이라는 말과 함께 스멀스멀 간결한 미에 대한 갈망이 일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무턱대고, 생각 없이, 무작정, 다짜고짜. 한동안 쓰지 않는 물건들을 당근에 올렸다.
잘 치지도 못하는 기타를 들고 집 근처 공원에서 버스킹을 한 적이 있다. 시드니 셰어하우스에 살 때였다. 차마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하이드 파크에 가지는 못하고 조금 분주하지만 집에서 더 가까운, 그래서 언제든지 쉽게 달아날 수 있는 벨모어 파크를 골랐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남들이 하는 것처럼 까만 소프트 케이스를 열어두고 마이크나 스피커는 없이, 그리고 겁은 더없이 악보를 펴고 그 앞에 앉아 기타 치며 노래 불렀다. 몇 개 안 되는 레퍼토리를 돌려가며 사람이 좀 없다 싶으면 큰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열 살 정도의 노란 머리 아이가 일 달러 몇 센트를 넣고 보드를 타며 쌩 하니 지나가기도 했고 어떤 이는 가만히 앉아 노래를 듣다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너는 어디에서 살아? 노래 잘한다. 고마워. 부끄럽지만 즐거워서 그냥 하는 거야. 그게 전부지 That's everything. 간단한 질문과 간단한 대답,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대화들. 잘하지 못함에도 기꺼이 하고 잘하지 못함에도 기꺼이 박수를 쳐주는 사람들. 연초록의 잔디밭과 그보다 짙은 초록의 나무와 시원한 그늘이 곁에 있던 시간들. 잠잠히 그 시공간에 잠겨있다 보니 제리를 매고 시드니의 한국 문화 페스티벌 무대에 올라섰던 순간도 떠오른다. hi, 쑥스럽게 인사하며 틀리든 말든 코드를 힘껏 내리치던 (나 혼자)서툰 공연과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밴드 멤버와 자축하던 순간들. 부끄러운 미숙함이지만 그때는 그저 즐거웠다. 기타가 있으니 치고 기타가 있으니 들고나가고. 그게 너무 당연한 일 같았다.
제리는 언젠가 나 자신에게 선물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뭐든 즐겁게 하자. 하고 싶으면 하자. 나로서는 비싼 돈을 주고 악기점에서 구매한. 나를 위한 나에 의한 선물.
다 잊고 있던 기억들이 팔고 나서야 떠올랐다. 죄송하지만 거래 취소할게요, 울먹이는 마음이 되었다가 오랫동안 방 한 구석에서, 이후에는 베란다에서 숨죽여 머무르던 기타를 생각했다. 입이 틀어막힌 채 방치되느니 어딘가에서 어떤 소리라도 내는 게 제리로서도 행복하지 않을까. 기타 여생의 행복까지 고려했다. 아이를 낳고 손가락이 아파 제대로 쥐어본 적 없던 기타였다. 그래, 너도 새 삶을 살아야지. 기타의 생 제2막을 기원했다.
오고 가는 것에 마음을 둔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것들은 더 그렇다. 하지만 겹쳐진 그림자가 해의 방향을 따라 떠나듯 헤어지는 일도 자연스러울 것이다. 십오 년 동안 고마웠어 내 옆에서 있어줘서. 속으로 인사를 하며 제리를 보낸다. 제리. 실은 그것도 진짜 기타의 이름이 아니라 글을 쓰려다 문득 떠오른 이름이다. 오래전 기타에게 지어준 이름은 진작에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떠냐 싶다. 이름을 남기려 아등바등하는 건 인간이고 이름이 달라도 나의 유일한 기타는 제리 하나일 뿐일 테니까. 제리, 베리, 메리. 네가 어떤 이름으로든 어디서든 즐겁게 살면 좋겠다. 너의 진짜 소리를 내면 좋겠다. 멋진 나의 제리 제리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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