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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Jan 10. 2022

아래행

20XX 년 12월 12일 12:00경

날씨가 꽤 춥다. 새파래진 입술은 흰 입김을 흩뿌린다. ‘아래’로 내려갈 것을 염두에 두고 옷을 얇게 입은 탓에 추워하는 아이들이 꽤 많다. 스승님은 ‘아래'의 입구를 계속해서 쳐다보고 계신다. 나는 아이들의 장비를 점검한다. 장비래 봤자 침낭과, 간단한 음식, 음료, 조명, 호신부 정도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체크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내 가방엔 혹시 모를 예비 부품들이 잘 있나 확인한다. 소금, 장작, 랜턴, 음식, 물, 부적 몇 개 더. 그리고…… 



20XX 년 12월 12일 12:30 경

입구 밖에서 보는 ‘아래’는 끝없이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아래'의 천장은 자연 생성된 동굴 같은데, 바닥은 누가 보더라도 인위적으로 깎은 커다란 계단이다. 계단의 높이는 내 키의 반 정도나 되니, 이걸 계단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조명은 없어서 나와 높은 연차 아이들이 조명을 들어야 한다. 


스승님이 아무 말 없이 훌쩍 ‘아래’의 입구로 들어가신다. 언질이라도 좀 주시지. 나는 아이들을 통솔해 같이 ‘아래'로 내려간다. 아무 일 없기를.



20XX 년 12월 12일 14:00 경

첫 번째 휴식지에 도달했다. 부시깃으로 불을 좀 피우고 부식을 먹었다. 물도. 이놈의 계단은 왜 이리 가파른지, 다 큰 나도 가랑이가 다 아플 정도다. ‘아래’도 해마다 점점 자라는 건가. 따라서 ‘아래'로의 길은 가장 어린아이의 보폭 – 보폭이래도 아이에게는 거의 온몸을 다 써야 할 정도다 -에 맞춰야 하니,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다. 막내의 옷은 몸을 바닥에 문대 내려가느라 벌써 넝마가 되었다. 다행이라면 아직은 귀신들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그게 더 불안하기도 하다.



 20XX 년 12월 12일 15:00 경

첫 번째 귀신을 만나고 한숨을 돌리는 중이다. 귓가에 바람을 불고 도망친 다음, 저기 ‘아래' 깊숙한 곳에서 낄낄 거리며 웃었다. 귀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일부 불안해하는 아이들이 있지만, 모습만 보이지 않으면…… 그다지 무섭지는 않다. 다들 의연하게 버텨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인다.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아이들을 독려했다.



20XX 년 12월 12일 17:00 경

두 번째 휴식지까지 도달하는데 귀신을 세 번 더 만났다. 덕분에 모두의 – 스승님 빼고 – 정신력은 거의 고갈되었다. 물론 체력도. 막내는 거의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물론 한 번 ‘아래'로 들어온 이상 ‘바닥'을 보지 않고 올라갈 수는 없다. 그냥 올라가면 죽을 것이다. 아니, 우리 모두 다 전멸하겠지. 입구에 무슨 짓을 해놓을지 모르니까. 나는 아이들을 보살피기도 하지만, 여차하면 제압해야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제압이 아니라, 그 이상을 행해야 할 수도 있다. 나는 괜스레 가방에 손을 넣어 가장 아래에 깔린 사냥용 나이프를 만져본다. 손잡이가 차갑다.


전원의 부적을 교체했다. 아직 절반 정도밖에 타지 않았지만, 이렇게 불이 있을 때 갈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부적은 넉넉하다. 비릿한 닭 피 냄새가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20XX 년 12월 12일 20:00 경

세 번째 휴식지에서는 야영을 하기로 하였다. 소금을 불가에 쭈욱 두르고, 그 안쪽으로 아이들의 침낭을 테트리스 하듯 잘 배치했다. 


불침번을 정했다. 가장 위험한 시간대는 내가 서기로 했다. 



20XX 년 12월 13일 01:00 경

12시부터 불침번을 서는데, 1시부터 저기 ‘아래'의 바로 다음번 계단에서 키가 족히 2미터 50은 되어 보이는 여자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그 인영은 몹시 메말라 보인다. 바람은 불지 않는데 그 여자의 머리카락은 태풍을 만난 것처럼 휘날린다. 여자의 얼굴엔 눈이 없다. 나도 맞받아쳐 쳐다보느라 다음번 불침번과 교대하지 못했다. 어느새 귀신은 사라져 있다. 나는 다다음 불침번을 깨웠다.



20XX 년 12월 13일 07:00 경

간밤에 불침번 중 호기심 많은 아이가 소금 밖으로 잠깐 손을 내밀었던 듯하다. 호신 부도 떼어놓은 상태로 말이다. 아침 점검을 하는데 손이 빨갛게 부풀어 있다. 스승님이 그걸 보시고 엄하게 꾸짖으셨다. 아침 분위기가 영 좋지 않다. 자리를 정리하고, 부적을 갈고, 아침을 먹은 뒤 소금 밖으로 나왔다.



20XX 년 12월 13일 11:00 경

‘바닥'이 저 멀리 보인다. ‘바닥'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휴식한다. 


10시께부터 계속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귀신이 있다. 계속해서 내 목소리로 뒤를 돌아보라 한다. 나는 질세라 절대 뒤 돌아보지 말라고 외쳤다. 덕분에 소리 지르느라 목이 좀 칼칼하다. 스승님은 아무 말씀 없으시다. 



20XX 년 12월 13일 13:00 경

‘바닥’은 항상 그렇듯이, 눈으로 볼 때는 한 15분만 내려가면 되는 거리 같았다. 하지만 2시간이나 더 걸려서 겨우 도달했다.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귀신들이 많이 나온다. 아까는 어느새 바닥에 끈적한 피가 묻어있기도 했다. 아이들이 싸우길래 중재하는 것도 애를 먹었다. 알고 보니 귀신이 사이에서 이간질한 것이었다. 


좀 섬뜩했던 건 갑자기 내가 내 뒤의 아이를 죽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고, 합당해 보였다. 칼을 꺼내기 위해서 가방에 손을 넣었을 때 문득 정신이 들었다. 부끄러웠다.

‘바닥'의 입구에서 점심을 먹고, 부적을 갈았다. 부적은 3/4 정도 타 있었다. 알맞게 간 느낌.



20XX 년 12월 13일 13:15 경

‘바닥’으로 들어갔다. ‘바닥’은 ‘아래'의 끝이다. ‘바닥’에는 방이 하나 있다. ‘아래'라는 거대한 방과 그 안의 ‘바닥'이라는 방.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태껏 불빛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던 ‘아래'와는 다르게 ‘바닥’ 안의 방에는 환한 조명과 흰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눈이 부시다. 방 가운데는 철제 의자가 몇 개 무질서하게 있고, 한쪽 벽에 브라운관 티비가 있다. 제조사는 알 수 없다. 내가 ‘바닥'의 입구에 소금을 뿌리는 동안, 스승님은 티비를 튼다. 스승님은 ‘바닥'에는 귀신이 못 들어온다고 하셨지만, 나는 좀 불안한 느낌이 들어서 매번 소금을 뿌린다. 브라운관 티비가 켜지면서 미세한 이명음이 들린다.


스승님과 나, 아이들이 모두 의자에 앉는다. 브라운관의 열화한 창 너머로 이번에도 어김없이 흰 가운을 입은 닥터 슐라겐이 나타난다.


“경험은 확실히 우리의 오성이 감성적 감각이라는 재료에 손질하여 만들어낸 최초의 소산입니다…… 경험은 확실히 무엇이 있다는 것을 고하되…… ”


박사의 말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슐라겐의 영상은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다. 내용도 매년 항상 비슷한 것 같은데 완전히 같지는 않다. 내용도 통 이해할 수 없다. 귀신은 나오지 않는다. 기분 나쁜 예술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래……. 초현실 표현주의라고나 할까. 어떤 장면에서는 구토감이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전혀 그럴만한 장면이 아닌데도 말이다.


내가 이 영상을 이해하면 스승님처럼 될 수 있는 건가?



20XX 년 12월 13일 17:00 경

영상이 끝나니 눈앞이 침침하다. 기지개를 키니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땀을 비 오듯 쏟는 아이들도 있어서 좀 오래 쉬어야 할 듯했다. 스승님께 여기서 자고 가자고 말했더니, 순순히 승낙하신다. 막내가 어려도 너무 어리긴 하다. 여기서 정신력을 좀 회복하고 가는 게 좋겠지.



20XX 년 12월 13일 20:00 경

저녁까지 다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잠은 정신력 회복에 가장 좋다. 불침번은 스승님과 나, 그리고 바로 손아래 녀석이 3시간씩 번갈아 하기로 했다. 



20XX 년 12월 14일 02:00 경

불침번에선 별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스승님 말마따마 ‘바닥'에 귀신은 못 들어오는 것 같았다. 다만 ‘바닥'의 창문을 통해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있을 ‘아래'의 입구를 올려다보니, 입구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창문 너머, 어두운 천장에 ‘아래'의 입구가 별처럼 빛나 보인다.


심심해서 자고 있는 아이들 사이를 이리저리 살금살금 걷다가, 문득 바닥에 이상한 손잡이가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닥'의 바닥에 또 다른 입구가 있는 것이다. 손잡이에 손을 대자 온몸이 빨리 손잡이에서 손을 떼라고 비명을 질렀다. 나는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불침번 위치로 돌아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땀이 났다. 


‘바닥'의 바닥이라니. 저 문의 뒤편엔 무엇이 있을까.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바닥’의 저편을 상상해본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마음 한 구석이 정전이 된 것처럼 ‘바닥'의 바닥에 대한 생각은 시도조차 할 수 없다. 


다음 불침번을 깨우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그 바닥 손잡이로 향했다. 그리고 몸을 웅크려 바닥의 문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비명소리가 들렸다. 한두 소리가 아니었다. 모두 저주의 말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귀신들, 악령, 악신들이 저 너머에 있다. 과연 저들이 진짜 저곳에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아래'에 오는 것인가?



20XX 년 12월 14일 07:00 경

몸이 영 찌뿌둥하다. 스승님께 저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물으려고 하다가, 공연히 아이들을 불안하게 할까 봐 말하지 않았다. 올라가서 이야기해봐야지. 


장비를 점검하고 아침을 먹었다. 다행히 아이들의 컨디션은 꽤 회복된 것 같다.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바닥'을 나섰다.
 

20XX 년 12월 14일 12:00 경

세 번째 휴식지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귀신이 많이 나온다. 무섭기보다는 지긋지긋한 느낌이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좋다. 이제부터 ‘아래'와 ‘바닥'은 사람을 아래로 끌어당긴다. 스승님이 앞장서고, 나는 아이들 무리 가장 뒤에 있어야 한다.


다 벗은 노인이 - 노인인지 아닌 지 잘 모르겠지만 – 뒤를 돌아본 채 있다. 마치 무언가를 껴안고 있는 듯, 양팔이 교차되어 등을 감싸고 있다. 게걸음으로 우리를 따라온다. 그것을 본 아이들이 신음소리를 흘렸다. 

나는 계속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상관하지 말고 그냥 올라가라고 소리친다. 



20XX 년 12월 14일 15:00 경

두 번째 휴식지까지 올라왔다. 등 뒤에서 계속 누가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어서 뒷 목에 힘을 주느라 어깨가 빳빳하다. 간단하게 체력 보충을 하고, 부적을 갈았다. 부적 타는 속도가 빠르다. 


어제 불침번 때 들었던 그 ‘바닥'너머의 바닥의 소리가 자꾸 나를 부르는 것 같다. 바닥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제의 그 소리가 나를 잡아당긴다. ‘바닥'이 나에게 속삭인다.



20XX 년 12월 14일 17:00 경

스승님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빨리 올라가려는 게 느껴진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신 걸까? 아무래도 조금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스승님은 벌써 소리쳐 불러도 잘 안 들릴 만치 올라가 계신다. 뒤쳐지는 아이들이 슬슬 생긴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아이들에게 쉬고 가자는 건의를 앞으로 전달했다.  



20XX 년 12월 14일 17:10 경

씨발. 전달이 안된 게 분명하다. 간격은 이제 걷잡을 수 없다. 이대로 뒤처지는 아이들이 생긴다면, 영영 ‘아래'로 끌려갈 것이다. 이제 스승님 뿐만 아니라 선두 그룹은 보이지 않는다. 비교적 적은 연차의 아이들만 내 시야에 겨우 보인다.


과연 선두 그룹은 빨리 간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떻게 어린아이들을 버려두고 먼저 가실 수 있지, 스승님은?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 실 수 있을까? 애초에 이런 씨발 할 곳에 오는 게 아니었어. 다 죽여버릴 거야.


개새끼들. 선두그룹 놈들을 다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20XX 년 12월 14일 17:30 경

수호부가 거의 다 차있었다. 티끌만큼의 시간만 더 있었더라도 완전히 먹힐 뻔했다. 나는 있는 힘껏 소리 질러서 내 소리가 닿는 아이들을 멈춰 세웠다. 휴식지는 아니었지만, 계단 한가운데서 쉬기로 했다. 아마 스승님도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첫 번째 휴식지에서 기다리실 것이다.


장작을 꺼내고, 소금을 뿌렸다. 선두 그룹에 몇 명이 속해있는지 알 수 없으니 인원 파악도 무의미했다. 내가 못 보고 지나친 아이가 없기를.


아이들에게 아예 부적을 손 닿는 주머니에 넣어놓으라고 했다.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첫 번째 휴식지를 향해서 올라간다.



20XX 년 12월 14일 18:00 경

‘나를 돌아봐, 나를 돌아보고, 나에게 돌아와……’

이건 귀신이 아니다. 나는 느낄 수 있다. ‘아래'가, ‘바닥'이, 그리고 ‘바닥' 아래의 바닥이 나를 부르고 있다. 내 정신은 어느새 ‘바닥’으로 날아갈 듯 추락해, ‘바닥'아래의 바닥의 문을 연다. 거기엔 새로운 ‘아래'가 있다. 새로운 아래는 새로운 아래만의 어떤 것으로 가득할 것이다. 인식이 감각을 넘어서고, 귀신이, 악령이, 내가 곧 아래가 된다. 겉과 속이 뒤집힌다. 거기엔 우리가 귀신을 잡아 이끌고, 악령이 우리를 나오지 못하게 막는다. 그곳으로 가야만 해. 그곳으로 가야 해.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아래'의 아래를 봐야 한다. 하지만 선뜻 발걸음이 뒤돌아지지 않는다. 어째서? 지금이라도 뛸 듯이 돌아갈 수 있다. 내 키는 이제 동굴만큼 크다. 단 몇 걸음이면 ‘바닥'에 닿을 수 있다. 그 빌어먹을 박사의 비디오를 볼 필요도 없다. 그저 ‘바닥'의 바닥 문을 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리고……

귀신들이 몇 번 나왔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잡스러운 녀석들. 아이들은 알아서 잘 올라갈 것이다.



20XX 년 12월 14일 18:30 경

문득 정신을 차리니, 첫 번째 휴식지였다. 이미 스승님은 선두 그룹을 데리고 휴식을 하고 계셨다. 소금과 빛이 있으니 정신이 차려진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야말로 정신을 잃을 뻔했다. 이건 귀신에 빙의되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그 증거로 부적이 별로 타지 않았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스승님께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이 일에 대해 말했다. 어제 ‘바닥'의 바닥을 본 것과 함께 말이다. 스승님 낯빛이 어두워졌다. 


“바닥이 너를 원하는구나.”


스승님이 작게 읊조렸다. 스승님이 걱정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좀처럼 걱정이란 것 없이 항상 태산 같던 분이.


“바닥이 하는 말은 항상 맞다. 특히 놈이 세계에 대해 말할 때. 맞기 때문에 더 위험하지.”


“놈이라고요?”


“그래. ‘아래'는 살아있다. 아래는 마치 꼬리를 먹는 뱀이다. ‘아래'의 아래를 여는 순간, 너는 우르보로스의 순환 안에 갇혀 영원히 맴돌게 된다. 죽음이 마지막으로 죽고, 개념이라는 개념이 없어질 때까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영혼이 아래에게 잡아먹혔는지 아느냐.”


스승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거라. 이제 귀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너는 올라오는 것만 신경 쓰거라. 아이들도 내가 챙기마.”


스승님이 내 어깨를 잡고 힘을 꽉 주신다. 묘하게 힘이 나는 기분이다. 


“너도 언젠가 ‘아래'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다.”


소금 밖을 나가기 전 스승님이 나에게 말했다.


스승님이 맨 뒤에서 출발하신다. 나는 대열의 중간에 껴서 가기로 한다.



20XX 년 12월 14일 20:30 경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해. 뒤를 보지 마. 나는 계속해서 소리친다. 물론 아이들이 들으라고 한 것도 있지만, 나에게 하는 것이 더 크다. 조금이라도 소리치지 않으면 그대로 쓰러져서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 같다.

교복을 입은 피 힐리는 아이들 두 명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눈을 마주쳐 버렸다. 그 귀신들은 손가락으로 ‘아래' 저 바닥을 가리킨다. 무심코 아래를 보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귀신들은 키득거린다. 참을 수 없다. 저 아래로 가고 싶다. 아래를 보고 싶다.


가방으로 손을 넣어, 칼날을 움켜쥐었다. 시큰한 통증이 왼쪽 팔을 타고 올라온다. 횃불에 비춰보니 꽤 깊게 상처가 났다. 싱싱한 사람 피 냄새를 맡은 귀신들이 더 몰려들 것이었지만, 그런 걸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귀신들이 홀리는 것보다, ‘아래'가 부르는 게 더 무서웠다. 땅바닥에 흘린 피를 귀신들이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아래'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상처 난 손을 세게 꼭 쥐었다. 아픔이 정신을 맑게 해 주었다.

내가 피를 흘리는 걸 본 몇몇 아이들이 나를 걱정해주었다. 나는 일부러 괜찮다고 큰 소리를 냈다.



20XX 년 12월 14일 21:00 경

저기 ‘아래'의 입구가 보인다. 입구의 동그란 아치가 보인다. 마침내 밖이 보인다. 마침내 밖이 보인다. 하지만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고 신기루처럼 멀어진다. 영영 닿지 못할 것 같다.



20XX 년 12월 14일 21:30 경

영원에 대해 생각한다. 꼬리를 먹는 뱀에 대해 생각한다. 귀가 크고 입이 찢어진 귀신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머리만 날아다니는 귀신에 대해, 아이들에 대해 생각한다. 스승님을 생각한다. 내장을 먹는 곤충에 대해 생각한다. 구더기가 가득 찬 미라를 생각한다.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장산범을 생객한다. 꼬리와 입구가 닮아있음을, 프랙털 구조 안에 갇힌 영혼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생각하고 싶은 건 ‘아래'에 관한 것이다. 남실거리는 생각을 참을 수 없다. 주먹을 꾹 움켜쥔다. 피가 바닥에 떨어진다. 귀신들이 비명을 지른다.



20XX 년 12월 14일 22:00 경

제발, 조금만 더! 이제 몇 계단 남지 않았다. 숨이 차도록 서둘렀다.



20XX 년 12월 14일 22:30 경

마침내, ‘아래' 입구에 도달했다. 밖에 아무도 없는 걸로 봐서, 내가 맨 처음 올라온 듯했다. 비로소 아래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래가 들리지 않는다면, 귀신들은 그다지 무서울 게 없다. 비명이 간간히 들리는 걸로 봐서는 귀신들의 괴롭힘이 극에 달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다소 무안한 느낌이 들어, ‘아래'를 쳐다보며, ‘아래'를 기어 올라오고 있는 아이들을 독려했다. 


“그냥 뒤돌아 보지 말고 올라와! 그냥 올라와! 누가 있던 그냥 올라와!”



20XX 년 12월 14일 23:00 경

막내가 스승님과 함께 마지막 계단을 올라왔다. 막내는 척 보기에도 기진맥진한 것 같았다. 스승님도 심력을 많이 소모하셨는지,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나는 손을 내밀어 막내가 올라오는 것을 도우려고 했다. 그런데 막내가 말했다.


“선배, 저기 사람이 쓰러져 있어요.”


막내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어두컴컴한 인영 하나가 ‘아래' 계단의 구석에 쓰러져 있다. 내려가 봐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막내를 밖으로 내보내는 게 우선이다.


“야, 일단 내가 나중에 내려가 볼 테니까, 너는 일단 올라와!” 


하며 막내를 끌어올리기 손을 잡고 눈을 마주쳤다. 막내의 눈자위가 모두 검었다. 막내는 나를 다짜고짜 아래로 끌어내리려고 했다. 


“저기 사람이 있다니까요! 저기 사람이 있다니까요! 저기 사람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막내를 던지듯이 끌어당겨 ‘아래' 입구 바깥으로 던졌다. 나도 도망치듯 입구 바깥으로 나왔다. 스승님을 마지막으로 입구에서 나오셨다. 


모두 기진맥진하여 ‘아래'의 입구 바깥에서 널브러졌다. 숨을 고르고, 나는 모두를 칭찬해주었다. 유난히 힘든 ‘아래'였다. 문득, 마지막에 막내가 말한 사람이 생각나서 ‘아래'를 슬쩍 쳐다보았다. 인영은 아직도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스승님에게 말했다.


“스승님, 저기 누가 쓰러져 있다고 막내가 자꾸 말하더라고요. 아무래도 막내가 귀신에 씐 것 같아서 일단 밖으로 꺼냈습니다. 저건 누굴까요?”


그러자, 스승님이 내 머리를 한대 쥐어 박았다.


“예끼. 이 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그제야 나는 아직도 내가 ‘아래'에게 홀려있음을 깨달았다. 인영은 벌떡 일어나 ‘아래'의 벽면을 기어 ‘아래'로 아래로 빠르게 기어갔다. 



어느 날 꾼 꿈을 재구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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