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 104

열네 명이 구겨져 살던 시드니 쉐어하우스에서의 추억

by 나해

나는 내가 언제까지나 그곳을 그리워하게 될 줄을 알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이렇게 썼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을 자주 듣던 때의 기억들과 감정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2016년 겨울에 집 문제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고 나선 휴대전화 벨소리를 들으면 그때의 절망적이고 초조한 감정이 되살아나 벨소리를 바꿔버렸다. 2018년에 유행하던 노래 ‘데스파시토’를 들으면 그해 여름 태국을 여행하던 나의 기쁨과 당황, 좋은 사람들과의 추억과 나쁜 사람들과의 아픈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좋아해서 열 번 넘게 본 영화의 OST ‘There's too much love’을 들으면 그 영화에 한참 빠져있던 시절의 설렘, 그 때 교환학생으로 다니던 학교의 풍경과 냄새, 그곳의 사람들, 도서관에서 고군분투하던 날들의 심정이 떠오르곤 한다.

요즘은 Tones and I의 ‘Dance Monkey’라는 노래가 유행이다. TV에서도, 내 플랫메이트들의 핸드폰에서도, 그들의 입에서도 자주 그 노래가 재생된다. 그 노래를 들을 때면, 훗날 그리워하게 될 순간들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언젠가 나는 이 곳을 떠날 것이고 지금 나와 일상을 함께하는 플랫메이트들과 기약 없는 이별을 할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나라 칠레로, 콜롬비아로, 한국으로, 스페인으로 돌아갈 것이고 누군가는 이 곳 시드니에 남을 것이다. 나는 먼 훗날의 내가 되어 이 곳을 이미 그리워한다. 언젠가 우연히 다른 곳에서 Dance Monkey를 마주한 내가 되어 2019년 11월 시드니에서의 날들을 그리워한다.

고장나서 돌려도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않는 방 문 손잡이, 방문을 열린 상태로 고정시키던 오렌지색 트래픽 콘, 떨어진 부엌 선반 문짝, 푹 꺼져서 스프링이 느껴지는 소파, 16층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던 센트럴 역의 커다란 시계탑, 그 곳에서 부러진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카드게임을 같이 하던 사람들아, 당신들이 그리울 거야. 순간들을 마음에 잘 담아 놓으려고 노력한다.


이 일기를 이 글 안에 녹이려고 했으나 어떻게 해도 6년 후의 내가 그 때의 내 마음을 훼손하는 느낌을 떨치기가 어려워 그대로 옮겨 놓았다.


플랫 104를 처음 만난 것은 2019년 봄,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가지고 시드니에 온지 두 달 차로 이사할 곳을 알아보고 있을 때였다. 처음 이국 땅에 발을 내딛은 스물 넷의 나는 어리바리했으며 돈도 거의 없었다. 사람들의 영어는 학교에서 듣던 영어 리스닝 테이프와는 너무나도 달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어 곤란했다. 길 잃고 말도 못 하는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최저시급 주는 서빙이나 설거지 일자리를 구하는 것조차 어려워서, 나 정말 이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기였다.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여러 쉐어하우스를 보러 다녔다. 그 중 한 곳이 플랫 104였다. 받은 주소로 찾아가서 입구에서 기다리는데,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가 활짝 웃으면서 나왔다. 옆머리를 민 깔끔한 헤어스타일에 잘생긴 그는 20대 초중반쯤으로 보였고, 이름은 마티아스였다. 그는 시종일관 활짝 웃으면서 나에게 집을 보여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는 칠레에서 온 유학생으로, 그 집에 살며 월세를 할인 받는 조건으로 플랫 관리를 맡고 있다고 했다. 내가 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되물으면 그는 “미안, 내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서…”하며 웃었다. 그의 영어는 유창한 편이었고, 다양한 억양에 익숙하지 않았던 내 문제였는데도, 그렇게 말하는 그의 사려 깊음에 나는 조금 감격해버렸다.


웃기지만 당시 마티아스는 내가 그 집을 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낯선 사람에게도 그렇게 친절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좋았다. 마티아스뿐만 아니라 그 집에서 만났던 다른 사람들도 친절해 보였다. 아주 짧게 만나본 것이지만 그들이 내뿜는 분위기가 왠지 좋았다. 이 곳에서라면 몸 편하게는 몰라도 재밌게는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플랫 104에 들어가던 날, 마티아스는 흔쾌히 짐 옮기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다. 내가 임시로 머무르던 곳까지 와서 내 28인치 캐리어를 대신 끌어주었다. 도보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고, 걸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는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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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집 자체는 사진에 비해 꽤 별로였다. 주인이 사진을 사실적으로 찍어 올렸다면 나는 그 집을 보러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열네 명이 살고 있는 집이다 보니 어수선했고 집과 가구들은 낡고 꾀죄죄했다. 그 집은 시드니 차이나 타운에 위치한 한 아파트의 가장 꼭대기 16층의 복도 끝에 위치한 104호였고, 내부는 2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1층에 방 하나와 거실, 주방, 2층에 방 두 개가 있었다. 방 하나당 2층 침대 두 개가 있어 네 명이 살았다. 그렇게 방 세 개에 열두 명이 살고, 나머지 두 명은 2층의 방 두 개 사이의 빈 공간에 살았다. 사실상 복도 혹은 작은 거실에 해당하는 공간이었는데 커튼을 쳐서 공간을 분리하고 2층 침대를 하나 놓아서 방 비슷하게 만든 것이었다. ‘거실 쉐어’라고 부르는 임대차 형태인데, 불법임에도 임대료가 비싼 시드니에선 흔했다. 발코니를 방처럼 쓰는 ‘발코니 쉐어’도 심심찮게 있었으니 그에 비해서는 낫다고 봐야 하나. 마티아스가 사는 곳이 그 ‘거실 방’이었다.


집주인은 그 곳을 ‘욜로 플랫’이라고 이름 붙였고 그 곳에 세들어 사는 이들도 대부분 그렇게 불렀는데 난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플랫 104라고 불렀다. 한국어로 치면 ‘104호’ 같은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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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플랫 104는 재미있는 곳이었다. 일단 모두가 다양한 배경에서 왔다는 점이 그랬다. 칠레에서 온 필리, 한국에서 온 희진과 예린, 일본과 콜롬비아, 브라질, 스페인, 독일 등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다. 대부분 유학생이었고 워킹 홀리데이 온 사람도 몇 명 있었다. 내가 온 날 그들은 환영 파티를 열어 주었다. 파티라고 해서 별 건 아니었고 삼바를 틀고 맥주를 나눠 마시며 흥이 난 몇몇은 춤을 추는 거였다. 사람들이 서로의 시선을 의식하는 문화권에서 온 내게는 춤을 잘 추진 못해도 자유롭게 추는 그들의 모습이 신선하고 좋았다. 마티아스와 몇몇 친구들은 항상 6개들이 맥주를 쟁여놓고 마셨는데, 한 병 마실 때마다 내게 한 병씩을 주곤 했다. 과일이나 과자 같은 음식도 항상 넘치도록 나눴다. 나는 이 꾀죄죄한 플랫의 흥 많고 착한 사람들과 금세 사랑에 빠져버렸다.


나는 특히 나와 방을 같이 쓰던 희진, 예린, 필리, 그리고 마티아스와 친하게 지냈다. 필리는 마티아스의 대학 친구로, 어학원에 다니며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굵고 검은 곱슬머리에 크고 쳐진 눈, 작은 키를 가진 칠레 사람이었다. 희진은 간호대에 다니는 유학생이었고, 예린은 워킹 홀리데이로 와서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누구 한 명이 카드 뭉치를 들고 “우노 할래?”라고 물으면 우리는 작은 발코니로 나가 부서질랑말랑 하는 의자에 앉았다. 우노는 카드게임인데, 내가 이사 오기 전부터 너무 많이 사용되어서 카드가 때 묻고 헤져 있었다.


IMG_3384.JPG 발코니에서 우노 하다가, 마티아스가 나눠 먹으려고 가져온 과일

마티아스와 필리는 거의 매일 밤 발코니에서 대마초를 피웠는데, 나나 다른 이에게도 항상 권했다. 한 명이 침을 묻혀서 손수 말은 대마초 한 대를 여러 명이서 돌려가며 피웠다. 피우면서 우노를 했다. 질 것 같을 때는 소리를 지르고 이길 것 같을 땐 으하하 웃었다. 어떤 때는 난간에 턱을 괴고 센트럴 역의 커다란 시계탑을 내려다보며 미래의 불확실함이나 일자리 문제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영어를 못 해서 일하던 식당에서 잘린 이야기를 했다. 필리는 말했다.


“근데 너 우리랑 놀 때는 영어 잘 하잖아. 그냥 긴장해서 그런 거 아닐까?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고 난 확신해.”


발코니에서 우노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겨우 구한 식당 일도 잘리고 나서는 점점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기가 두려워졌다. 상점에 물건을 사러 가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할 정도였다. 플랫 104 친구들만이 기댈 구석이었다. 그들과 있으면 그런 걱정이 없이 편안했다. 그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그 시기가 많이 외로웠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스페인어와 한국어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아침 인사나 밤 인사, 고맙다는 인사를 서로의 언어로 했다. 나나 희진, 예린이 “부에나스 노체스” 하면 마티아스와 필리가 “잘 자”라고 대답했다. 마티아스와 필리가 내게 고마운 일이 있을 땐 “고마워”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데 나다(괜찮아)”라고 대답했다. 필리는 나에게 스페인어로 숫자 세는 걸 알려주고, 나는 필리에게 한국어로 숫자 세는 법을 알려줬다. 우리는 동네 호텔의 펍에 가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거나 클럽에 갔다. 날씨가 좋은 휴일엔 같이 바닷가에 나가 물놀이를 하거나 카약을 탔다. 크리스마스엔 시크릿 산타(마니또처럼 제비뽑기로 뽑은 상대에게 몰래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해서 주는 놀이)를 했고 독일에서 크리스마스에 먹는다는 쿠키를 같이 구웠다. 집 근처의 큰 시장인 패디스 마켓에서 같이 장을 보면 마티아스는 항상 음료수나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나머지 친구들에게 사주곤 했다. 어느 날은 플랫 친구들과 밤 산책을 갔는데,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싶었다. 전망대에 올라 야경을 보고 한적한 강가에 앉아 건너편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가리타를 마시려다가 신분증이 없어 거절당하고 깔깔 웃으면서 집으로 향했던 날. 밤 시내를 천천히 돌던 빨간 트램의 맑은 종소리, 왁자지껄한 사람들 소리, 중국어 간판들, 선선한 공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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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후 나는 그것들을 뒤로 하고 시드니를 떠나게 되었다. 1년의 비자를 더 받기 위해, 그리고 영어에 대한 부담감이 적은 일을 찾아 농장에서 일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미리 일을 구하지는 못했으나 비행기 한 시간, 버스 세 시간을 타고 북부 열대 지역의 작은 시골 마을에 가서 일자리를 구해보기로 했다. 마티아스는 물었다.


“농장 일을 마치면 다시 돌아올 거야?”


“아니, 시드니는 볼 만큼 본 것 같아. 가보고 싶은 다른 지역이 너무 많아!”


“아쉽네.”


“나도.”


비행기를 타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플랫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한 명 한 명 포옹하는데 눈물이 나서 고개를 들고 눈을 계속 깜빡거렸다. 그래도 눈물은 흘러내렸다. 그들에게 실망한 적도, 짜증났던 적도, 그들과 싸운 적도 있어서 안 슬플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28인치 캐리어 하나를 끌고 큰 백팩 하나를 뒤에, 작은 백팩 하나를 앞에 맸다. 공항까지 전철을 타러 가는데, 계단 앞에서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려고 잠깐 멈췄더니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와서 내 캐리어를 들어주고는 계단이 끝나자 쿨하게 사라졌다. 다음에 계단이 또 나오자 그 할아버지가 다시 근처에서 나타나서는 캐리어를 들어주고 다시 사라졌다. 비행기에 앉아 눈물을 찔끔 흘리고 있으니 옆에 앉은 아저씨가 자꾸 감자칩을 줬다. 내가 하나 집으니 “더 집어, 더 가져가” 계속 그래서 고맙고 좀 웃겼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휴대폰으로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줄줄 났다. 시드니엔 있을 만큼 있었다고 했던 내 말은 틀렸다. 나는 벌써 다시 시드니에, 플랫 104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시드니에 다시 올 지도 알 수 없고, 다시 왔을 때 친구들이 몇 명이나 거기 남아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떠들썩한 분위기, 매일 같이 듣던 노래들, 꼬질꼬질한 테이블과 제대로 닫기지 않는 문, 친구들의 각자 다른 악센트, 나눠 먹던 간식들 모두 벌써 그리웠다.




바나나 농장에서 일했던 시기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쓰겠지만 코로나가 겹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게다가 일터에서 사람들의 말을 여전히 잘 알아듣지 못했고, 지내던 호스텔에선 30-40명의 유러피안 백인들이 매일 저녁 파티를 벌이는 극 외향적인 분위기 속에서 겉돌고 있었다. 친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가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거나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새해가 오자 필리와 마티아스는 내게 음성 메시지로 인사를 보내왔다. 나에게 정말 고맙고 내가 보고 싶다고, 코로나가 끝나면 꼭 보자는 내용이었다. 그 메시지는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플랫 104는 사라졌다. 소리소문도 없이 그 시절이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어떤 노스탤지어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땐, 내가 호주 곳곳을 떠돌다 다시 시드니를 방문한 2021년 2월이었다. 마티아스가 말해주길, 코로나로 인해 국경이 봉쇄된 후 외국인 유입이 끊기자 플랫도 비어 갔고, 집주인은 플랫 운영을 중단했다고 한다. 사실 그 사람은 집 주인이 아니라 104호 전체를 빌린 후 입주자들에게 침대별로 재임대 하면서 수익을 얻고 있었는데 더 이상 수익이 안 나게 된 것이다. 이후 그 아파트 전체는 코로나 격리 시설로 쓰이게 되었다. 이제 그 곳의 입구를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곳을 찾아가 보았다. 경비원 두 명이 입구에 서 있었다. 내가 기웃거리자 그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 왔다.


“아, 그냥……”


나는 말을 흐렸다. 제가 예전에 여기 살았는데요, 너무 많은 추억이 있는데 이제는 못 들어가는 곳이 되었다니 궁금해서요, 라고 말하기엔 좀 납작하게 느껴졌다.




가끔은 캐리어를 끌고 아침에 집을 나서던 그 시절의 나를 붙잡아 다시 돌려 보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다가도 내가 정말 열악하기 짝이 없던 그곳을 그렇게 그리워했었나 싶다.

그러다가도 길에서 우연히 Dance Monkey를 들으면 마음이 아리다.




나는 시드니에 머무는 일주일을 마티아스의 집에서 지냈다. 마티아스는 나에게 침대를 양보하고 밤마다 거실의 소파 등받이를 방에 가져와서 바닥에 놓고 그 위에서 잤다. 필리도 나를 보러 놀러 온 첫 날 그는 내게 보여줄 게 있다며 들뜬 표정으로 무언가를 꺼냈다. 우노 카드뭉치였다. 그새 더 꼬질꼬질해져 있었다.


“와! 이거 아직도 갖고 있구나!”


“당연하지.”


“대박 너무 좋아.”


“우노 할래?”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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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동안 시드니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주로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던 곳들이었다. 같이 베드민턴 쳤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보이는 공원, 같이 노을 봤던, 하버브릿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 필리는 내가 존재하는지도 잊고 있던 내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그 공원에서 내가 커다란 나무에 올라가려고 나무를 잡고 매달려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지나온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영어를 잘 하게 되었으며 더 이상 상점에 가는 데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고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쉬워졌다. 돈을 안정적으로 벌게 되니 더 이상 4인실에 살지 않고 혼자 방을 쓰게 되었다. 서툴었던 필리의 영어도 유창해졌으며 마티아스는 학교를 졸업하고 일하고 있었다. 희진은 병원으로 간호 실습을 나가고 있었고 예린은 시드니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살며 파트너 비자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든 게 너무 빨리 변해서, 또 어떤 것은 너무나 그대로라서 시드니에서 보냈던 시절이 꿈이나 전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IKYF9321.JPG 필리가 보여준 내 사진



플랫 104의 철제 2층 침대는 항상 삐걱거렸다. 한 사람이 움직이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움직임이 전달되어 잠을 깨웠다. 내 위 침대에서 자던 필리는 잠꼬대를 자주 했다. 그 때는 한밤중에 잠에서 깨었다는 사실이 짜증나기보다는 그냥 웃겼다. 필리의 잠꼬대 내용을 다음 날 이야기해주고 같이 깔깔 웃는 게 재밌었다. 식탁은 끈적거렸고 싱크대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설거지가 항상 방치되어 있었으며 조리대엔 정체 모를 부스러기나 액체가 종류만 바꿔가며 자리해 있었다. 에어컨이 없어 여름엔 아주 더웠다. 발코니는 나와 필리, 희진, 예린의 방에 딸려 있어서, 그 방 문을 트래픽 콘으로 고정시켜놓고 온 집안 사람들이 그 방을 드나들었다. 네 명이서 하나의 오래된 옷장을 썼다. 손바닥 길이의 바퀴벌레도 자주 보았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런 곳에서 살았는지 모르겠다.


플랫 104를 임대해 운영하던 사람은 코로나 전까지 꽤 좋은 수입을 얻었을 것이다. 관리할 필요도 없이 150불씩 열 세명이면 돈이 얼마야. 그런 수를 이제는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그런 환경을 참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생기고 머리가 굵어졌다는 사실이, 내가 성장했음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잃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 이상 나는 그런 구질구질한 곳을 찾지 않을 테고, 그곳에 살고 있을 또 다른 마티아스나 필리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아무도 내 방의 문을 벌컥 열지 않는 나만의 방에서 온전하고 허전한 안락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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