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 교환학생으로 가다
“젊은 여자가 혼자 태국을? 용감하네.”
2024년 12월, 태국 치앙마이 공항에서 출국 심사 줄에 서 있는데 내 뒤의 중년 한국 남성이 나를 두고 일행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나는 혼자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놀랐다. ‘네? 태국만큼 안전한 곳이 없는데요.’
나는 이집트를 여행하다가 익숙하고 안전한 곳에 있다는 감각이 그리워서 태국으로 온 터였다. (이집트가 생각보다 추워서 따뜻한 곳을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태국은 두 번째 와보는 거였다. 이집트에서 튀르키예를 거쳐 방콕에 착륙해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에 도착했을 땐 안도감이 들었다. 익숙한 사람들과 시장 풍경, 음식, 공기의 냄새 같은 것들이 주는 안정감을 폐 속 깊이 들이마셨다.
돌이켜보면 나도 처음 태국에 왔을 땐 낯설고 무서웠다. 그게 벌써 7년 전, 2018년, 스물세 살 때였다. 그땐 해외에 나와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2015년에 첫 여행으로 일본 후쿠오카에서 혼자 3일을 보냈던 게 전부였다.
우리나라와 가장 가깝고 안전해서 여행 난이도 최하라고 할 수 있는 일본. 거기서조차 나는 대중교통 타는 법 등 기본적인 일을 할 줄 몰라서 우왕좌왕 헤매다가 혼자 막막함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동안 너무 일상적이고 공기 같아서 의식하지 못했던 대중교통 타기, 유심 구매하여 스마트폰 사용하기, 물 달라고 부탁하기 등이 갑자기 엄청난 미션이 되었다. ‘여기선 아무것도 쉽게 못 하겠어. 외국은 참 어려운 곳이다. 빨리 모든 것이 익숙한 한국으로 가고 싶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안정 지향적 인간이었다. 낯선 나라에서 풍파를 헤치며 사는 일은 인생의 선택지에 없었다. 익숙한 나라, 익숙한 환경에서 잘 아는 언어를 하며 사는 게 당연했다. 내 나라에서 가난한 여성 비주류로 사는 것조차 힘든데 뭐 하러 이방인이라는 약자성까지 한 겹 더해지는 외국에 가서 사서 고생한단 말인가.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다른 종족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평범하게, 평범한 직장에 취직해서 소소한 취미를 즐기며 특별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삶을 살면 된 거라 생각했다. 내가 가난한 집안 출신이기에 그 선택지밖에 없다고 믿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은 열망이 있었는지, 2018년엔 교환학생으로 외국에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왜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였나? 어쨌든 너무 가고 싶은 나머지, 돌아오면 9번째 학기를 다녀야 하는 단점도 감수했다. 늦게 마음을 먹은 터라 교환학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8번째 학기밖에 없었고, 마지막 학기는 본교에서 이수해야 한다는 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나라 중 태국에 가게 된 것은, 그저 내가 토플 시험 당일에 허름한 편의점에서 산 샌드위치를 먹고 배탈이 났기 때문이었다. 시험 시간 도중에 화장실을 다녀온 사람의 시험 성적은 처참할 수밖에 없었고, 25만 원에 육박하는 토플 시험을 다시 응시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형편 때문에 생활비가 싼 나라 중에서 고르다 보니 독일,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태국, 네 나라의 학교에 지원했는데 그중 4지망이었던, 지원자가 거의 없던 태국의 학교에만 합격해서 가게 되었다.
2018년, 한남동 태국 대사관에서 난생처음 비자라는 걸 발급받았다. 그해 여름, 기내용 캐리어 하나와 위탁 수하물로 부칠 28인치 캐리어 하나를 끌고, 머나먼 미지의 세계라 느껴지던 외국으로 떠났다.
그때의 어리숙함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치앙마이에 가기 위해 방콕에서 환승을 해야 하는데(그때만 해도 직항이 없었다), 바보처럼 서울에서 방콕 가는 항공권 예매, 그날 밤 방콕에서 1박 숙박 예약, 다음 날 오후 방콕에서 치앙마이 가는 티켓을 따로 예매했다. 방콕에서 치앙마이까지 한 시간밖에 안 걸리는데, 숙소까지 번거롭게 왔다 갔다 할 시간에 그냥 바로 치앙마이 행 비행기로 환승하면 되는 걸.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환승하고 유심 사는 데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싶었나? 아니면 자정에 방콕에 도착하니 잠을 자야 한다고 생각했었나?
방콕 공항에 내려서 처음 맡았던 다른 세계의 공기를 기억한다. 다른 나라는 공기의 냄새가 다르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꿉꿉하고 조금 달큰한 시골 냄새 같은 것.
예약한 호텔에 공항 픽업을 미리 요청해 놓았기에 픽업존에서 기다렸다. 아주 많은 밴과 승합차 택시가 있었고 현지인들이 저마다 다른 손님 이름이 쓰인 피켓을 들고 기다리거나 택시를 타라고 호객했다. 정말 번잡한 장소였다. 한밤중에 그렇게나 많은 외국인을 보는 것도, 호객을 10초마다 당해보는 것도 처음이라 엄청 혼란스럽고 좀 무서웠다. 곧 내가 예약한 호텔 이름이 쓰여 있는 밴이 왔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작정 타려 했다가 거부당했다. 짐칸에 실을 캐리어를 직원에게 건네던 손님들은 자기들과 붙어서 그 차를 타려고 하던 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Excuse me, this is not my family. (저기요, 이 사람은 우리 가족이 아니에요.)”
직원은 영어가 짧았던지 나를 보며 “No”라는 말만 여러 번 반복했다. 역시 영어가 짧았고 태국어도 몰랐던 나는 “OO… OO? OO?”라고 호텔 이름만 연신 반복하다가 문이 닫히고 떠나는 차를 어리바리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호텔에 어떻게 가지?’ 불안해하며 바쁘게 돌아가는 픽업존을 초조하게 바라봤다. 조금 후 그 호텔 이름이 쓰여 있는 다른 밴이 왔고, 그것을 타고 호텔로 갈 수 있었다. 타고 가면서도 이 차가 맞는지, 그 전 차는 그럼 뭐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밴은 어둠에 잠긴 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창밖에는 어둠 속 낯선 언어로 쓰인 간판과 낯선 건축 양식의 건물들, 낯선 모습의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갔다.
자정이 넘어 도착한 호텔의 분위기는 낯설었다. 그때는 다른 인종이 다수인 세상에 발을 들이고 그들과 접촉해 본 게 처음이라 그들이 좀 무서웠다. 직원이 여권을 보여달라 해서 건네주고, 무슨 양식을 작성하라고 하길래 작성했다. 직원이 그걸 받고는 복사를 마친 여권을 돌려주고 나를 방으로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그 사이 내 캐리어 두 개가 사라졌다. 깜짝 놀라 캐리어가 없어졌다고 하니 직원은 다른 직원이 이미 방으로 옮겨 놓았다고 했다. 직원을 따라 긴 복도를 걸어 내 방에 도착했다. 내 캐리어는 얌전히 그곳에 있었다. 직원은 나에게 열쇠를 주고 떠났다. 방은 어두침침하고 왠지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7월의 공기가 후덥지근한데도.
2018년은 나의 세계 유랑기가 나도 모르는 새 어리바리하게 시작된 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7년 전! 너무 오래되어 활자가 군데군데 지워지고 삭아서 구멍이 난 기억이나마 끄집어내서 기록하려 하는 것은, 이 이야기 없이 다음 이야기를 하는 게 불완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낯선 땅에 이렇게 위태로운 첫 발을 디딜 때까지만 해도 그 여행이 나의 영혼을 바꾸어 놓을 줄은, 그리하여 삶의 경로를 바꾸어 놓을 줄은 몰랐다. 태국에서 나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처음 맛본 아기처럼 처음 보는 세상에 놀란다. 그 시원하고 얼얼한 달콤함이 좋아서 해외를 떠돌아다니게 된다. 태국과 말레이시아를 3개월 여행한 이후 호주에서 3년 살고, 동남아시아에서부터 유럽, 아프리카 대륙까지 여러 나라를 반년 넘게 여행한다.
해외여행을 그렇게 많이 한다니 금수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흙수저 출신이고 자수성가하지도 않았다. 어릴 때부터 가난해서 남들 다 하는 국내여행도 거의 못 했고 남들이 다 하는 거 나만 못하는 상황에 익숙했기 때문에,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내가 세계를 활보할 수 있을 거라고는 꿈도 못 꿨다.
두려움이나 리스크를 감수하기보단 원래 살던 대로, 남들 하는 대로, 색깔 없이 묻어가기만 하며 살았던 내 삶이 어떻게 확 뒤집어졌을까? ‘대체 여행이 뭐가 그리 인생을 바꾸는 경험이냐, 여행은 돈이나 쓰러 갔다 오는 거 아니냐’고 누가 물을 때마다 몇 마디로는 설명하는 게 불가능해서 "얘기하자면 긴데요…."라고 얼버무려오곤 했다. 여기서 한 번 그 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앞으론 그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에 이 책을 읽어보라고 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