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만난 (아마도) 사기꾼과 천사 직원
다음 날 아침에 호텔 밴을 타고 무사히 방콕 공항에 다시 돌아왔다. 체크인을 하고 수하물을 부친 후 시간이 남아 공항을 구경하고 있는데, 어떤 키 큰 남자가 몇 미터 거리에서 도움이 필요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약간 나 보라는 느낌으로.
‘나도 여기 어제 처음 왔는데, 뭘 도와줄 수 있을 리가 있나…. 미안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 사람을 지나쳐 걸어갔다. 조금 후 그는 나를 따라오더니 내게 영어로 물었다.
“Are you Korean? (한국인이세요?)”
의외의 질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Yes(네).”
"(영어로) 오, 다행이에요. 한국인의 도움이 필요한데, 당신이 한국인처럼 보여서 말을 걸까 고민했어요."
겉보기엔 남아시아나 중동계 같은데, 왜 한국인을 찾지? 억양도 한국 억양이 아니고. 아니야, 이민자일 수도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Are you Korean, too? (당신도 한국인인가요?)”
그는 한국인은 아니지만 부산에 살았다 했나, 아니면 살 거라고 했나, 둘 다였나… 하여튼 그렇게 말했다. 학교에서 듣던 느리고 또박또박한 미국 영어에만 익숙하던 나는 그의 강한 억양이 벤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공항에서 XX호텔까지 택시를 타면 얼마가 나오냐고 묻길래 나도 모른다고, 구글맵에 쳐보자고 했다. 그는 자꾸 자신이 무언가를 take 해야 한다고 했는데(“I have to take a …”) 나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Sorry, you have to take… what? (네? 뭘 타야 한다고요?)”
“딱씨.”
“What is that? (그게 뭔데요?)”
이 대화를 한 다섯 번 반복했다.
“You don’t know 딱씨? (딱씨 몰라요?) 딱시, a car, to go somewhere, (자동차, 어디 가기 위한.) 부릉부릉.”
“아, 택시!”
“맞아요. 그거예요. 제가 지금 돈이 50밧밖에 없어서 그러는데, 택시비를 300밧만 빌려줄 수 있나요?”
300밧이면, 얼마지? 한국 돈으로 만 원 정도 되겠구나. 수상했다. 지갑이 들어있는 가방을 꼭 쥐고서 이 사람이 쓸 수 있는 수를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작은 돈을 빌려달라 한 다음 내가 지갑을 꺼내면 통째로 낚아채기? 2인 1조로 이 사람이 내 관심을 끄는 사이 다른 한 명이 가방 가져가기? (300밧 자체가 그의 목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못하니….)
“왜 돈이 없는데요?”
그가 장황하게 대답을 했는데 내가 알아들은 건 비행기를 놓쳤다는 말뿐이었다.
"흐음… 제가 지갑을 꺼내면, 당신이 제 지갑을 가져가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나는 진지한데 왜 웃어? 그는 자신의 사진이 있는 사원증을 내게 보여주며 싱가포르 에어라인에서 일한다고 했다. 원한다면 자신의 휴대전화를 맡기겠다고 했다. 나는 됐다고 하며, 큰돈도 아니니까 속는 셈 치고 연락처를 교환한 다음 300밧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지금 일 때문에 싱가포르에 가야 하고 2주 후에 다시 태국에 오니까 그때 연락하겠다고 하고는 떠났다.
지금 같으면 절대 안 줄텐데! 바보…. 당시 일기에는 이렇게 썼다.
“사실 첨에 두리번거리는 거 봤을 때부터 좀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이미 상상 속에서 사귐) 웃으니까 더... (꼭 그 이유 땜에 준 건 절대 아님) (…) 아직도 한국이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자기가 한국 가면 보내줄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또 태국 오면 보내준다 하질 않나 이 사람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건지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된 건지 모르겠다. 아직도 저 사람이 싱가포르인 인지 그냥 싱가포르에서 일한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300밧 정도면 태국인 하루 일당이라는데 속은 건가 싶기도 하고, 지갑 가져가려는 거 아니냐 했을 때 엄청 어이없어하던 거 보면 진짜 같기도 하고…. 연기라면 연기 진짜 잘한다…. 무튼 행복해라 내 만원 갖고… 나도 만원에 재밌는 일 생겨서 좋았다. 나는 아직도 대책 없이 긍정적인 인류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진짜였으면 좋겠다….”
그는 연락이 없었고, 나도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처음부터 나를 속일 생각이었던 것인지, 연락처조차 가짜였는지, 아니면 내가 연락이 없으니 안 줘도 되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혹은 돈을 빌린 일을 잊어버린 것인지조차 모른다.
한편 그를 만나기 전, 같은 날 같은 공항에서 한 중년 현지인 여성을 만났다. 내가 식당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걸 본 그녀는 나를 푸드코트까지 데려다주었다. 그곳은 카운터에서 결제를 하고 쿠폰을 받은 뒤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 시스템을 잘 몰랐던 나에게 그녀는 쿠폰 구입하는 법을 친절히 알려주었다. 그러는 동안 내 짐도 들어주고 내가 음식을 받을 때까지 혼잡한 푸드코트에서 내 캐리어를 갖고 기다려 주었다.
‘가방 가져가는 거 아냐? 신뢰를 얻은 다음 사기 치려는 거 아냐?’하고 의심했는데 결국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이 공항의 직원이라며 사원증을 보여주었다.
"우리 딸이 30살이라, 널 보니 딸 생각이 나서. 너는 너무 어려서 걱정돼."
그녀는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며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갔다.
“땡큐, 땡큐…”
나는 웃으며 인사했다. 캐리어를 옆에 두고 밥을 다 먹은 후 푸드코트를 나서는데, 그녀가 돌아와서는 나를 비행기 탑승수속 하는 곳까지 또 데려다주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친절한 분이었다.
그땐 잘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그때의 내가 얼마나 어리고 어리바리해 보였을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그렇게 걱정하거나, 사기 치기 딱 좋은 대상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같은 어리바리한 애를 보고도 누구는 걱정해서 돕고, 누구는 사기 치고, 그 두 가지 상반된 일이 한 날 한 장소에서 데칼코마니처럼 벌어졌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느껴진다. 그만한 일에 그쳐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