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내 실수로 인해 수치스러운 순간들을 겪고는 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루어보자면 스스로가 속으로 느꼈던 수치보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 당하며 수치를 느꼈던 순간이 더 강렬하고 오랜 시간 동안 기억에 남아있고는 했다.
특히나 누군가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인해 내가 바보가 된 것만 같았을 때, 그때 당시에는 난 그가 인간쓰레기라며 그를 매도했지만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로 인해 나름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었다.
수치를 느끼게 만든 원인인 실수를 줄이려고 노력했었고, 그로 인해 내 삶 속에 좋은 습관이 자리 잡아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언젠가부터 그 습관으로 인해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었더라.
수치를 느꼈던 순간만큼은 굉장히 괴로웠다.
그 순간만큼은 불완전하던 자존감이 박살 났으며, 우울해졌으며, 나는 자책하며 사람이 무서워지고는 했었다.
사람들의 비웃음이 꼬리표처럼 나를 따르는 것만 같아서 사람들의 눈길 하나도 무서워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수치와 상처로 인한 아픔이 조금씩 희미해져 갈 때쯤, 그로 인해 내 안에 좋은 습관이 생겨난 걸 느꼈다.
내 깊은 수치로부터 나를 스스로 자유하게 해 줘야겠다는 결심은, 사람들 앞에서 내 실수를 가지고 내게 수치를 안겨주었던 사람이 그 일에 대해서 제대로 기억조차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다.
내게 한동안 지독한 가해자였던 그는 동료들 앞에서 내 실수한 모습을 흉내 내며 함께 깔깔댔고, 그에게는 가벼운 농담거리였을지는 몰라도 우연히 복도를 지나가다 그 광경을 본 내게는 한동안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 장면, 나를 흉내 내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 자존감은 박살이 났고 나는 당장이라도 어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는 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5년 동안 지독하게도 나를 따라다녔다.
처음에는 죽을 것만 같은 수치심과 우울감을 느꼈고, 그 이후로 조금 무뎌지고 나서는 그 기억이 불쑥 떠오를 때마다 약간의 수치심을 느끼고는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로 인해 물렁거리기만 했던 내가 조금은 더 독해졌고 타인에게 밑 보이지 않는 방법을 ‘덕분에’ 터득했더라.
그걸 깨닫고 나서 신께서 내게 자가치유하라며 주신 기회인지, 같은 업계에 일해서 내게는 가해자였던 그를 알게 된 이가 전해준 이야기는 가히 놀라웠다.
그는 이야기를 마구 왜곡해서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게는 한없이 끔찍한 기억이었던 그 장면을 자기가 한 것인지도 몰랐으며 심지어 그는 내가 안타깝다고 말했다고 했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던 직후에는 분노했다.
가해자인 그가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인척 기억 속에 묻어뒀다는 게.
그런데 시간이 좀 흐르고 보니 억울함이 뒤따랐다.
그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기억에 나는 얽매여서 얼마나 깊은 수치심에 괴로워하고 발버둥 쳤었나.
그 세월이 아까워서라도, 나는 일종의 정신승리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나 보다.
그 ‘덕분에’ 내가 이렇게 좋게 변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나는 그 고통의 세월에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었다고, 스스로 의미부여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바보 같은 실수로 인해 자존감이 박살 나고 수치심이 대신 자리 잡았던 순간이 아예 무의미하게 흘러가버리는 건 싫어서 내가 억지로 의미 부여하고 붙잡았는지도 모른다.
그 수치심을 통해 내게 배움이 있었다는 의미 가득한 결론을 내리고 싶은 미련한 욕심이라 할지라도, 나는 이 결론이 좋다.
이 결론을 내리고 나서야 어제 겪었던 일처럼 겪던 수치심을 다시 겪지 않았고 나는 원망으로부터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며 내가 실수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으니 말이다.
그러니 나는 그냥 실수로 인한 수치의 순간이 배움의 순간이라고 주장하며 살아가려 한다.
원망과 수치를 떠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