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독립: 02 죽음을 맡길 공간은 병원 하나가 아니다

병원 말고 다른 곳이 있다는 걸 몰랐다

by 죽음독립

다른 공간을 알지 못했던 우리는 당연히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의 야간 간병을 하던 날, 엄마는 밤새도록 침대 난간을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간호사실 옆 처치실이었다. 섬망이 심해지면 엄마는 큰 소리로 과거를 되새기듯 말했는데, 오래전 사람들의 이름과 지나간 일들이 밤마다 뒤섞여 나왔고, 간호사들은 그런 엄마를 눈에 잘 띄는 자리로 옮겼다. 정신은 흐릿했지만 한 문장만은 또렷했다. "여기서 나가게 해줘." 횡설수설하는 말들 사이로 그 말만 반복됐다. 침대는 몸을 보호하는 장치였지만, 그날 엄마에게는 감옥처럼 보였다.


병원이 정답인 것 같았다.

그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엄마가 일단 병원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엄마가 어떻게 될까 봐 어떻게든 응급실에 들어가려 했고, 병실에 입원시키기 위해 지인을 찾고 전화를 돌리고 가능한 길을 다 알아봤다. 입원이 먼저였다. 그때 우리 눈에 병원은 선택지라기보다 거의 정답에 가까웠는데, 거기 말고는 답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요양병원이 어떤 곳인지, 호스피스가 누구에게 열려 있는지, 집에 의료와 돌봄을 들이는 방법이 무엇인지, 그런 정보가 머릿속에 거의 없었다. 모르면 사람은 가장 익숙한 쪽으로 가게 되고, 우리도 그랬다. 엄마 상태보다 먼저 병실을 구하는 일이 중요해졌고, 그 공간이 어떤 성격을 가진 곳인지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병원은 가장 빠른 공간이다. 검사도 빠르고, 처치도 빠르고, 응급 대응도 빠르다. 갑자기 호흡이 나빠지거나 열이 오르거나 수치가 흔들릴 때는 이런 속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병원은 오래 머무는 사람의 생활을 중심에 두고 설계된 공간은 아니다. 시간표가 있고, 출입 규칙이 있고, 몸은 계속 관찰되며, 사람은 금세 환자로 압축된다.


한국은 2023년 기준 인구 천 명당 병상 수가 12.6개로 OECD 평균 4.2개보다 훨씬 높다. 병상은 많지만 그것이 마지막까지 머무를 공간이 넉넉하다는 뜻은 아니다. 빠르게 살피고 빨리 대응하는 데 강한 구조일 뿐, 오래 견디는 데 맞는 공간이라는 말은 다르다.


요양병원은 많은 사람에게 현실적인 선택지다.

요양병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는다는 사실 자체를 쉽게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집에서 돌봄이 불가능한 가족도 많고, 환자 스스로 자녀에게 기대고 싶지 않아 그곳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나 역시 나중에는 아이에게 내 마지막을 통째로 맡기지 않기 위해 요양병원을 먼저 떠올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정직한 선택이다.


다만 엄마가 머물던 요양병원의 하루를 떠올리면 말은 조금 달라진다. 대부분의 간병은 외국인 돌봄 노동자들이 맡고 있었고, 커튼으로 나뉜 자리들 사이로 콧줄을 낀 환자들의 거친 숨소리와 가래 끓는 소리, 텔레비전 소리, 간병인의 발소리가 한꺼번에 섞여 흘렀다. 엄마는 그 안에서 환자로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건강이 다시 나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도, 그 공간은 삶을 회복하는 곳이라기보다 하루를 하루씩 이어 가는 곳에 가까워 보였다. 가족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다.


그래서 문제는 요양병원이라는 선택 자체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현실적으로 그곳을 마지막 공간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데도, 그 공간이 아직 마지막의 시간을 견디는 방식으로 충분히 바뀌지 못했다는 데 있다. 한국은 장기요양 병상 가운데 병원 안에 놓인 병상 비중이 52%에 이른다. 절반 이상이 치료가 아닌 돌봄이 필요한 시간을 병원 구조 안에서 보낸다는 뜻이다. 늙고 약해질수록 생활 공간보다 병원 구조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호스피스는 모두에게 같은 문으로 열려 있지 않았다.

호스피스 병동은 결이 분명하다. 더 늘리는 치료보다 덜 아프게 하는 기술에 중심을 두고, 통증을 줄이고 숨을 덜 차게 하고 섬망을 다루며, 가족 상담과 사별 지원까지 함께 간다. 병원보다 목적이 선명하고, 요양병원보다 마지막 시기를 직접 다룬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런데 나는 실제로 호스피스 병실을 알아보기 위해 스무 곳이 넘는 기관에 전화하고 상담했다. 답은 비슷했다. 대부분의 시설이 여전히 암 환자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말기 간경화 환자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엄마는 말기 암환자 못지않게 심한 고통과 전신 쇠약, 섬망과 합병증을 겪고 있었지만, 제도와 시설의 기준 안에서는 자꾸 경계 밖으로 밀려났다. 더 아픈 사람인데도 더 맞는 공간으로 옮겨갈 길은 더 좁았다.


좋은 공간이 있다는 사실과 그 공간이 실제로 나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제도는 존재하지만 접근은 제한된다. 문은 있되 열쇠는 일부에게만 주어진다. 2025년 9월 기준 국내 가정형 호스피스 운영기관은 40곳, 이용 환자는 2,042명이었다. 병원 밖 임종 지원이 늘고는 있지만, 아직 충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집은 정서가 아니라 구조가 붙을 때 공간이 된다.

집과 재택의료는 가장 많이 오해받는 선택지다. 집은 정서의 공간으로만 읽히고, 재택의료는 정보를 가진 사람만 아는 제도로 남아 있다. 그런데 둘이 만나면 전혀 다른 그림이 된다. 집은 익숙함을 주고, 재택의료는 그 익숙함이 곧바로 방치가 되지 않게 붙잡아 준다. 방문진료, 방문간호, 복지용구, 요양보호사, 비상 연락망이 이어지면 집은 더 이상 단순한 사적 공간에 머물지 않고, 의료와 돌봄이 들어오는 거점이 된다.


영국은 이 점이 특히 분명하다. 2024–25년 한 해 동안 호스피스 전문 인력의 가정 방문은 59만 회, 일반 의료와 돌봄 인력의 방문은 79만 회였다. 집이 병원의 반대말이 아니라, 의료와 돌봄이 일부 들어올 수 있는 자리라는 뜻이다.


대만은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었다. 2019년 시행된 환자자주권리법은 사람이 의식을 잃기 전에 돌봄과 치료 방향을 문장으로 남길 수 있게 했고, 2024년부터는 사전돌봄계획 상담 비용도 건강보험 적용 범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대화가 빨라지면 병원 말고 다른 공간도 더 일찍 떠오른다. 선택지는 정보만으로 열리지 않고, 대화가 시작되는 시점에 따라 열리기도 한다.


병원과 집 사이의 자리를 더 세밀하게 봐야 한다.

지금 한국에서는 병원과 집 사이에 놓인 공간을 충분히 말하지 못한다. 병원에 더 오래 머물거나 집으로 돌아가거나, 둘 중 하나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족은 줄고, 혼자 사는 기간은 길어지고, 병원 바깥에서 버텨야 하는 시간은 더 길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그 사이의 자리를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어디까지가 의료의 몫인지, 어디서부터가 돌봄의 몫인지, 어떤 구조가 있어야 마지막 공간이 병실 아니면 방치라는 두 가지 말로만 갈리지 않는지. 그 문제는 뒤에서 더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엄마가 붙잡고 있던 난간을 떠올리면 이 차이가 더 분명해진다. 그날 엄마는 병 때문에만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놓여 있는 자리 때문에도 힘들어 보였다. 같은 치료를 받더라도 어떤 공간에서는 사람이 더 빨리 지치고, 어떤 공간에서는 조금 덜 흔들린다. 마지막 공간은 배경이 아니라 몸과 수면과 표정, 하루의 리듬까지 바꾸는 조건이다.


죽음을 맡길 곳은 사실 하나가 아니다. 우리는 너무 오래 한 군데만 알고 살아왔을 뿐이다. 이제는 다르게 물어볼 때다. 어디서 마지막을 맞고 싶은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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