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노동?

by Hache

일을 시작할 때마다 고민한다.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니 다급한 마음을 안고 성급히 일을 시작해야 하나?'


'아냐. 전문성을 키우기 위한 수련 시간을 가진 후에 차분히 시작하는 게 맞아.'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은 단순노동 제공이 아니야", "이건 응용과학이야!"라고 매일매일 머릿속으로 외쳐봐도 소용없다. 어쩐 일인지 코드가 손에 올라오기만 하면 사고가 멈춘다. 그저 헐레벌떡 헐레벌떡. 신발 벗겨질 듯 말 듯 간신히 키보드 위를 뛰고 있는 꼴불견 손가락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멋진 설계도, 공학적 원칙도, 지식도 소용없다.


개발자로서 첫 커리어 경험은 대기업 인턴사원이었다. 당시 인턴사원들을 담당했던 사람은 게임사업개발본부장이었다. 그는 매주 월요일 오후 2시 주간업무보고를 요구했는데 우리는 모두 그 시간을 두려워했다. 사회 초년생이기도 해서 그랬지만 그보다 더는 그의 성품이 개차반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나이에 준하던 그는 마치 '너희는 벌레다'와 같은 자세와 눈초리, 그리고 말로 보고를 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철저히 짓밟아 놨다. 당시 면접 인터뷰 트렌드가 압박 면접이었기 때문에 인턴기간에도 이런 태도가 이어졌을 것이라 싶기도 하지만 어쨌건 그때는 매주 그 두 시간이 지옥 같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철저한 가스라이팅을 했던 것일 뿐인데.


그런 그에게도 배울 점은 분명 있었다. 어쨌건 처음인 우리보다 30여 년 먼저 커리어를 시작했고 그렇기에 좋은 교훈이건 나쁜 교훈이건 얻어갈 것이 없진 않았다. 그중 한 문장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 일처럼 뇌리를 스친다.


글로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개발 가능하다

이 말과 함께 6주의 개발기간 중 반드시 2주간 동안은 '설계를 해라'는 말을 전했다. 6주는 분명 짧았다. 게임 서버, 클라이언트, 핵심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이를 모바일 패키지로 만들어내는 일은 커리어가 제법 쌓인 지금 판단하기에도 1인 개발에는 부족한 기간이다. 시간을 모두 써도 부족한데 그중 2주간은 코드에 손을 대지 마라고 하니 신경이 무척 곤두섰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 모두는 설계도를 가급적 철저히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렇게 시간을 써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스타트업의 실무 현장은 절대 2주란 시간을 이렇게 쓰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만원 지하철에서 내린 사람들이 모두 같은 속도로 휩쓸려 가는 모습을 본 적 있을 것이다. 나 홀로 고고히 차분한 걸음을 옮길 수 없다. 맞는 방향인지는 일단 개찰구를 나가고 생각해야 한다. 잘못 나왔다면 바른 방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심지어는 목적한 역과 다른 역에 내려지는 경우도 있어 그럴 때는 눈물을 머금고 탈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다음 차를 기다려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노동의 본질과 변화